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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을 누리도록 (벧전 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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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누리도록 (벧전 3:8-12)

노아 홍수 이래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두 번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증표로 노아에게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일주일을 하루씩 나눠 볼 때 동양 사상으로는 일(해) 월(달) 화(불) 수(물) 목(나무) 금(쇠) 토(흙)로 규정합니다. 삶의 기본 요소들입니다. 

무지개의 일곱 빛깔이 각각 지닌 의미의 약속도 눈길을 끕니다. 빨강(정열) 주황(인내) 노랑(평화) 초록(휴식) 파랑(희망) 남색(겸허) 보라(사랑) 등입니다. 모두 우리 삶 속에서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일곱 가지 무지개 색깔이 지니는 의미와 뜻은 약속을 받고 지키는 사람의 몫입니다. 약속은 약속한 이와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결단으로 이뤄집니다. 

인간에게 무지개를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십니다. 그분이 신실함으로 주신 약속을 믿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때 그 약속은 축복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네 믿음대로 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우리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를 바탕으로 한 오늘의 모습이 아닌 내일을 준비하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날의 우리들의 모습은 내일을 위한 교훈으로 그쳐야 합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우리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열매를 바라고 씨를 뿌리는 농부처럼 믿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서 자녀를 삼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벧전 1:16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우리 자신을 내세울만한 무엇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어제 저는 수원에서 버스 회사를 운영하는 한 친구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호텔에서 하는 결혼식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본 결혼식은 우리네 흔히 하는 결혼식과는 수준이 달라도 너무도 달랐습니다. 하객들의 차량부터도 최고급 수준의 차량들로 가득합니다. 정말 부자들의 결혼식이 이렇게 다른 거로구나 새삼 실감했습니다. 입구로부터 화환만 해도 수십 개가 늘어서 있는데다 얼마나 하객들이 많으면 일일이 접수할 수가 없어서 접수대 옆에 커다란 축의금 함을 놓아놓고 하객들로 하여금 거기다가 축의금을 넣도록 하는 것을 보고 그만 질리고 말았습니다. 

잠깐 얼굴을 비추고 아는 척하기도 쉽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하긴 두 개 회사에 버스만 해도 최소한 600여 대에 기사만도 1000여명이 되니 오죽하겠습니까? 말로만 듣던 부자들의 세계가 이런 것으로구나 새삼 실감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지금은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 기도제목이기도 합니다. 그 할머니가 종로 교회에서 헌신하던 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더욱 그 친구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러분도 함께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아브라함에게 특별히 부름 받을 만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가 하는 일도 아버지를 도와서 우상을 만들어 팔던 우상장사 아니었습니까? 그런 아브라함을 불러서 하나님의 복의 근원을 삼습니다. 처음에는 아브람이었는데 나중 그의 이름을 열국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죄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심지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불러주셨는가 하면 복을 이어받도록 다시 말해서 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복을 주시려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고자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허락하신 창조 언약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요 교회 생활입니다. 둘째로는 가정입니다. 가정은 행복을 누리도록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돕는 배필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이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았거니와 가족 간에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세워주는 것만큼 귀한 것이 또 어디 있겠으며 이를 통해 누리게 되는 가장 큰 복은 기쁨이 넘치고 서로 화목한 가정, 평안으로 가득한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며 아름다운 하나님의 복된 자로 세워나가는 여기에 참 행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일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큼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힘에 겹도록 지치도록 수고한다고 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렇게까지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감사하고 일 자체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또한 일은 열매를 얻게 만들어줍니다. 

무엇보다도 일을 하게 되면 성취감을 얻을 수가 있고 일을 해나가면서 거기서 보람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일이 몹시 힘들기도 하고 일을 하면서 모욕을 느낄 수도 있고 누군가가 나를 힘들게 괴롭히고 못살게 굴 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주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하라고 하셨고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도 하나님께서 주시도록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편한 것만 좋아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소위 빡세게 일한다고 해서 투덜거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이유는 더욱 복된 인생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고 먼저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즐겨 먹던 번데기는 누에나방이 무화하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처음 누에 애벌레가 뽕잎을 먹으면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0cm정도 자라게 되면 잎에서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고 그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레 모양의 누에가 번데기 모양으로 바뀐 채 일정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난 뒤 때가 되면 고치를 뚫고 누에가 나오게 되는데 그 빠져나온 구멍을 보면 어떻게 요런 구멍으로 그 큰 덩치가 나왔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 짝은 구멍으로 빠져나오느라 온 힘을 다 기울인 까닭에 밖에 나와서도 한참을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날개를 펴고 날기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런 과정이 너무 힘들어 보여 어느 학자가 쉽게 나올 수 있도록 구멍을 크게 뚫어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나방이 날지를 못하더랍니다. 알고 보니 그 좁은 구멍으로 나오기 위해서 용을 쓰는 동안 날개 근육이 발달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힘든 것은 우리를 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으십시오. 다시 말해서 오늘의 힘든 시간과 모든 과정들이 있기에 내일에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러기에 고치에 작은 구멍을 내고 그리고 빠져나오기 위해서 몸부림치듯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여야 합니다. 이게 바로 배려하는 모습입니다. 이게 바로 성도 사이에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는 비결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 스스로에게도 실망할 때가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오죽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말 한 마디 행동하나가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약한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그들을 도울지 몰라 힘들어 할 때도 있고 내가 이런 사람들하고 어울려야 하나 하는 것 때문에 피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복을 누리고 이어받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을 같이 하라고 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기 위해서는 나만 주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 하고픈 것 내 생각에 옳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먼저 생각하며 주님이 옳다고 여기시는 것을 먼저 생각할 때 다시 말해서 나의 생각과 모든 것을 주님에게 맞추어 살고자 할 때 우리는 마음을 같이 할 수 있습니다.

나도 주님처럼 너도 주님처럼 살고자 하니 마음을 같이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곧 섬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나보다 너를 먼저 세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합니다. 이건 단지 불쌍하다 안 됐다고 혀만 끌끌 차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마땅히 위로도 하고 도와도 주라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되 동정하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라고 합니다. 잘 한 사람에게 잘 했다고 칭찬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별로 잘하질 못했어요. 아니 어쩌면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남들 다 올라가는 자리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남들 다 가지는 것조차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떨 때는 오히려 일을 망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럴 때 그런 사람을 동정하고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랑의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남들보다 많이 가지고 있기에 더 슬픈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더 자신 있어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다릅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하셨겠습니까?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도 거지는 하나님 품에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지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강조했던 것이 가난한 자 연약한 자 불쌍한 자들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자기 집 앞의 거지에게 그러한 배려를 하지 못했습니다. 저를 마음을 다해서 돌보며 먹을 것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저 집 앞에서 쫓아내지 않은 것만도 감사한 줄 알아라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불쌍히 여기지 않은 까닭에 저에게도 불쌍히 여김 받지 못하는 심판이 내려지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면 오히려 진짜 불쌍한 사람은 부자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성전 앞에 헌금함에 드렸던 두 렙돈 겨우 팔백 원 알기 쉽게 말해서 천 원의 돈 보잘 것 없습니다. 그 때문에 하루를 굶어야 할망정 그녀에게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가진 것이 없기에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그래서 더 절박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주님께 드리는 그 마음이 더 절박하고 간절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가 드리는 그 많은 헌금은 어떻습니까? 상대적으로 비교하자면 엄청나지만 절대적으로 비교한다면 그는 자기가 가진 것 중의 지극히 작은 부분만 드린 것입니다. 과부는 100%인 반면 부자에게 있어서는 불과 몇 %나 될까요? 세상은 부자가 많이 드렸다고 합니다만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드리는 그 마음도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없는 사람이 100원 중에 10원 드리는 것은 쉬워도 부자가 10억 중에 1억 드리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겉보기에는 부자가 더 쉬울 것 같은데 실제는 아닙니다. 그건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은혜에도 감사하지만 은혜 위에 은혜가 넘쳐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은혜가 적은 자를 업신여길 수도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 자랑에 빠지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래 사실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많이 가진 자요 많이 받은 자입니다. 더군다나 여기 겸손하라고 합니다. 많이 가진 자, 많이 받은 자가 겸손하기는 참으로 힘이 듭니다. 많이 가졌기에 항상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라고 격려가 되라고 한 말도 상대방에게는 오히려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이 될 수도 있고 나의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행동 하나가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겸손하라는 것은 그 도움 받는 사람들이나 함께 협력하는 사람 작은 정성을 모으는 사람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될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 하나를 함께 한다고 할 때도 서로의 자존심이 다치지 않도록 모든 배려를 아까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베풀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 안에 잘 녹아져 있습니다. 그래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로 하여금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기회를 주신 것뿐입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함께 할 수 있어서 더 감사하고 함께 격려하고 배려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섬길 수 있어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내가 해를 당했다고 해서 복수하겠다고 하지 말고 내가 욕을 먹었다고 해서 같이 욕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축복하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복을 누리도록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렇게 배려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요 겸손으로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이요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더욱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을 누리는 비결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가 나와 친밀한 사람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뿐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을 상하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고 더욱 축복하는 축복자로서의 귀한 삶을 살아가심으로 마침내 복을 이어받는 자요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좋은 날 보기를 원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귀한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져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우리들의 언어 즉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신 것이 바로 말입니다. 빛아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이런 귀한 말의 권세가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합니다. 

막 11:26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흔들림이 없는 믿음 안에서 믿음으로 하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역사를 가져오는지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해서 복을 약속하실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복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집에 복을 받기에 합당하면 그 집에 복을 내리되 합당치 않으면 그 빈 복이 네게로 돌아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저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축복하라는 말이 그래서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다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죄 사함을 위해서 대신 제물을 드리는 화해자요 중보자요 동시에 축복자가 아닙니까? 그러니 축복하고 또 축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과거에 어땠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내일의 은혜와 하나님이 주실 모든 복을 생각하며 그렇게 믿음으로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의심치 않으면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도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엇이 악한 말입니까? 믿음이 없이 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네 믿음을 보이라고 하시는데 믿음 없는 말을 한다는 그 자체가 벌써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는 능치 못하실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축복하지 못하고 저주한다고 하는 자체가 바로 믿음이 없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사랑이 있습니까? 믿음은 곧 사랑의 실천인데 일찍이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사랑하신 그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나를 그런 사랑을 보이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되겠습니까? 

지금도 여전히 주님의 은혜로만 내가 살아가고 있다면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각기 제 길로 가는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여 주시고 은혜로 나를 붙잡아 주시는데 그렇다면 나도 주님의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야 하고 저를 세워줄 수 있는 사랑의 말을 할 때 그것이 참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믿음이 없이 하는 말 사랑이 담겨있지 않은 말이 곧 악한 말입니다. 나는 사랑받기 원하고 나는 복을 받기를 원하면서 다른 사람은 그 반대가 되기를 은근히 기대한다면 그것이 바로 악한 말이요 마음으로는 전혀 아니면서 입술만으로 하는 그 말이 바로 거짓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 내가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내가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은혜를 상대방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해를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비쳐주신다고 했습니다. 나 역시 악한 자인데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여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동일한 은혜를 나 역시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악을 떠나 선을 행하라는 것은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며 베풀라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 선이요 순종치 않는 것이 악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품어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의 선함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와 다른 사람의 관심에까지도 관심을 가져주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선하냐 악하냐 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이지 내 판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일은 오직 그에게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격려하고 축복하고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치 못하심이 나를 향하신 것처럼 그에게도 역하하실 때 세상에 변하지 않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신다면 불편한 마음을 다 버리십시오. 오히려 안 좋은 쪽의 생각을 다 내려놓으십시오.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믿음으로 행하십시오. 

그래서 서로 불편해 하는 것이 아닌 화평을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유가 어디 있든 주 안에서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를 방해하며 서로 멀어지게 만드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도 화평이 있습니다. 당연히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서로를 편안하게 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무언가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그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속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로 인해서 한 번도 마음에 불편해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끝까지 나를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내가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을 때에도 그래서 길을 잃어버린 양이 되었을 때에도 목자 되신 주께서 다른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것처럼 그렇게 나를 찾아주시고 나를 안아주셨음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화평을 구하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형제 사랑의 출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모든 환경 모든 관계에서 이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여 온전히 화해자요 중보자로서의 제사장의 역할로 다시 돌아가 먼저 손을 내밀며 축복하고 중보하는 우리 모두가 될 때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화해자요 축복자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시며 항상 그 눈이 우리를 향하게 되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귀한 은혜에서 뒤떨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제사장의 축복에 보면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평강을 주시도록 축복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그와 같이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간절히 저와 여러분을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금도 은혜를 베푸시고 평강을 주시고자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를 누립니까? 믿음대로 되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 믿음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실천하는 자에게 그런 복이 임합니다. 보통은 자기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친구들에 의해서 들려왔던 중풍병자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병자와 그들 모두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는 그 여인의 믿음으로 인해서 그 자녀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하인을 위해서 주님께 구한 백부장의 경우도 백부장의 믿음으로 인해 하인이 나았습니다. 

본인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지 못할 때는 중보자의 믿음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믿을 때 이 귀한 역사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아니 믿으십시오. 그래서 이 믿음 안에서 항상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이 날마다 맺어지는 귀한 은혜 귀한 복을 누리는 성도들 되심으로 날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넘치도록 채워가지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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