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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자와 양 (요 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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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와 양 (요 10:1-10)
  
우리는 이따금씩 여행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여행 중에서 가장 즐거운 여행은 무슨 여행이냐? 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들이 가본 곳 중에서 가장 인상 깊고 좋았던 곳을 이야기하고는 하였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이런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야 좋은 친구와 하는 여행이지요...’ 가는 곳이 어디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여행에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곳을 다닌다고 하여도 함께 하기에 어려운 사람들과 동행하는 여행이라는 것은 그렇게 내키지는 않는 일입니다. 물론 여행을 하는 도중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나기도 하겠지만, 마음이 편하고 좋은 친구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면 그 자체가 좋아서 장소에 그렇게 커다란 영향을 받지는 않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짧지 않은 인생에 여러 가지 예기치 못한 일들이 엄습하는 세상을 살면서 마음이 통하는 친구하나 있다면 우리의 삶은 그래도 살만합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에 간직하고 있으면 좋은 단어 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몇 년 전에 미국에 갔을 때, 짧은 영어실력이지만, 옆에 있는 미국 목사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 두 단어가 제 귀에 남았습니다. 

하나는 share라는 말로 ‘나누다..’ 이렇게 읽을 수가 있는 말인데... 그들은 이 말을 여러 모양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업시간에 서로 토론하는 것도 나눈다고 하고, 음식을 함께 먹을 때에도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의 시설을 놓고 함께 사용할 때에도 그들은 이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왠지 모르게 share라는 말이 들어가면 그 자체만으로도 격이 높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잘 사용하는 말 중에 journey라는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여행 또는 여정이라는 말로 읽을 수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자체를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특별히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의 과정을 표현할 때 journey라는 말이 들어가면 좀 더 생동감이 넘치는 것 같고, 분명한 방향을 향해서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저는 비록 이 두 단어가 듣기에 생소한 남의 나라의 말이기는 하지만,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주 떠올리게 된다면, 그만큼 우리의 신앙생활은 더욱 풍성하게 되고, 기쁘고 즐겁게 믿음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신비는 나눔 가운데서 찾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때 우리들은 나만의 생각이나 주장에 붙잡혀서 주변을 잘 보지 못하는 때가 있는데, 우리가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과 잘 share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말이지요.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든지... 내가 가진 독특한 재능이든지... 생각이라든지... 취미라든지... 그런 것들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그만큼 우리들의 삶은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길고 험한 인생이지만... 즐기면서 생동감이 있게... 삶을 journey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히시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진정한 목자시라고 말씀하셨고, 뒷부분에서는 양들이 드나들면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되는 문이라고도 자신을 표현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나눔과 여정이라는 두 단어가 떠올랐고, 이 두 마디의 말이 예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님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너 나와 좀 더 많은 것을 나누며 살지 않겠니?’ ‘너 앞으로 네가 가야할 길을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니?’ 하는 뜻이 바로 오늘의 말씀 가운데 담겨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오늘의 말씀을 함께 생각해 봅시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을 앞에서는 목자로서 뒤에서는 양들이 드나드는 문으로 소개하셔서 좀 혼돈스럽기는 하지만, 오늘의 말씀 그리고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뒷부분의 말씀까지를 연결 지어서 생각해본다면, 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자신을 목자라고 소개하시는구나...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들은 양이라고 하시는 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오늘의 이야기를 목자와 양이라는 관계 속에서 읽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이 목자와 양의 비유라는 것이 예수님의 시대와는 달리 우리들에게는 무척이나 생소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양들이 살고 있지도 않고, 목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양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그것을 잘 알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과 우리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표현하실 때에... 예수님이 의도하시는 것을 잘 알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목자와 양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말씀이 있고, 아마 예수님도 이런 비유를 사용하실 때에는 그 대목의 성경말씀을 염두에 두고 계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말씀 중의 하나는 에스겔서 34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에스겔서의 배경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커다란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 내리고... 그들은 하루아침에 바벨론가지 사로 잡혀 왔다는 것이지요. 어느 날 갑자기 잡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에스겔서는 이러한 정황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비전과 꿈을 포로생활로 고생하는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말씀인데... 바로 34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내 양떼’라고 표현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대표적인 대목이 에스겔서 34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나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나의 양 떼를 찾아서 돌보아 주겠다.’(에스겔 34:1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나의 양 떼’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깊은 사랑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그 유명한 시편 23장을 통해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양의 관점에서 살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이렇게 시작되는 말씀이지요.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 하신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시23:1-4)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이가 누리는 행복과 만족과 평화를 이토록 잘 표현한 말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비록 거칠고 험한 세상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어느 것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을 그는 확신에 가득한 어조로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비록 목자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양은 또 어떤 동물인지... 그 특징을 잘 알 수 없다고 하여도... 우리는 에스겔서 34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내 양떼’라고 표현하시면서 깊은 애정을 드러내셨고, 다윗은 또한 양의 심정으로 목자이신 하나님을 따르며 사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행복인가를 말하여 주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보통 사이가 아닌 것이지요. 다른 말로서 예수님과 우리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과 우리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에는 오로지 목자와 양을 말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비유인 것이지요. 이 비유 가운데서 우리는 예수와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깊고 깊은 신뢰와 친밀함을 읽을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는 이렇게 그 친밀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v.3) 어쩌면 예수는 우리들에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근거로 자기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서 도둑이고 강도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일까?(v.8a) 왜 이다지도 자신만만한 것일까? 그것은 오로지 예수만이 양들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자신감입니다. 수많은 양들이 있는데... 그리고 우리들이 보기에는 모든 양들이 다 그놈이 그놈 같아서 아무리 구분을 해보려고 해도 구분을 할 수가 없는데... 예수에게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는 모든 양들이 이름을 하나하나 알고 계시고 그 이름을 불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오로지 예수만이 우리들의 목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가 나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그 이름을 불러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신바하고 감동적인 일인지... 우리는 그것을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그 이전가지 삭개오라는 이름은 참 부끄러운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를 지나시는 예수를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갔을 때, 그 부끄러움은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걸음을 멈추시고는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 ‘삭개오야...’ 이 때 삭개오가 가졌던 감동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요? 그는 그 순간 자기를 향하여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삭개오야 내가 너를 잘 알고 있다. 비록 네가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서 비난을 받는 다고 하여도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 나는 결코 너를 향한 신뢰와 기대를 포기한 적이 없다...’ 이렇게 주님은 그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지요. 
   
오늘도 여전히 예수가 우리의 목자이신 것은 오로지 그 만이 나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그 이름을 불러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러한 예수의 사랑을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어도... ‘오직 나 한 사람 밖에는 없는 것처럼 사랑 하시는 사랑’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을 알아주고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설명하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예수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신다는 것... 그것은 예수가 우리를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고... 거기서부터 비로소 예수와 사랑으로 하나 되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신비한 관계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가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며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실 때, 우리들도 예수님에게 특별한 마음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예수만을 나의 목자로 삼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나를 내어 맡기는 일입니다. 그것을 예수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v.4) 양들이 가진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자기를 인도하는 목자를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 능력... 양들은 시력이 아주 나빠서 오늘 예수가 말씀하시는 것처럼 알아듣는다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귀에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들... 그 소리들 중에는 자기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죽음에로 인도하려는 거짓 목자나 강도들의 음성도 있는데... 그들은 어떤 것이 목자의 음성인지 그것을 기가 막히게 분별합니다. 그리고는 거의 맹목적일 정도로 철저하게 목자의 인도하심에 자기를 내어 맡깁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목자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더 좋은 목자는 없을까? 라든지... 더 좋은 다른 길도 있을 텐데... 사실 우리들은 살다보면 내가 가는 길에 대해서... 내가 가진 직업이나 하는 일들... 내가 내리는 결정에 대해서 그렇게 신뢰를 가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예수가 말씀하시는 양들에게는 그런 갈등이나 후회를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목자를 믿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 생각해보면 바로 이 순간에 우리들에게 참된 행복과 평화가 찾아들게 됩니다. 나의 미래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려놓을 때...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며... 내가 하고 있는 일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나의 삶이라는 것을 믿고 받아들일 때... 그 자리가 푸르른 풀밭이며 쉴만한 물가가 됩니다. 설혹 위기가 닥쳐온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굳게 믿고 있기에 조금도 당황하거나 두려움 없이 살아갑니다. 
  
결국 오늘 예수가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려 하는 것은 예수와 나 사이의 깊은 친밀함과 나누는 삶입니다. 예수는 이미 나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그 이름을 부르시며 나에게 다가 오시고... 우리는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점점 더 예수의 음성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나의 귀에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들 중에서 어느 것이 나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의 음성인지를 생각하며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덧 나의 미래를 오로지 목자이신 예수에게 맡기며 하루하루를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는 나의 목자이시고, 나는 오로지 예수님만 바라보고 따라가는 양이라고 할 때, 우리는 여기에서 이미 예수와 나 사이에 형성된 깊은 친밀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친밀함이 우리의 삶이 서게 되는 굳건한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후반부에서 예수는 우리들에게 자신을 양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소개하여 주십니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v.7,9) 이렇게 예수가 자신을 문이라고 규정하실 때... 예수는 무슨 의도로 이런 비유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일까요? 

문이라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을 비추어서 문을 생각해보면 문은 그 자체가 목적지는 아닙니다. 오히려 옛날에 어른들은 어쩌다 문지방을 밟거나 문턱에 주저앉으면 참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재수 없다...’ 이런 꾸지람을 듣곤 하였습니다. 문이라는 것은 어떤 아직 우리가 들어가 보지 못한 세상... 또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향하여 우리를 안내하여 주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예수가 자기를 가리켜서 나는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여기에는 우리들을 그가 지향하는 세상으로 이끄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문이라는 것은 어떤 기대감과 호기심을 가지게 합니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떤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닫혀 있는 문 앞에 서면 우리는 이런 궁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라는 문을 향하여 들어 갈 때... 그곳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다시 말하자면, 예수가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요? 

오늘 말씀 속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v.9) 세상에는 여러 문들이 우리를 향하여 열려 있는데... 우리가 예수라는 문을 열고 들어 갈 때에 거기에서 우리는 구원을 경험하게 되고 드나들 때마다 일상의 삶에 필요한 양식... 꼴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예수를 향하여 들어 갈 때에 구원을 얻게 되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게 된다고 하는... 그 문은 들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드나들기도 하는 문이라는 것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라고 하는 문을 드나들면서 꼴을 얻는다는 것... 이것은 아마도 일상의 삶 속에서 예수를 통해서 누리게 되는 위로나 기쁨처럼 삶에 힘을 주고 용기를 주는 요소들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런 작은 것을 넘어서서 좀 더 근본적이고 심오한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 다’고 말할 때에... 이것은 예수가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궁극적인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구원이라는 것처럼 값진 선물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10절에서는 좀 다른 말로 설명을 하여 줍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여기에서는 구원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아한 생각을 할 수가 있겠지요. ‘아미 나에게는 생명이 있는데... 지금 나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아마 이것이 요한복음의 독특한 부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 이것은 우리뿐 아니라 예수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도 공통적으로 누리고 있는 자연적인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생명이란 단지 숨을 쉬고 몸을 움직이며 살고 있는 그런 것보다는 더 깊고 심오한... 다른 차원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영생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요한17:3) 생각해보면 바로 이런 생명이 진정한 생명인 것입니다. 단순히 육신이 살아 있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의 선한 목자이신 주님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 이것이 예수가 우리를 초대하시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10절의 후반부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예수는 이렇게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선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던 진정한 생명...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오게 하는 그런 세상... 그것은 우리가 점점 더 주님을 따라서 가려고 할 때... 오직 예수라는 문으로만 들어가려고 할 때에 경험하게 되는 참으로 놀라운 세상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으로 충만한... 그래서 오로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대하시는 바로 그런 삶을 살도록 하는 그런 세상이 예수를 통하여서 우리 앞에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인도하시는 세상은 또한 풍성함이 있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이 말씀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잘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예전에 제가 웨슬리 대학에서 한 주간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그 세미나를 지도하였던 교수가 경력이 참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인도 사람으로서 예수를 믿어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는데... 그만큼 다양함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우리 기독교 신앙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권할 때에 가장 중요한 근거는 무엇인가? 그 해답을 바로 이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누리게 되는 진정한 생명! 또 그가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 이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경험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서두에 저는 우리의 인생의 본질을 잘 표현 하는 두 단어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하나는 나눔을 뜻하는 share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걷는 인생의 여정을 뜻하는 journey라는 말입니다. 누군가와 나누면서...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라면 그만큼 삶은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스스로 목자라고 소개하시는 예수야 말로 여기에 꼭 맞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 다정하신 목자이시며, 우리는 오로지 그분에게만 모든 것을 맡기며 따라가는 양들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삶을 예수와 나누며 살아간다면... 그리고 우리가 걸어가는 여정을 진정한 생명과 풍성함으로 이끄시는 그분에게 맡기고 따라간다면... 우리는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어디서나 행복하고 만족하며, 항상 남다른 생명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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