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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이 오셨네! (행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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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오셨네! (행 2:1-13)


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순절은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오순절이 바로 교회의 창립일이기 때문입니다. 오순절로부터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교회의 기원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의 공동체로부터 잡을 수도 있습니다. 최대한 늦게 부활절 사건 직후로 들 수도 있습니다. 부활절을 계기로 흩어졌던 제자들이 모였고,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순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교회가 교회다운 사역을 시작한 시점이 언제냐에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인 선교와 예배와 능력과 기적은 오순절 이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오순절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말씀 바로 앞에 요한복음이 있는데 그 마지막 21장에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20장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도마는 그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1장으로 넘어가면 부활을 경험한 공동체라고 믿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앞장서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요21:2)고 하며 갈릴리 바닷가로 나갑니다. 

다른 제자들도 따라나섰고 그들이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묻습니다. 그때까지 빈 손이었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합니다. 이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나중에 세어보니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이때서야 제자들이 예수님임을 알아보았지만 그 앞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당신이 누구냐고 감히 묻는 자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이 만약 부활절 이전에 발생했다면 우리는 충분히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이 부활절 이후에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절을 경험했던 제자들이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목표도 없이 헤매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이것이 제가 오순절이 교회 탄생일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입니다. 부활절이 예수님의 부활을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날이었다면, 오순절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으로 들어온 날입니다. 즉 주체적으로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날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것과 자기 것으로 느끼는 것은 다릅니다. 아는 것과 확신을 갖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지식들과 당위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뼈저린 깨달음의 과정을 통하여 자기 것이 되었을 때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자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과 어느 날 갑자기 정말 주님의 그 사랑이 절절하게 느껴져 하염없는 눈물을 흘릴 때가 다르지 않습니까? 성령이 바로 그런 일을 우리 안에서 일으킵니다. 오순절 이후가 되어서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더 이상 어리석을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9절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사도행전 1장 4절입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떠나지 말라. 기다려라. 주님은 제자들이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성령을 받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단 기다릴 것을 명령하십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로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그 10일 후인 오순절에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던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을 받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부활을 목격하고도 목적의식도 없이 헤매던 베드로가 담대히 그리고 유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하루에 3천 명, 5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들보다 더 큰 능력들을 제자들이 행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도, 우리 교회에도 이런 오순절 사건이 필요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자녀가 되고, 능력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은 또다른 차원입니다. 사람 중에도 그냥 사는 사람이 있고,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성령을 받은 교회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다루고 있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은 어떤 분이고 성령이 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바람 같은 성령

성령은 바람 같습니다. 2절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급하고 강한 바람입니다. 구약에서는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 하였습니다. 그 ‘영’을 헬라어로 ‘프뉴마’라 하고 히브리어로는 ‘루아흐’라 합니다. ‘루아흐’는 숨결 혹은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영’이란 말은 우리가 흔히 말하듯 영혼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호흡이며 태풍입니다. 느낄 수 있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말씀하는데 이 하나님의 영이 바로 루아흐입니다. 루아흐는 그냥 살랑거리거나 선선한 바람이 아닙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거친 바람입니다. 마치 토네이도와 같고 태풍과도 같은 바람입니다. 이번에 미국에 거대한 토네이도, 즉 회오리바람이 불어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영상을 보니 집을 순식간에 삼켜버릴 정도의 강력한 바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바람이 불면 없던 것이 생기고, 있던 것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영은 역사에 변화를 일으키는 바람입니다. 정치인들이 역사를 주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은 단지 풍향계일 뿐입니다. 그들은 바람이 부는 방향을 향하여 몰려들고 손가락을 들고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고 있나 살피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바람을 일으키고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날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바람이 불면 사람들의 관심이 급격히 그 곳으로 쏠리기 시작합니다. 중동 땅에 일고 있는 민주화의 바람이 그것입니다. 촛불 시위나 월드컵 때 수백만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하던 그 바람입니다. 베를린 장벽과 사회주의권을 일거에 무너뜨린 바람이었습니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고 그 위력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의 바람을 일으키시는지 긴장하며 지켜봅니다.

우리는 흔히 ‘바람났다’란 말을 씁니다. 한 번 바람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든 도박이든 바람나면 막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모두 하나님이 일으키신 바람에 바람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바람이 부니 본토 친척 아비 집보다 먼 미래의 약속의 땅만 눈에 아른 합니다. 애굽의 영화보다 저 광야와 시내산과 가나안 땅만 보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물도 집도 가정도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고 땅 끝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현대 무용의 창시자로 마사 그레이엄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그레이엄을 무용의 세계로 뛰어들게 만들었던 결정적 사건이 있습니다. 1911년 4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마사 그레이엄은 공연 포스터 한 장에 시선이 끌렸습니다. 당시 무용가 로스 세인트 데니스가 힌두교의 주신인 크리슈나의 연인 라다로 분장한 포스터였습니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팔찌와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옥좌 모양의 단상에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에 반한 17세의 마사 그레이엄은 아버지를 졸라 공연을 보러 갔습니다. 그레이엄은 로스가 여신의 모습으로 분장하여 보여주는 다양한 춤사위과 무대를 휘어잡는 그 매혹적인 마력에 그만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을 그레이엄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내 운명은 결정되었다. 나는 여신처럼 춤추는 것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미루다가 결국 스물두 살이라는, 무용가로서는 너무 늦은 나이였지만 그레이엄은 춤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춤바람이 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마음에 바람을 일으킵니다. 무언가 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일으킵니다. 우리 안에도 이 바람이 불고 있습니까?

불 같은 성령

성령은 또한 불과 같습니다. 3절입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불꽃은 마치 머리카락처럼 갈라지며 피어오릅니다. 이런 불꽃이 한 사람 한 사람 머리 위에 임했습니다. 구약에서 묘사된 하나님의 모습은 불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8절에서는 시내 산에서 강림하시던 하나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하나님의 불이 임한 곳에서는 견딜 수 없는 열정이 일어나고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불이 임했던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말씀의 불이 임하면 잠잠하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이 불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훈련과 공부는 마치 장작을 쌓아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불이 붙어야 활활 타오릅니다. 그런 점에서 훈련이나 공부는 하지 않고 성령만 받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면 불이 붙더라도 곧 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만 쌓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요한 웨슬리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성령의 불을 받기 이전까지 매우 경건한 생활을 했으며 미국에 선교사로도 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열매는 없었습니다. 능력도 없고 바다의 폭풍에도 두려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올더스게이트란 곳에서 모라비안 교도들과 함께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다가 성령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 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738년 5월 24일자 웨슬리의 일기입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 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 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올더스게이트의 회심’이라 하며 감리교에서 기념주일로 지키는 유명한 웨슬리의 중생 체험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그로부터 6개월 후에 페터레인이란 곳에서 철야기도를 하다가 다시 한 번 성령체험을 합니다. 1739년 1월 1일자 웨슬리의 일기입니다.

“미스터 홀, 킨친, 잉함, 휫필드, 허친스, 그리고 나의 동생 찰스가 우리의 형제(모라비안) 60여 명과 함께 페터레인 애찬회에 참석하였다.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새벽 3시까지 계속하였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강하게 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기쁨으로 소리쳤다. 많은 사람들이 땅에 엎드러졌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현존에 경외와 놀라움으로 사로잡힌 우리는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오 당신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이후 요한 웨슬리의 설교에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웨슬리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몰려들었고 그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했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복음을 전했던 곳에는 술집과 극장이 문을 닫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세계는 내 교구다” 하며 그의 생애 동안 말을 타고 25만 마일을 다녔으며, 하루 평균 4, 5회 꼴로 총 42,000회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이처럼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웨슬리가 성령을 받기 전에도 그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했을 때서야 비로소 그는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경건훈련과 성경의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불이 붙지 않은 마른 장작은 아무 쓸데없습니다. 성령은 불입니다. 베드로가 지식이 부족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석제자로서 예수님 곁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훈련받았습니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불이었습니다. 불이 붙자 그는 달변가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에서 제사장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배우지 못한 범인으로 알았는데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그 얼었던 입술을 녹이고, 흩어졌던 지식들을 하나로 엮었던 것입니다. 몰라서나 배움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같은 말을 해도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는 듣는 사람에게 망치와 같은 충격으로 떨어집니다.
  
성령의 방언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 충만하여 방언으로 말을 합니다. 4절입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 말하는 방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서술하고 있는 영의 언어라는 그 신비적 방언이 아닙니다. 4절부터 12절까지 내용을 읽어보면 그것이 각 민족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라 하여 전세계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러다 유대의 명절이 되거나, 노년이 되면 예루살렘에 거하기 위해 그곳으로 올라갑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가 살았던 각 나라의 언어로 갈릴리에서 올라온 촌뜨기들이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외국에는 한 번도 나가지 않았던 자들의 입에서 외국어가 술술 나왔던 것입니다. 참 부럽습니다. 우리나라 사교육 시장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영어 사교육입니다. 영어 하나 배우고자 그 많은 돈을 들여 해외 연수니 조기유학이니 보내는 것 아닙니까? 거침없이 영어 방언을 하고 있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니 차라리 우리 자녀들을 성경 읽고 기도에만 전념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 받아 영어 방언을 받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방언이 터진 것은 하나의 특수한 사건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지만 유대인들은 이 날을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날로 기념합니다.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이며 이 때가 유대력으로 정월 14일입니다. 이들이 애굽을 나와서 시내 산에 이른 것이 삼월이었습니다(출19:1). 그러니 대충 따지면 오순절 무렵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십계명 율법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 미드라쉬의 해석에 의하면 시내 산에서 율법이 주어질 때 당시 세계의 모든 언어라고 생각했던 70개국의 언어로 선포되었다고 합니다. 율법은 모든 백성들이 들어야 될 생명의 말씀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오순절의 방언은 복음 선포의 의미가 있습니다. 전 세계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되심을 각국 언어로 선포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호흡이 있는 모든 인생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각 나라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방언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우리 입술을 녹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는 또한 민족이나 언어의 경계가 풀렸다는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인간의 언어는 혼잡케 되었습니다. 서로 소통이 되지 않고 민족의 특권을 주장하며 서로 고립되어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은 선민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 안에서는 어떤 특권이나 차별이나 경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모든 경계나 특권이 사라집니다. 성령은 담을 허뭅니다. 민족의 담과 피부색의 담과 계층의 담과 이념의 담을 허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고집쟁이가 되고 더 편협해진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새 술에 취한 사람들

성령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 13절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술 취한 사람은 담대합니다. 제정신이 아닙니다. 즐겁습니다. 모두가 친구가 됩니다. 성령이 취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그의 사명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늘 감사하고 기쁨으로 생활합니다.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을 친구로 사귑니다. 인색하지도 않습니다. 술 취한 사람처럼 한 말 또 하고 반복하는데 그것은 곧 ‘예수 믿으라’는 이 한 마디입니다.

우리 고전 논어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알아 가는 단계입니까? 좋아하는 단계입니까? 아니면 즐기고 있는 단계입니까? 하나님 말씀 따라 사는 것을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즐거워서 하고 있습니까? 참고 인내하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다만 내일의 행복을 꿈꾸며 괴롭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일 그 자체가 즐거워 기쁨과 감사로 하고 있습니까? 

술 취한 사람들은 즐겁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취하게 만듭니다. 이유 없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굴러가는 휴지 하나를 보아도 새롭습니다. 즐거움은 우리 의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가득 부어질 때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의지로 기뻐하라면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부은바 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즐거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술꾼이 술기운으로 살아가듯 우리는 성령 기운으로 살아갑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술 없이는 살 수 없듯이 우리는 성령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 중독자들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위에 성령님이 충만하게 부어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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