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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하시는 하나님 (고후 7: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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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시는 하나님 (고후 7:2-16)


I.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이런 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이 납니다. 

긴 사막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여행가에게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행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광야를 혼자서 걸으며 겪었던 외로움이었습니까?” 여행가는 단호하게 “아닙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 한 낮의 뜨거운 열기나 밤중의 옷 속을 파고드는 추위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끝없이 이어진 여정의 지루함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기자가 다그치듯 물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이 여행가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막 여행 내내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내 신발 속에 있던 작은 모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인해서 힘들어 하게 됩니다. 때로는 지기 어려운 인생의 무거운 짐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또 때로는 갑자기 들이닥친 인생의 위기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누구나 겪는 일상의 작은 어려움들입니다.

그래서 남달리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도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달리 갑작스런 인생의 위기를 겪는 사람들도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너나없이 작은 어려움에 시달리는 우리 모두도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모두는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늘 찾아가 위로를 받고 싶은 사람들, 그들도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위로해 줄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도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아들은 늘 아버지에게 위로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아들을 위로하는 아버지는 아들보다 더 위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아들이 가진 문제는 이미 아버지가 다 겪어온 일이지만, 아버지의 문제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별것 아닌 일로 아버지의 위로를 받지만, 아버지는 아주 큰일을 당하고도 위로받지 못합니다.

딸은 한 번도 어머니를 위로하지 않습니다. 딸이 받는 위로는 어머니의 피와 생명입니다. 젊은 딸에게 어머니의 위로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딸은 고통 속에서 어머니의 위로를 받으며 성숙하지만, 어머니는 딸을 위로하며 두 배로 늙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늘 자식들을 위로하며 살아가는 아버지, 어머니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위로를 청할 사람도 없고, 위로해 줄 사람도 없지만 실제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목회자인 사도 바울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한 마디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오해를 받고 있어서 마음에 큰 상처가 있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비난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바울이 매사를 공정하지 않게 처리함으로써 불의를 행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둘째, 바울이 전하는 복음으로 인해서 율법이 파괴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셋째,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구실로 삼아 성도들의 재물을 착복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물론 이런 비난은 전혀 사실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터무니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비난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교회입니다. 바울은 이례적으로 이곳에 1년 6개월가량을 머물면서 교회를 보살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른 선교지로 떠나자, 교회 안에 세속 문화의 물결이 밀려들어와서 갖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서 첫 번째 편지인 고린도 전서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편지를 보내고 나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직접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많은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한 채 에베소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바울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이 교회를 찾아오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고린도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노골적으로 바울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교인들이 영향을 받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바울은 무척이나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교회보다도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사실과 다른 오해에 근거한 비난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목회자이지만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회자들도 때로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교인들이 많다 보니 저마다의 관점에서 볼 때,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과 다르게 비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정말 큰 수고를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엉뚱한 비판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많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고난과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들, 물론 위로가 필요합니다. 일상의 사소한 문제로 지쳐있는 사람들, 그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남들을 위로하고 돌보고 섬기는 이들, 그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서로 위로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II. 사람의 위로의 한계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위로가 필요하고 귀하지만, 사람의 위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이 갑작스런 큰 재앙으로 커다란 시련에 빠지자 세 친구가 위로하기 위해 찾아옵니다. 욥 2:11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저들은 서로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을 위로하겠다고 서로 약속하고 ,그 먼 길을 마다 않고 한 걸음에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정말 욥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고도 컸습니다. 아마도 저들의 방문이 욥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저들이 욥을 위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욥의 참담한 광경을 보고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아무 말도 욥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레 동안 밤과 낮을 꼬박 욥 곁에 그저 말없이 앉아있었습니다. 이 또한 욥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욥이 친구들의 위로에 힘을 얻었는지, 드디어 말문을 열었습니다.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탄식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은 나름대로 욥을 위로한다고, 자기 입장에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말이 욥과 논쟁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욥기를 보면, 4장부터 시작된 욥과 친구들 사이의 논쟁이 37장까지 무려 34장에 걸쳐 길게 이어집니다. 

사실 욥에게 이런 친구들과의 논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욥은 이 논쟁 도중 더욱 큰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위로한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욥에게 말했지만, 그 말이 위로는 커녕 욥에게는 큰 고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유익은 있지만 온전한 위로는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그 위로가 더욱 큰 고통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의 위로를 너무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 위로가 부분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분명히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할 때,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위로가 온전한 위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III. 하나님의 위로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로하셔서 정말 온전한 위로를 받았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본문 5-7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정말 자기와 일행이 힘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 일행을 돌아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와 일행을 위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친히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위로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 온전한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 결과 온전히 회복되고 다시 일어서게 되고 또 다시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어떻게 느낄 수 있게 될까요?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 5-6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다윗은 마게도냐에 있을 때 정말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박해로 인한 다툼이 있었고, 안으로는 내부 갈등으로 인한 두려움이 있어서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자기를 기억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디도를 보내셔서 위로하셨다는 것입니다.

사 49:14 이하를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어머니가 자식을 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머니가 그 자식을 잊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잊을 수 없습니다. 특히 병들거나 장애를 가졌거나 딱한 처지에 놓인 자식은 더더욱 잊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고통 중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잊을 수 없으십니다. 우리가 이 점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위로를 깊이 느끼게 됩니다.

CCM 가수 이은수가 부른 노래 가운데 [너는 내 아들이라]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 때에
조용히 다가와 손잡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나에게 실망하며 내 자신 연약해 고통 속에 눈물 흘릴 때에
못자국 난 그 손길 눈물 닦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힘들어 할 때,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의 처지를 기억하시고, 우리의 고통을 기억하십니다. 

다음으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이미 역사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7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역사하신 일이 세 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디도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교회에 파송했지만 적대세력에게 해를 당할까 노심초사했었습니다. 그런데 저가 무사히 다녀온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음 깨달았습니다.

둘째는 디도가 따뜻하게 환대를 받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도가 무사히 돌아왔을 뿐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정성스런 환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역시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셋째는 디도가 전해 준 고린도 교회의 소식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진정 사모하고 있다는 것이고, 저들이 바울을 진정한 지도자로 인정하고 바울의 가르침에 순종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또한 하나님의 역사하심 때문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새삼스럽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보이지 않는 손길로 역사하고 계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딱한 처지를 기억하실 뿐 아니라, 자기를 위해 구체적으로 일하고 계심을 깨닫고, 정말 큰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 뜻밖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선배 목사님 사모님의 전화입니다. 벌써 20년 전 함께 사역했던 목사님이시고, 그동안 거의 연락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내던 분입니다. 더더욱 사모님과는 한두 번 모임에서 인사만 했던 사이입니다. 그런데 전화를 하신 것입니다.

기도 중에 갑자기 제가 생각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해서 중보기도하라는 하나님의 강한 명령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사실 최근에 너무 무거운 짐을 때문에 지쳐있었습니다. 교회 건축에, 노회 일과 총회적으로 맡은 일들에, 그리고 중국선교 일들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화 한통으로 정말 많은 위로를 받았고, 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생각지 않은 사람들에게 중보기도 하게 하시고, 저를 밀어주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됐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이미 역사하고 계십니다.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이미 일하고 계십니다. 이 점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딱한 형편과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아십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이미 일하고 계십니다. 이 점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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