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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를 통해 나타내신 구원의 능력 (고전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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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통해 나타내신 구원의 능력 (고전 1:18-25)
 

알코올 중독에다 방탕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였는데, 그 날 이후로 술과 방탕한 생활을 끊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그의 술친구들이 찾아와서 기독교 신앙을 버리게 하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와 같이 교양이 없는 사람은 성경에 있는 기적을 믿을 수 없을 걸세. 예를 들면,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지”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는지 아닌지 나는 모르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집에서 예수님이 맥주를 가구로 변화시킨 것은 사실이야” 이 사람이 술을 끊자 술값이 가구를 사는데 사용 된 것을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그 생활에 어떤 식으로든 참신한 변화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변화가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으리만치 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변화라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작은 변화가 점점 큰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 4:2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과 같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그 사람의 마음 밭에 말씀의 씨앗을 심은 것과 같습니다. 때가 되면 말씀이 싹이 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점점 자라납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 생활 속에 선하고 덕스러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생활에 아무런 참신한 변화가 없다면 다시금 그 사람의 믿음을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살았다 하는 이름만 있지 실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놓여 있지는 않은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이 시간 저는 “십자가를 통해 나타내신 구원의 능력”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함으로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구원에 대하여 언급할 때 먼저 생각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구원의 주체가 누구인가, 구원의 객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누구를 구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시며, 우리 인간들을 구원의 객체라고 말씀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수많은 인간 가운데 누가 구원을 받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로마서 9장에 말씀하기를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자기 백성 될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를 살펴봅시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선민의 조상으로 삼으신 내용이 나옵니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선민의 조상으로 택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의롭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한 지혜와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성경 그 어디에도 아브라함이 원래 의로운 자였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이사야서 51장 2절에 이르기를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아브라함을 불러 선민의 조상이 되게 하신 분은 순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삭에게 쌍둥이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가 에서이고 그 동생이 야곱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 보면, 야곱이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차지합니다. 야곱은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사고, 형이 사냥 나간 틈을 이용해서 변장하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같은 야곱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계승자로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서와 야곱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대하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9장에 보니 이같이 말씀합니다.

“10)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은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인 것을 잘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야곱에게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에서보다 야곱을 더 사랑하셔서 선민의 조상으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태 중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이르기를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곧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4절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선택은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이고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것이지, 인간들이 터럭만큼도 간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하여 말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선택을 받지 못하면 제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예정론은 구원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는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입니다.

사도들이 활동하던 초대교회 당시나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복음을 배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자는 믿는 자들을 말하고, 후자는 믿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의 내용이 전혀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 이하에 이르기를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와도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들이 마음속에 그렸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고 만국을 통치하는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한 사람이 아닌가? 율법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신 21:23)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이러한 논리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면 헬라인들을 비롯하여 이방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그들의 눈에는 너무나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만약에 알렉산더나 시저와 같은 위인을 그리스도로 믿으라고 하면 그들은 수긍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렉산더나 시저는 패배를 몰랐던 위대한 정복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에게는 제 한 몸도 건지지 못하고 힘없이 붙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라는 말이 미련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형편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예수님이 아닌 다른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지금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와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세상 사람들 역시 지난날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개념을 미련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믿지 못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위대한 인물들에게 환호합니다.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예술가, 위대한 과학자, 위대한 가수 등등 그들이 가는 곳마다 지지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환호하며, 카메라 후레쉬 세례가 퍼부어집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위대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목수를 구세주로 믿으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 기독교인들을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어라고 말씀합니까?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 말씀의 핵심은,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구원의 방편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믿는 우리를 보고 항의조로 묻습니다. 왜 기독교는 융통성이 없고 배타적이 되어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느냐고 말입니다. 무슨 종교를 신봉하건 진실하게 믿으면 다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다른 종교들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고 얼마나 좋으냐고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가 아니시라면 그들의 제안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시라면 예수만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말은 억지 주장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가 분명하다면 저들의 주장은 무익하고 어리석은 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근거로 우리는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뿐 아니라, 삼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허황된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나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것이나 다 미련하게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세인들이 미련하게 여길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되십니다.

사도들을 비롯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아무나 알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라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고 알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 경험을 의지하는 자일수록 더욱더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세상의 지혜나 지식이나 경험은 주 예수를 믿는데 오히려 방해물이 될 뿐입니다.

그러면 무슨 수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마태복음 11장 25절로 27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세상 종교들은 사람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것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사람의 머리로 이해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아야만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구원의 방법 역시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전도를 복음을 전하는 방편으로 삼으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의 복음은 전도를 통해서 전파됩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전도는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데 별로 효과가 없어 보입니다. 

좀 수준 있게 학술 세미나를 연다든가, 유명한 교수를 초청해서 기독교에 대하여 설명한다면 모를까, 그저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세요”라고 전하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부터 지금까지 복음은 전도의 방법을 통해서 전파되어 왔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자기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전도는 너무 미련해 보이니까요.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지혜로 판단해서 믿으려 하면 결국 믿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나 차원이 높아서 사람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이라야 복음의 진리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은혜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같이 말씀했습니다.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4)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철학의 도시인 아덴에 가서 철학자들을 상대로 유식한 말로 복음을 전했으니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사도는 아덴의 실패를 통해서 철저하게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 복음은 인간의 지혜로써 전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적으로, 또는 문학적으로 듣기에 좋고 아름다운 표현을 사용하는 것과 복음 전파는 하등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아름다운 표현이 진리의 빛을 가려서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데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하면 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복음은 사람의 머리로 이해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도는 자기의 지혜와 지식이나 언변을 사용해서 복음을 전하려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만을 전했습니다. 그는 복음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사도는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도가 고린도 사람들이 그를 해칠 것을 두려워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구나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명자의 올바른 자세를 대합니다. 우리는 나를 충성 되이 여겨 직분을 맡겨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막중한 일에 쓰임 받게 된 데 대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서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깨달은 사람이라야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는 말씀하기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해서 복음을 전했더니, 그를 통해서 성령의 역사하심과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조상 대대로 우상을 숭배해 오던 이방인들이 사도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운 말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할 때 항상 성령님께 “불신 영혼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서 죽은 영이 거듭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사람들이 고층 아파트에 살고,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 어디서나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첨단 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등 생활 방식이 몰라보게 변했을지라도, 한 가지 변치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의 영적 실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초대교회 당시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마음을 열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은총 입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전자에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와 어리석음의 대명사처럼 보이지만, 후자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야말로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십니다. 아무쪼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내신 구원의 능력을 힘입어 위대한 천국 백성의 새 삶을 살며, 구령의 열정으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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