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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일 . 사람의 일 (마 16: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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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 . 사람의 일 (마 16:21-23)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가가 예루살렘이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 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 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로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지난 주일에는 실락원과 복락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실낙원이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창설해주신 낙원인 에덴동산을 잃어버림을 말하고, 복락원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잃어버린 낙원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낙원 곧 천국을 기업으로 얻게 해주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낙원과 복락원이라는 단어가 아주 대조적이었듯이, 오늘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라는 대조적인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는 중에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황제 예배의 중심지와 같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저마다 사람들에게 들은 대로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에 즉시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또 다른 제자 도마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과 쌍벽을 이루는 위대한 신앙고백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시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시면서 흡족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는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오늘 본문 21절의 말씀을 보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했습니다. 즉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은 직후에, 십자가의 수난을 처음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 후에야 자신의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신 것은, 십자가 수난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적절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이전에는 자신의 수난에 대해 간접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말씀하셨지만, 이제 베드로의 공개적인 신앙고백이 있자, 메시아 사역의 최대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 수난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때를 기다려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과 이해를 한 자만이, 십자가 수난의 의미를 바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주님의 일하심에는 적절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시에는 모두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진리는 사람의 성장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이 올바로 성장하려면, 만사를 모두 때에 맞게 하여야 합니다. 예컨대 아무리 아기가 사랑스럽더라도, 몸에 좋다고 처음부터 고기를 먹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젖을 먹이다가 차차 이유식을 하고, 이후에 단단한 음식과 고기를 먹이는 법입니다. 교육도 마찬가지여서 어린아이에게는 처음부터 고등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숫자와 덧셈, 뺄셈과 같이 쉬운 것부터 가르친 후에, 차차 어려운 수학 과목을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길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이와 반대로 행동함으로써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컨대 많은 부모들이 자녀가 사랑스럽다고 무조건 영양가 높은 음식을 한꺼번에 많이 먹임으로써 아이를 오히려 비만아로 만드는가 하면, 영재 교육을 시킨답시고 한꺼번에 무리한 교육을 함으로써, 오히려 학습 의욕을 잃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성향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무조건 빨리 많은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달라고 떼를 쓰는 성도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조급하게 행동함으로써 일을 그르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나, 항상 적절한 때를 기다리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을 준비가 될 때까지 연단하시고 훈련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지체치 않고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조급하게 굴지 말고, 먼저 우리들의 성숙을 위해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심령을 정결케 하고 그릇의 크기를 넓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릇에 합당한 은혜와 복을 때를 따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2. 우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그 값을 치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전의 간접적인 수난 예고와는 달리, 십자가 수난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게 될 것인지를 분명하게 예고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러한 수난과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종교 지도자들은 산헤드린의 구성원을 말하는 것으로, 산헤드린은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와 사법기관을 합해 놓은 기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을 체포하도록 보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에 그 어떤 허물이나 책잡을 일을 발견치 못했노라고 보고했습니다. 심지어는 로마법의 집행자 총독 빌라도조차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실토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조차 고백했던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그 누구도 죄를 찾지 못하였던 예수님, 그 누구도 죄를 발견하지 못하여 거짓 증거를 날조해야만 했던 예수님은, 도대체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까? 아니 죄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의 처형을 지휘했던 로마의 백부장조차 의인이라고 고백했던 그리스도께서, 왜 가장 비천한 죄수들만이 져야 하는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역사의 한 우연한 실수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의 우연이나 실수도 아니요, 더더구나 그리스도의 그 어떤  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 고난은 오늘날 우리들이 저지르는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한 속죄의 제사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가슴에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저지를 때마다, 우리 주님의 손과 발에는 또 한 번씩의 못이 박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죄를 멀리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러한 진리를 우리만 간직하지 말고 세상에 나가 전파함으로써, 오늘도 죄짓기를 물마시듯 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 은혜 앞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힘써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3. 진정한 사랑은 입술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십자가의 수난 예고를 들은 베드로는 주님을 붙들고 항변하며 만류하였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여기서 ‘항변하며’라는 말의 원뜻은 ‘책망하다’ 라는 의미가 있으며, 또한 ‘그리 마옵소서’란 불행한 사건에 대해 ‘N0!’라고 강하게 반대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 의 수난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붙잡고 책망조로 만류하는 베드로의 행동을 통해, 그의 복합적인 심정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자, 자신의 기대가 어긋나는 데 대한 실망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하리라는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베드로는 그의 이러한 말처럼 그리스도를 끝까지 섬기며 따랐습니까? 그리하여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고난을 받지 않도록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정작 그리스도께서 체포당하시는 순간이 오자,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하기에 바빴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자기가 그리스도와 연루되어 동일한 고난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세 번씩이나 그것도 저주하며 그리스도를 부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즉 그는 평소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순간이 오자, 자신의 보신을 위해서 주님을 배신하고 부인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러한 베드로의 행동을 바라보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과연 우리는 베드로와 달리 주님에 대한 고백과 우리의 삶이 일치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의 주기도문을 외우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이름보다는 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데 더 관심이 많지는 않습니까? 또 찬송가를 부르며 아골 골짜기 빈들에도 가겠다고 입술로는 수십 번씩 고백하면서도, 막상 우리의 몸은 부귀영화와 육신의 편안함을 보장해 주는 곳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거나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 나약한 우리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약한 우리를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일찍이 주님께서는 입으로는 아버지의 명령에 대해 ‘예’라고 말하면서도 이를 실행치 않았던 맏아들과, 입으로는 ‘싫소이다’라고 말했지만 후에 뉘우치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한 둘째 아들의 비유를 통해, 누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가를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술은 비단 같으나, 행동은 패역했던 바리새인들과 같이, 잎만 무성한 나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입술과 삶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사람들로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4. 주님을 따르는 자는 그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강력하게 항변하며 만류하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십자가의 대속적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뜻을 가리키며, ‘사람의 일’이란 십자가의 고난이 없는 영광만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세속적 메시아로 오해하여, 십자가의 고난 없이 높은 자리와 영광만 생각하고 있음을 아시고, 이를 엄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책망은, 오늘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참으로 따끔한 채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지상에는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1/3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숫자나 규모만으로 볼 때, 기독교는 가히 세계 제일의 종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내면에 있습니다. 즉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외적으로는 모두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내적 동기와 목적에 있어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실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진정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분과 함께 끝까지 동행하였던 사람들은 참으로 극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일으키신 이적과 능력, 그리고 육신의 떡과 세상의 영광을 바라고 그리스도를 좇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 가운데에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진정 영원한 진리와 영생을 사모하여, 주님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지금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세속적 이익을 바라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면,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은커녕, 오히려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고 교회에 문제만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책망을,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시는 엄중한 책망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역시 혹 베드로처럼 주님을 오해하고 세상의 이익과 영광을 위해 주님을 따랐던 것이라면, 그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새롭게 되어, 온전한 믿음의 자세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여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못하리이다.”고 강력하게 만류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청천벽력과 같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대노하셨습니다. 그토록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죄인까지 불쌍히 여기셨던 주님께서,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를 참으로 혹독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그토록 혹독하게 책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려 하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님의 최측근인 베드로를 사용하여, 그 하나님의 일을 막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성공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을 베드로는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것이냐 아니면 사람의 일을 생각할 것이냐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순종하지 않게 될 때, 사탄의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둘 사이에 중립지대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애틋한 인정 때문에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만류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정 그것도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사탄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인정은 사람의 일이요, 사람 곧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혹독하게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일과, 인정 앞에서 택일을 잘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실 때에 무리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믿는 일을 가장 먼저 하고, 그리고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날마다 일속에서 파묻혀 살아가는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오늘날 자기의 일만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구속해주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믿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것은 곧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요, 모든 선한 일 중에서 가장 선한 일임을 명심하고, 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신실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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