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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이 닥쳐 올 때 (벧전 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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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닥쳐 올 때 (벧전 4:12-16)
 
기독교는 수많은 고난의 역사를 거쳐 여기까지 왔습니다

얼마 전 인터넷 기사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지난 4월 중국 베이징 공한당국이 5개 광장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쇼왕교회 신도 15명을 연행했습니다. 경찰서로 연행되는 버스 안에서 성도들은 찬양을 불렀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교회는 베이징대학교와 칭화대학교 등이 자리하고 있는 중관춘이라고 하는 지역의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에는 교수와 엘리트 학자들이 많이 있었고 인원도 1000명 이상이 되는 베이징 시내에서 가장 큰 가정교회 중에 하나였습니다. 

무엇보다 교회 이름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자로 보니까 지킬 수(守), 바랄 망(望)이었습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수망교회입니다. 중국에는 소망이라고 하는 글자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중국식 한자로 소망이라는 말을 써서 ‘수망교회,’ 즉 쇼왕교회라고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최근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제스민혁명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중국 당국은 급성장하고 있는 가정교회가 어쩌면 중국판 혁명운동으로 발전할까봐 미리 차단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쇼왕교회는 중국 당국에 맞서 부활주일을 한 주 앞두고 중관춘 일대에서 5개의 대규모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중국 공안당국은 교회의 목사와 장로 6명을 가택감금을 했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신도 169명을 연행해갔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여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일만 되면 옥외 광장에서 15~3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마다 공안 당국은 이들을 끌고 갔고 2~3일 후에 다시 풀어주는 과정이 반복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이징 가정교회의 지도자들이 우리나라의 국회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상임위원장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줄 것에 대한 입법청원서를 냈습니다. 중국에서 처음 있었던 일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청원서는 지하교회와 가정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라는 내용과 현행 종교관련 조례의 여부를 조사해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국은 아직도 종교의 완전한 자유가 없습니다. 부분적인 자유만 허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이다”라는 말은 굉장히 강력한 말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주인은 예수님 한분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억압의 자리를 탈출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만든 모든 우상화에 대하여 저항한다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정신이기도 합니다. 

진리와 생명을 향하여 있지 않은 모든 세력에 대한 도전이 기독교 정신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을 때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왕이시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시대가 이 땅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의 지난 2,000년의 역사의 과정을 살펴보면 기독교는 거대한 정치 세력과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경제 세력과 종교 세력에 도전하면서 대항해 나갔습니다. 무엇보다 이데올로기적인 많은 사상들과 부딪쳤고 그것을 뛰어 넘으려고 했습니다. 그때마다 기독교는 고통을 당하고 핍박을 당했습니다. 엄청난 고난의 현장에 들어갔습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 속에 빠져 그 골짜기를 지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던 것이 기독교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독교가 새로운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이 모든 고난들을 넘어서는 극복의 과정을 겪었던 것을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중국 땅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 중국 백성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고 교회가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 역사가 중국 땅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 속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중국 땅에 더 많은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지구촌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화를 선포하는 나라로 승화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고난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중국 땅에서 받고 있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고초를 당해야했습니다. 강력한 로마제국의 권력 하에서 기독교가 퍼져나갔습니다. 단순한 연금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고문을 받았습니다.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것도 십자가형이라는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복음을 증거 했던 성도들이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당했던 고난을 “불시험이다”, “불과 같이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베드로전서 4:12) 

감당키 어려운 시험, 그리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 오히려 마음에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너무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난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임을 깨달아야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의 세계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고난은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려하면 이 시대에도 고난의 문제가 있습니다. 양심이 저촉되기 시작합니다. 내 삶에 스스로를 절제하고 제어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증거 할 때 세상의 비난과 조롱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육체적인 고난의 문제는 그쳤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고난, 정신적인 고난의 문제는 더욱 극심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의 용기가 필요한 시기에 살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질문하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을 때 몇 가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행한 죄악 때문에 고난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게으름 때문에 고난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짓과 부주의와 악행 때문에 고난에 들어가는 것은 기독교인의 고난이 아니라고 합니다. 먼저 이런 고난은 가능하면 극소화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베드로전서 4:15)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것이 내가 잘못했건, 남이 잘못한 고난 속에 뛰어 들어 갔든, 사회적 질서 속에 들어가 있는 고난이건 간에 우리는 예외 없이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 왜 내게 고난을 주십니까?”, “고난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부르짖습니다. 누군가에게 하소연 하고 싶고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며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모든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와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다시금 되돌아봐야 합니다. ‘왜 고난이 내게 왔을까? 그리고 이 고난을 내가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을까?’ 

여러분, 고난당할 때 묻지 않고 체념하시면 안 됩니다. 어떤 고난이어도 그렇습니다. 슬프고, 아프고, 상처 나고, 괴로운 것들이 나에게 다가오면 물으셔야 됩니다. ‘왜 내게 이 고난이 있는가?’ 어쩔 수 없이 그냥 체념하면 내속에 상처가 계속 쌓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것이 잘못 터트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을 수 있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야 새로워지고 변화가 시작됩니다. 

독일의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인생의 이유와 의미를 다 깨닫지 못하면서 고통 받고 있는 시인에게 이런 편지를 씁니다.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 인내하라 
아주 낯선 방언으로 씌어져서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을 대하듯 
의문 그 자체를 사랑하려고 애쓰라 
당장 답변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
답변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지금 답변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혹 알려주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의문을 던지며 사는 것이다
지금은 의문과 더불어 살라 
그러면 서서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해답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혜도 여기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질문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답변을 못해도 질문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날 내 속에 깨달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질문하고, 질문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난의 자리를 통과했습니다. 그들도 고난의 자리를 통과할 때 아파했고 탄식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선배인 욥을 잘 압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족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신의 몸까지도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는 친구와 대화하면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그렇습니까? 왜 나를 이렇게 버려둡니까? 하나님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깊은 질문 속에서 대답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여러분, 지금도 고통 속에 계십니까? 그러면 시편을 펴서 읽어보십시오. 시편에는 눈물의 노래들이 있습니다. 고통과 신음 중에 하나님을 향한 질문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말 고난이 다가올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베드로전서 4:16)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당시 멸시의 별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쟁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존경과 사랑의 의미가 담긴 말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을 욕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대교회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정겹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속에 자존감과 자부심이 들어갔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습니까? 자존감이 있습니까? 내가 예수에게 속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까? 아니면 창피합니까? 베드로는 우리에게 부탁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내가 세상에서 조롱받고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부끄럽지 않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세상이 갖고 있는 모든 고난의 사건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면 부끄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일까요? 거기에는 인간이 그동안 만들었던 고난, 내가 만든 고난, 남이 만든 고난, 세상이 만든 모든 고난이 들어가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라고 하는 용광로 속에서 녹아지는 것입니다. 찌꺼기 같은 것은 다 사라지고 고난을 통과하여 정금 같은 사람으로 다시 세움을 받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 분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써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겸손한 지성이 행하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을 깨닫는 지혜자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진리가 있고 길이 있다는 것을 내 가슴으로부터 깨달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어정쩡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이 주신 기쁨, 하나님이 주신 능력, 하나님이 주신 담대한 용기를 모두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고난에 당당하게 들어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를 믿는 정치인들과 국회의원들은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선거철만 되면 내가 교인이라고 이곳저곳을 방문합니다. 국회의원이 되면 정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이 나라를 이끌어가려고 마음먹고 있는지, 때로는 시장 잡부보다도 못한 언어와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당의 이익 때문에 나라의 이익을 외면하지는 않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로 이 나라를 사랑하는 정치인이 필요합니다. 백성을 긍휼이 여기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되지 아니하면 고난의 자리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눈치만 보고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는 철새정치인들만 만들어 갈 뿐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 연예인들, 체육인들이 더 담백하게 자기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상을 하나 타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 백성을 인도해가는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사회의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모두가 지성인들입니다. 지성인들은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용기가 없는 지성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성들을 긍휼이 여길 줄 모르는 정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독재가 생기고 세상에 자기 욕심만 차리는 권력자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4:13)

고난에 당당하게 들어가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영광을 보장해주셨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 속에서 그 영광을 맛보며 당당하게 자기의 길을 가라고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무익한 것은 아닙니다. 

일찍이 고난을 깊이 경험했던 헬렌 켈러 여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품이란 쉽고 편안한 자리에서는 성장할 수가 없다. 오직 시련과 고난의 경험을 통해서만 영혼이 강건해지고, 비전이 분명해지고, 열정에는 불이 붙고, 성공은 이루어질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곧 현충일입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이 있습니다. 이 땅의 애국지사들, 이 나라를 위해 젊음과 삶을 다 바친 국군장병들, 이 나라를 위해 충성스럽게 애쓴 사람들,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순교자의 피로 인해 이 한국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애국자이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지도자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 힘들어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가슴으로 품을 수 있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워주시고 우리가 있는 그 자리로부터 생명의 역사, 치유의 역사, 회복의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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