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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를 세워주는 사람들 (엡 5: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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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세워주는 사람들 (엡 5:22-33)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죽도록 사랑했습니다. 둘은 결혼을 하여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소는 자신이 좋아하는 풀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날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사자에게 주었습니다. 사자는 풀로 만든 음식이 싫었지만 참았습니다. 사자도 먹이를 사냥하여 가장 맛있는 부위의 살고기를 가지고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그러나 참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둘은 심각하게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눴습니다. 소와 사자는 서로에게 왜 이런 맛없는 음식을 만들어 주느냐고 질책하며 다퉜습니다. 끝내는 서로의 정당성과 자신의 뜻을 주장하며 헤어졌습니다. 그들은 헤어지면서 ‘나는 너를 위해서 최선을 다 했어’ 라고 서로에게 말했습니다.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최선은 최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최선은 하면 할수록 도리어 최악을 만들고 맙니다. 자기 위주의 최선은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때가 많습니다. ‘이해하다’ 는 영어로 ‘understanding'입니다. 즉 상대방의 아래에 서서 그의 상황과 그의 처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에서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김홍석 목사님과 미얀마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목회하는 후배 목사를 만나 서로를 소개시키며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상대방을 존경하면 팔짱을 끼고 대한다고 합니다. 미얀마 사람들의 풍습을 모르는 김홍석 목사님이 미얀마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는데 사람들이 모두 팔짱을 끼고 설교를 듣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 말을 하거나 들으면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김목사님은 이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구나 싶어서 약간 정색을 하고 ‘당신들 설교를 듣는 예의가 없다. 팔짱을 내리라’ 고 했답니다. 그러자 미얀마 사람들이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팔짱을 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은 김 목사님을 존경한다는 표시를 한 것인데 존경하지 말라고 도리어 퉁명스럽게 이야기한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주장과 생각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오해가 생기고 상처가 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려면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야 합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 서로 사랑하며 살려고 해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도리어 힘들어 지고 상처가 됩니다. 사람들 마다 성격과 행동에 특성이 조금씩 다릅니다만 크게 보면 남자와 여자는 태생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큰 틀에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알고 대하면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더 넓어지고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성경도 남자와 여자가 신체적, 심리적, 영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는 아담 혼자 독처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담 혼자 있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고 하는 말은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하고 부족함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아담이 잠을 잘 때 갈비뼈를 하나 뽑아서 그것으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짝지어 주시고는 만족하시며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인 아담의 부족한 면을 채우기 위해서 만든 것이 여자입니다. 그러니 남자와 여자가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같을 수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다른 점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만 이 시간에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크게 한 가지만을 통해 부부의 문제, 의사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먼저 남자의 특성을 살펴보기 위해 22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하나님은 부부가 행복하고, 가정이 행복하려면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복종하라’는 말에 대부분의 아내들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복종하라는 말에서 굴욕과 맹종적인 의미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워 죽겠는데 복종하라니 말도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복종하라는 말은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아내는 남편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33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여기에서 복종은 굴종, 맹종의 의미가 아닌 존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부의 행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아내들에게 어떤 상황, 조건에서도 남편을 존경하라고 말씀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지으셨기에 그 남자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자신의 역할과 지위를 통해 확인합니다. 조금 더 직선적으로 말하면 권력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지으시고 아담으로 하여금 주도하게 하셨습니다. 하와도 아담의 갈비뼈, 즉 몸의 일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남자는 태생적으로 ‘Social status’ 즉 ’위상, 지위, 신분‘을 중요시 여깁니다. 

남자들은 자신의 허물과 약함, 그리고 불안함과 수치심을 ‘사회적인 신분, 지위, 위상’ 뒤에 숨깁니다. 그러기에 남자들은 사회적인 위상, 지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을 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무너지면 남자들은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를 못합니다. 그런 면이 있기에 남자들이 여자들 보다 권력을 지향하는 정치에 더 적극적입니다. 남자는 대체적으로 자신의 status가 인정되는 곳을 중심으로 살려고 합니다. 가정에서 그 위상과 지위가 인정되지 않으면 그는 그것이 인정되는 직장, 또는 다른 단체 등에 열심을 냅니다. 또 직장에서 자신의 status가 인정되지 않으면 그것이 인정되는 가정과 다른 곳에 열심을 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직장과 가정에서 자신의 status가 인정되지 않으면 교회에서 자신의 status를 가지고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도를 넘으면 교회가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의 행복을 위해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그런 특성이 있으니 가정에서 가장으로서의 존재감을 가질 수 있도록 어떤 상황에서든지 존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고, 가정의 행복이 된다는 말입니다. 

50대 중반을 넘어 직장에서 퇴직하는 남편들에게 아내들은 더 깊은 생각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퇴직을 하는 순간부터 남편들은 사회적인 신분과 위상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약함과 불안함을 숨길 수 있는 터전을 잃은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가장으로서의 위상과 신분을 잃게 되면 그곳에서 자신의 약함과 불안함, 부끄러움을 숨길 곳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남자의 status가 경제적인 능력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성 스스로도 경제적인 힘으로 자신의 status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활동이 더 이상 이뤄지지 않게 되면, 그리고 가족들이 가장의 경제적인 그늘과 권력에서 독립하게 되면 가장으로서의 권력과 지위가 인정되지 않습니다. 이런 면은 가장들이 스스로를 경제적인 힘으로 가족관계를 맺지 않았는지 한 번 심도 있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점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가정에 질서가 이뤄질 때 가능합니다.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 가장의 권위는 어느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유지되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지혜로운 아내들은 남편에게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세워준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집에서 식사를 할 때에도 가장의 권위를 세워줘야 합니다. 식사를 할 때 자녀 중심이 아닌 남편 중심의 식사도 중요합니다. 식사 하는 가운데서 가장의 권위를 아내들이 만들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일이고, 어떻게 보면 소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속에서 가장의 권위가 세워집니다. 그런 지혜가 부부를 행복하게 만들고 가정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부의 행복은 일방적인 섬김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닌 부부 서로간의 존중함 속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아내에게 남편을 존중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남편에게는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내를 사랑하는데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아담이 이성적이고, 목표 지향적이라면 하와는 감성적이고, 과정 지향적입니다. 부부가 함께 쇼핑을 가면 대체적으로 쇼핑하는 과정에서 다투곤 합니다. 남편은 살 것만 사고 빨리 가자고 합니다. 목표와 목적을 이루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더 이상 그곳에 머물 필요가 없습니다. 목표 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내는 이것저것을 둘러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건을 산다, 안 산다 보다도 쇼핑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입니다. 과정 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는 순간 ‘이는 내 뼈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남자는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사랑을 하고, 선호합니다. 그러기에 남자의 사랑은 비주얼적인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성은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라’는 아담의 고백을 들으며 사랑을 느낍니다. 그래서 여성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을 통해서 사랑을 느낍니다. 여성의 사랑은 오디오적인 것에서 시작합니다. 여성들은 대체적으로 함께 대화를 나눠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부부 금슬이 좋은 부부를 보면 대체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는 부부입니다. 금슬이 좋으니까 대화를 많이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화를 많이 하기 때문에 금슬이 좋은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성장하면서 자신의 성적인 정체성을 찾아가는데 있어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태어나면 어머니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성장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가 되면 남자는 자신과 동일하게 여겼던 어머니에게서 신체적인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면서 어머니와 자신을 분리하는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동일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남자는 분리와 독립을 중심으로 하는 성품을 가지게 됩니다. 반면에 여자는 자라면서 어머니와 자신의 동질감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그러기에 여자는 분리와 독립보다는 관계 중심적인 성품을 가지게 됩니다. 모성애는 부성애와는 달리 더 많은 것을 품고 감쌉니다. 왜냐하면 독립보다는 관계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여자들의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아름다움에 숨깁니다. 그러기에 여자들은 남자들 보다 훨씬 아름다움을 더 추구합니다. 아름다움 뒤에 자신의 약함을 숨기고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은 외모의 아름다움도 포함됩니다만 포괄적으로는 관계의 아름다움입니다. 여자들은 관계를 소중하게 확인할 수 있는 조그만 것에 쉽게 감격하고 기뻐합니다. 아내들이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자신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작은 표현들입니다. ‘수고했다. 고맙다. 사랑한다. 애썼다. 힘들지’ 등의 관계를 확인시켜주는 말입니다.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남편의 사랑에서 아내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8절에서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것을 알고 아내와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것 자체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교회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남편과 아내는 그런 관계라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존재감이 인정되는 곳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도를 넘으면 고통과 아픔이 있지만 자신의 존재감을 갖게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감을 가장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부모의 존재감이 인정되면 부모들은 행복합니다. 부모에게서 자녀들이 존재감을 인정받으면 자녀들은 행복해 합니다. 그와 같은 원리는 어느 곳에서나, 누구에게나 같습니다. 

그러한 존재감이 서로에게 주어지려면 서로 의사소통이 원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의 가장 기초는 부부에게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도, 자녀에게도, 사회 속에서도 존재감의 영향력은 향기를 풍기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부부가 서로 존재감을 세워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희 교회 모든 부부들이 하나님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차이점들을 인식하고 서로를 세우는 가운데 복된 부부, 가정과 교회를 이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서로 간에 존중함을 가지고 의사소통이 잘 이뤄져 서로에게서 존재감을 느끼게 되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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