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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가정 (벧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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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 (벧전 3:1-7)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운명 이었기에
바랄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말아 후회하지 말아
아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말아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돌아보지 말아 후회하지 말아
아 바보같은 눈물 보이지 말아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우물가에 한 지친 나그네가 앉아 있습니다. 그는 자그마치 한 달 이상의 길을 걸어 이곳까지 왔습니다. 저녁나절 양치는 목자들이 하나 둘 모여 들기 시작합니다. 한 처녀가 양들을 몰고 나타납니다. 청년은 그 처녀를 도와 양들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합니다. 야곱과 라헬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어머니의 고향 땅에서 하나님을 믿는 처자를 아내로 맞으라고 하신 그 말씀을 따라 그 먼 길을 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거짓말처럼 외삼촌의 딸 라헬을 극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 넓고 넓은 땅 많고 많은 우물 가운데 하필이면 라헬이 즐겨 찾는 우물을 찾아왔다는 것이 정말 신비롭습니다. 우리는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심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우리네 결혼은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중매결혼이요 또 하나는 연애결혼입니다. 하지만 중매든 연애든 이제는 옛날과 같지는 않습니다. 옛날처럼 부모가 결정하고 서로는 얼굴도 모른 채 결혼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어찌 됐든 자신의 폭발할 것 같은 감정에 휩쓸려서건 아니면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서건 남녀가 서로 만나 함께 동반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요 또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인생의 한 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노사연씨의 만남이란 노래의 가사처럼이나 부부의 만남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렸건 아니면 냉철한 이성적 판단을 따랐건 간에 부부로 맺어져 또 다른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짝지어주심이라는 틀에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아담과 하와처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하던 고백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라고 변질된 모습을 우리 역시 그려나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혹시 오늘 속으로는 내가 미쳤지 미쳤지 어쩌다가 이런 남자와 이런 여자와 함께 살 생각을 했었나 하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내가 고른 것 같아도 사실은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아야 하고 그렇다면 하필 이런 남자 이런 여자와 만나게 하셨느냐고 할 것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태도로 아내나 남편을 대하며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쉬운 말로 바꾸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하십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라이프라고 하는 잡지가 있습니다. 그 잡지의 사진 기자인 ‘로고스’라는 분이 영국을 가서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지하철 간이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데 나이 많으신 노부부가 서로 부축하면서 종종 걸음으로 식당으로 들어옵니다. 마침 자기 옆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비스켓 한 접시하고 따뜻한 차 한 잔을 주세요.” 

이렇게 주문을 해놓고 노부부는 옆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손을 붙잡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니다. 비스켓이 나왔습니다. 먼저 할아버지께서 비스켓 하나를 먹고 할머니께서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천천히 마시면서 비스켓을 맛있게 먹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으면서 그렇게 행복한 눈빛을 남편에게 보내는 겁니다. 이 남편이 비스켓 하나를 먹고 이에서 틀 이를 꺼내서 물 컵에다 그것을 깨끗이 씻은 다음에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아내가 그 틀 이를 입에 넣어 끼고 나서 그 다음에 비스켓을 먹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남편은 또 아내가 먹다가 남겨둔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역시 동일하게 행복한 모습으로 사랑스런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봅니다. 이것을 유심하게 지켜본 이 기자가 목이 메는 겁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인지 그래서 이 분이 밥을 먹다가 가까이 가서 “제가 사진을 한 장 찍어도 되겠느냐”고 그래서 지하철 간이식당에서 노부부가 앉아서 비스켓과 차 한 잔을 마시는 그 장면을 사진에 담아 가지고 라이프라는 잡지의 표지에 실렸습니다. 제목은 ‘참으로 행복한 참 사랑’이었습니다. 

로고스 기자가 사진을 기재하면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사랑은 어디에서든 피어난다. 사랑은 폭력을 완화해주고 불쾌한 것들을 멀리 함으로서 불행과 고통을 덜어준다. 이런 자세는 참다운 삶을 살게 하고 고통스런 환경을 원활히 극복하게 한다.” 저희들이 결혼을 하고 이런 모습으로 한 평생을 살다가 함께 주님의 나라를 갈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아내들로 하여금 자기 남편에게 순종할 것을 말씀합니다. 

2장 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시고 우리로 하여금 따라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순종에 대한 모범, 그래서 우리들에게 주님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모자라서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열등하기 때문에 순종한 것이 아니지를 않습니까?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지만, 아버지께서 “너 세상에 가서 불쌍한 인생들을 위해서 네가 대신 죽어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말 한마디에 즉시 예수님은 하늘의 모든 보좌를 포기하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의인을 위해서 오시지를 않았습니다. 착한 사람을 위해서 오시지를 않았습니다. 고약하고 못된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이 오셨는데 그것을 감당하기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마지막에 “주여 할 수만 있다면 이 고난의 쓴  잔을 거두어주옵소서 하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남편을 섬기고 가정을 섬기고 자녀들을 섬기는 일이 너무너무 힘드십니까? 마음에 안 들고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때는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하시고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우리를 살게 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권위 앞에는 주를 위하는 마음으로 순종하십시다.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놓고 가정의 권위를 분명히 세우셨습니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은 아담하고 합니다. 가장의 권위를 세운 것입니다. “아담아 네 아내의 이름을 네가 지어라. 너에게 오는 모든 짐승의 이름을 네가 지어라.” 생육하고 번창하고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세도 아담에게 주었지 하와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권위의 질서가 하나님은 분명하십니다. 아담이 똑똑해서가 아니고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온 아내이지만 돕는 배필로 주셨고 해결은 아담이 합니다. 

그런데 사단이 와서 아담을 건드리지를 않고 하와를 건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단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의 권위에 도전한 것입니다. 그 권위를 도전하고 깨뜨리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 아니라 남편의 권위에 도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도 인간이지를 않느냐, 너도 잘 났지 않느냐, 네가 모자란 게 뭐가 있느냐, 비록 네가 남자 여자라는 성의 차별일 뿐이지 네가 모자란 게 뭐가 있느냐, 언제까지나 남편의 지배를 받고 순종해야 되고 살림도 해야 되고 모자라게 살아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너도 얼마든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너는 남자와 똑같아질 수 있지를 않느냐, 충동질을 하는 겁니다. 이게 사단의 역사인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여성들이 이 부분에 넘어집니다. 속없는 사람들의 도전 속에서 너는 그렇게 똑똑한 여자가 집안에 있을 수만 있느냐, 어찌하여 너는 한 남자 밑에서 노예처럼 인생을 마칠 수 있겠느냐 하고 충동질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의 원리를 기억하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난 다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가운데 하와에게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다시 말해서 너는 남편을 다스리기를 원하겠지만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만민은 평등하다, 남녀가 평등하다고 하지만 가정의 절대적 권위는 가장입니다. 집안에서는 평등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할 때는 평등하지만 그러나 가정의 질서를 이야기할 때는 아닙니다. 질서는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우신 질서이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내가 가정에서 남편에게 무엇을 순종할 것입니까? “순종하라”는 말씀은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며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주라고 하면서 순종한 사라는 힘이 없어서 순종한 것이 아니며, 어디가 모자라서 순종하고, 약점이 있기 때문에 순종하고, 겨우 연명하기 위하여 순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나쁜 말을 하고 악한 일에 아내를 끌어들이고 함께 죄를 짓자고 할 때에도 순종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남편이 주일도 빼먹고,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예물도 가로채고 악을 행하자고 할 때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했으니 따라가려고 하면 남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볼 수 있도록 하면서 남편의 위상을 높이고 존경하고 좋은 의견을 제시하며 따르라는 것입니다. 아주 건설적인 어떤 계획을 남편으로 세우게 하고 그의 의견을 인정하면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남편이라는 사람들이 기가 팍 죽어있습니다. 직장에서 밀리지요, 요즈음 젊은이들이 얼마나 똑똑합니까? 거침없이 말하고 밀어붙이는 데 감당할 수 없답니다. 하지만 많은 남성들의 고민을 상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내에게 위신이 서지 않아 고민한다고 합니다. 아이들 보는데서 아내에게 핀잔을 당하고 망신이라도 당하면 죽고 싶다고 호소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남편에게 용기를 줍시다. 아내가 남편에게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자존심을 높여주는 것으로, 전문가들이 하는 말은 그것은 보약을 먹이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편을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고 조금만 더 높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아내는 남편을 구원해보겠다고 시간이 있으면 남편에게 설교하려고 합니다.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들어도 꿈쩍하지 않는 남편이 아내의 설교로 움직일까요? 아닙니다. 아내의 설교는 오히려 역효과입니다. 절대 설교자가 되지 마십시오. 요즘 사람들은 가르치려는 말만 들으면 “또 설교한다”하며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아내는 말이 아니라 순종하는 행동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남편은 그 행동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왜 감동을 받습니까?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애매히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슬픔을 참고 결국 인류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그러므로 여기 “두려워하며”라는 말은 묵묵히 고난을 참는 모습을 말합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면 감격합니다. 속으로 아내를 존경하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감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정결함을 느낍니다. 

결국 아내의 사랑과 교양과 고결함에 압도되어 남편은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옵니다. 그것이 남편을 이끄는 가장 소중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남편이 좋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아름다운 본을 계속해서 보여주며 섬김의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하지 마십시오. 대들지 마십시오. 그런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내가 남편보다 성격이 강하고 말을 잘해서 남편을 항상 이깁니다. 그것도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남편을 물로 만들어서 좋을 것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아내들은 말로 남편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정말 버려야 합니다. 한참 설교해도 듣지 않고 더 완고해지니까 스스로 실망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어떻게 남편이라면서 저렇게 고집을 부려!” 그러니까 더 좋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방법을 잘못 택한 것입니다. 남편이 가깝고 편하기 때문에 더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이가 가까울수록 설교하는 말은 오히려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말이 필요하지 않고 감동이 필요하고, 순종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내의 순종하는 모습은 자녀들에게도 큰 교육이 됩니다. 아들도 그렇지만 딸들도 엄마가 아빠에게 잘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성 어거스틴은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온 후 성 어거스틴은 자기 어머니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를 주님 모시듯 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지성으로 섬기는 어머니의 신앙이 그의 머리에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의 구원을 위해 아내가 해야 할 것은 설교가 아니라 순종하는 정결한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가 남편에게 어떤 설교보다 위대한 설교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외모의 단정함보다 마음의 단정함을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그런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의 단정함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말만 많아졌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믿고 나니 진국이 되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 겸손해졌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 소리를 듣기 위해서 아내는 정말 기도하는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남편에게 하나님에 대한 말을 많이 하려고 하지 말고, 믿지 않는 남편을 위해 하나님께 더욱 기도를 많이 하는 아내가 되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여인들 가운데 베드로 사도는 사라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그들은 비록 자식은 없었지만 그래도 지극히 행복했습니다. 사업도 잘 됩니다.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 대신 조카를 데려다 키우면서 정말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랑도 넘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민을 가자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느냐고 했더니 모른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민 가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데 아브라함 당시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사라는 묵묵히 아브라함의 뜻에 순종하고 따릅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그런데도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며 그대로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도 이처럼 선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순종하는 모습이 곧 선을 행하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뜻이라고 국경을 넘는 이사를 계속 하니 얼마나 짜증이 납니까? 그러나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며 최선을 다해 아브라함의 뜻을 따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만약 이사 갈 때마다 사라가 투덜댔다면 아브라함은 큰 인물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소망을 가질 때 어떤 행동이 나옵니까? 남편을 믿고 격려하며 살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격려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아내는 남편의 자존심을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조금 미흡해도, 조금 마음에 안 들어도 자존심을 지켜주고 내일을 도모해야지, 화가 난다고, 바로 남편에게 자존심을 긁는 소리를 해 대면 행복을 밟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자존심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존심은 있어서” 라고 하지 마시고 남자의 자존심을 꺾어서 좋게 될 일은 하나도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의 명예와 자존심을 짓밟고 사랑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천하의 미인이어도 남자의 자존심을 밟으면 그 아내를 좋아할 사람 없습니다. 남자를 잘 조정하고 진정 성공시키려면 먼저 자존심과 명예를 높여주어야 합니다. 남자의 가장 치명적인 상처는 아내로부터 자존심의 손상을 입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존심 상하는 것은 웬만하면 참을 수 있지만 아내로부터 무시를 당할 때는 남편은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돈도 못 벌면서” 그런 말이 남편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 모릅니다. 그런 분은 돈과 사는 것이 낫습니다.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남편이 세상 어디 가서 살 곳이 있겠습니까? 못난 남편이라도 내 남편이 귀중한 줄 알고 최고로 대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아내의 격려와 사랑을 먹으면서 남편은 진짜 조금씩 최고가 됩니다. 아내는 자신의 소중함과 가치를 남편의 보화가 되는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내는 자기 남편이 맘에 안 들어도 자기 남편이 가장 소중한 줄 알고 격려하고, 남편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어 가정을 가정답게 해야 합니다. 

정말 가정의 행복을 원하시면 남편을 격려하고 남편의 꿈을 후원해주십시오. 남편이 진정 잘되기를 원하고, 가정이 정말 잘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꿈을 꺾고 자존심을 꺾어서 좋은 일이 있기를 어떻게 기대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내에게 믿음을 주실 때 남편에 대한 믿음도 가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말고 이 세상에서 가장 믿어야 할 대상은 무엇보다도 자기 남편입니다. 남편을 믿어주지 못하는 아내에게는 삶은 있어도 행복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목사님도 믿어주어야 합니다. 

다른 성도들도 믿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와 이웃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남편을 더 믿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남편도 아내를 믿어주고 아내의 소중함을 느끼고 아내를 존경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내는 남편도 필요로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필요로 하고, 이 사회도 필요로 하고, 우리 교회도 필요로 하는 참으로 값진 아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아내들은 믿음으로 가정을 세우는 값진 아내가 되시고, 남편들과 자녀들도 사랑과 용서를 통해 훌륭한 가족 구성원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남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7절에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적인 면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남편들은 일반적으로 아내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남편 된 여러분. 아내의 생일을 아십니까? 결혼기념일을 아십니까? 아내의 건강 상태가 지금 어떤지 아십니까? 아내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떻게 하면 아내를 알 수 있겠습니까? 지속적인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했습니다. 동거한다는 말 속에는 시간을 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말 동거하려면 시간을 내야 합니다. 아내를 위해서 시간을 내십니까? 뿐만 아니라 동거한다는 것은 문자 그 대로 삶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거한다는 것은 하룻밤 잠이나 자고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이 하숙집은 아닙니다. 아내와 함께 삶을 얼마나 나누십니까? 남편 되신 여러분. 가정이 무엇입니까? 하룻밤 머물다 가는 곳입니까? 아닙니다. 가정은 정말 삶을 나누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서적인 면으로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라고 했습니다. 연약한 그릇이란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내들은 깨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깨지기 쉬운 그릇을 한번 놓쳐 보세요. 그 깨지는 소리가 얼마나 요란합니까? 그러므로 조심스럽게 잘 다루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내들은 정서적으로 남편들보다 훨씬 민감합니다. 그런데 그런 아내의 마음을 남편으로서 어떻게 다독이고 있습니까? 아내의 행복은 큰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것을 통해서 옵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기 전에 아내가 집안 장식 하나를 바꿔 놓아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멍청한 남편들이 집에 들어서면서 달라진 분위기를 아는 척이나 합니까? “밥 줘. 자자” 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때 아내들이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그러한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면으로는 어떻습니까? 7절 말씀을 계속 보세요.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부 관계가 정상이 되어야 남편의 영적인 생활도 제대로 유지될 수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바탕 싸운 다음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왜 이렇게 남편이 아내에게 성의를 다해야 합니까?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은 자로 알라 했습니다. 생명의 은혜란 영생의 선물, 구원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 최고의 선물은 구원의 선물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영생을 누리는 일에 있어서 아내는 남편과 동등한 권리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상급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가 함께 살아갈 때 이 땅에서만 함께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동반자의 위대한 삶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를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을 끝까지 함께 가야 하는 유일한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동반자란 말은 무슨 말입니까? 서로 존중하고 서로 존경하라는 말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해야 하지만 남편은 자기 맘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남편은 아내와 상의하고 아내와 모든 영역을 같이 나누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나눌 때 그곳에 바로 천국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위해서 기도하며, 아내와 함께 기도하며,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는 생활을 하다가 하늘나라에 가서도 함께 주님을 계속 섬기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창 정치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루스벨트는 39세 때에 갑자기 소아마비에 걸려 보행이 곤란해졌습니다. 그는 다리를 쇠붙이에 고정시킨 채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습니다. 절망에 빠진 그가 방에서만 지내는 것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아내 엘레나 여사는 비가 그치고 맑게 갠 어느 날 남편의 휠체어를 밀며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비가 온 뒤에는 반드시 이렇게 맑은 날이 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뜻하지 않은 병으로 다리는 불편해졌지만 그렇다고 당신 자신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요. 여보,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아내의 말에 루스벨트가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불구자요. 그래도 나를 사랑하겠소?” “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해요? 그럼 내가 지금까지는 당신의 두 다리만을 사랑했나요?”
아내의 이 재치 있는 말에 루즈벨트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장애인의 몸으로 대통령에까지 당선되어 경제공황을 뉴딜정책으로 극복했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아내의 말 한 마디가 남편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울러 아내로 하여금 현숙한 여인이 되도록 기도로 돕고 항상 아내의 마음을 따뜻하고 보듬어주어야 할 책임이 또한 남편에게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가정의 질서를 따라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하늘나라까지 이르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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