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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의 시작 (창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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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시작 (창 3:1-9) 
 
 
오늘 본문은 인간의 역사에서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했습니다(1). “간교”(아룸)는 상황을 분석해서 정확하게 핵심을 파악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최상의 길인지 신중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성경은 긍정적인 문맥에서는 이 단어를 “슬기”(잠 12:16; 22:3)로 부정적인 문맥에서는 “간사”와 “궤휼”(욥 5:12; 15:5)로 번역했습니다. 사단은 뱀의 이 탁월한 능력을 이용해 여자를 유혹합니다. 뱀은 짧게 두 번 말했지만 그 결과로 온 인류는 죄의 구렁텅이에 빠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 뛰어날수록 사단의 도구가 되면 그만큼 더 치명적인 독소가 됨을 봅니다. 능력을 가진 사람은 이점에서 늘 조심할 필요가 있겠지요.

뱀과 여자의 대화 내용은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형태입니다. “너 그거 진짜야! 짱이 아무 것도 먹지 말라고 말했다며? 어머머 세상에 어쩜 그럴 수가 있니!” “아냐. 꼭 그런 건 아니구…. 먹을 수 있기는 한데…. 왜 있잖아,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그 나무 실과는 먹지 말라는 거야. 속상하게 만지지도 말래. 죽을지도 모른대.” “어휴, 맹추야! 순진하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니. 그게 다 혼자 짱 노릇하려는 속셈이야. 먹는 순간엔 너희도 짱이 된단 말이야.” 단순한 ‘이간질’ 같지만, 이 속에는 성도를 유혹하는 유혹의 본질적인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뱀은 꼭꼭 숨겨둔 비밀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처럼 여자에게 다가왔습니다. 첫째로, 유혹은 언제나 친밀한 관계를 통해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문장에서 “참으로”는 당연한 사실조차 의심해보도록 유도하는 묘한 마력이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신가?’, ‘참으로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고 묻기 시작하면 흔들리지요. 둘째로, 유혹의 목적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불신하여 이간질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약 4:7). 유혹의 때는 마귀적 생각을 떨쳐버리고 처음의 믿음과 사랑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대적’하는 대신 ‘대화’를 나눕니다.

원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6)고 하셨습니다. 반면 여자는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2b-3)고 대답합니다.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이 대답에는 평소 마음속에 품고 있던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각종” “임으로 먹되”를 생략했고, “선악과”라는 분명한 명칭을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라는 모호한 명칭으로 바꾸었습니다. 인간의 삶 속에 내제하시며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단지 초월자를 뜻하는 “하나님”으로 바꾸었습니다. “만지지도 말라”라는 말씀을 첨가했고, “정녕 죽으리라”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로 가볍게 취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범할 수 있는 죄 된 양상, 곧 말씀에 대한 생략, 말씀을 대충 들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변조, 말씀의 첨가, 경고의 말씀에 대한 무시가 이 구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라는 말에는 무한히 감사드려야 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자유로운 선택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말씀을 막연하게 알고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인간에게도 최상의 행복이 되도록 언약하셨던 ‘여호와 하나님’ 대신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권능자를 뜻하는 “하나님”(엘로힘)을 사용해서, 자발적인 순종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어서 복종해온 듯한 불평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말에는 작은 금지사항을 과장하여 하나님을 지나치게 엄격하고 가혹한 분처럼 여기는 불만의 느낌이 표현되었습니다. “죽을까 하노라”에는 경외심이 상실되어 있음이 드러납니다.

뱀이 적극적으로 유혹했지만, 이미 여자의 마음속에는 유혹될 수 있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이 들어있었습니다. 간교한 뱀은 드러난 이 모든 약점들을 놓치지 않고 결정적인 일격을 가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4-5). 하나님의 말씀에 정반대되는 거짓말을 강력하게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분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도록, 또 더 이상 그분의 말씀 안에서 소망을 가지지 않도록 공격했지요.

뱀이 거짓 확신을 심자 여자의 눈이 뒤집어졌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6). 매력 없던 선악과가 갑자기 색다르게 보였습니다. 선악과에 담긴 거룩한 의미대신 온갖 욕심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여자의 지성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하나님 자리까지 높아지고자 하는 교만에 점령되었습니다. 그녀의 감성은 선악과를 따먹고 싶은 억제할 수 없는 탐욕으로 채워졌습니다. 그녀의 의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도록 작용했습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했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다른 것을 신뢰하는 형태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소망하기보다 하나님의 뜻 밖에 것을 소망하는 형태로, 하나님 대신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선과 악의 중립지대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순종도 불순종도 하지 않는 중립 상태란 없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 했습니다(약 4:17).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사라졌을 때, 불평과 불만이 마음에 자리 잡을 때,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경외심이 희석되었을 때, 그는 이미 중립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죄는 여자의 인격 중심인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전 인격이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 상태에서 이탈하여 부패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죄는 언제나 공범자를 찾는데, 여자는 남자를 공범자로 만듭니다. 여자와 달리 남자는 복잡한 심리적 과정을 거쳐 유혹되지 않습니다. 그냥 여자가 주니 먹었습니다. 아담에게 이 여자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2:23) 같은 존재여서인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넘어갔습니다. 사단이 뱀을 도구로 사용해서 여자와 남자의 약점을 정확하게 공략했던 것을 봅니다. 원래 창조 순서에 의하면 여자는 남자의 지도를 받고 짐승은 사람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를 지도하고 사람이 짐승을 받드는 전도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선악과를 먹자 어떤 변화가 생겼습니까?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7-8). 뱀의 말처럼 눈이 밝아지긴 했는데, 하나님의 자리까지 높아지기는커녕 식물 밑으로 낮아져야 했습니다. 남녀는 서로 보기에 좋던 상태에서 서로 보기에 민망하고 수치감을 느끼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보시기에 좋던 존재들이 하나님을 부담스러워하고 하나님의 눈을 피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는 죄 자체를 숨길 뿐만 아니라 죄를 지은 자신조차 숨기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드러내기를 수치스러워합니다. 누군가 나의 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것을 두려워하며 어둠 속에 자신을 꼭꼭 감추게 만들지요. 무화과 잎이 크기는 하지만 펼친 손가락처럼 엉성하게 생겨서 가리기에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죄인은 제대로 감출 수 없어도 가리고 또 가리려고 애씁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기쁜 존재였던 인간은 하나님 앞을 피해버리므로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 앞에 다시 서기 전까지는 진정한 존재의미를 발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실존입니다. 당당한 것 같아도 속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본모습이 발각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어둠 속에 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인을 찾아 오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9).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어둠 속에 있는지, 왜 당당한 모습 대신에 불안에 떨고 있는지 깨닫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떳떳하게 나올 수 없는 그를 위하여 집나간 탕자를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잃은 양을 애타게 찾는 마음으로 부르시는 것이지요. 

죄는 아담을 변하게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죄가 시작되던 그날부터 당신님의 백성을 찾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잃어버린 영혼을 다 찾으시기까지 하나님의 음성은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땅 끝으로 가서 숨는다 할지라도 그분께서 예정하신 백성이라면 결코 그 음성을 떨쳐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 139:7-12).

하나님과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아야하겠습니다. 그분의 찾으시는 음성을 듣고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 와 굳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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