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강림] 오순절의 이적 (행 2:14-21, 36-39)

첨부 1


행 2:14-21, 36-39 오순절의 이적 

금년 들어 미국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tornado가 여러 차례 중부와 동부 지방을 강타하였습니다. 토네이도가 지나간 자리는 상상한 초월한 파괴가 일어났고 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있었습니다. 토네이도가 어떻게 생깁니까? 중부 초원 지대의 건조한 공기덩어리와 카리브연안의 덥고 습한 공기덩어리가 만났을 때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깁니다. 토네이도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지나가는 곳마다 기존의 건물들을 날려버리고 가축이나 차까지도 날려버립니다. 그러나 토네이도는 정확히 언제, 어디서, 어떤 크기로 나타날지 예측하기 힘들기에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 큰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영적인 tornado가 있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아무도 어떻게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교회 시대를 연 전환기적인 시간입니다. 오순절을 계기로 유대인들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신앙 공동체'인 교회가 탄생됩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은 신약교회의 생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날 이후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반복되어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대망하며 우리를 통하여 크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 능력이 없습니까? 기쁨이 사라집니까? 열심이 식어집니까? 어떻게 하면 능력 있는 신앙생활, 열매 맺는 신앙생활, 은혜가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원계획을 알고 그것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 전에는 성령이 예수님보다 크신 분으로서 예수님의 출생과 삶에 역사합니다. 성령이 예수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사실은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 12:10)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분명해집니다. 이 성령은 창조의 영이며 하나님의 영으로 예수님을 잉태케 합니다. 

이 성령은 세례 시에 예수님에게 임하고 이후의 사역에 참여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무장한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마귀의 시험을 이긴 후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병자들, 장애자들,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십니다. 

그런데 첫 부활절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보다 더 크신 분이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사도들에게 부어주십니다(2:32-33). 그분은 승천하신 후 천상에서 성령을 통하여 지상을 다스리시며 구원의 역사를 계속 진행시켜 가십니다. 이제 성령은 "예수의 영"(행 16:7)이 되어 그분을 증거하며(행 5:32)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그분을 대신하여 지상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해갑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과 이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인격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죄 사함과 회개의 구원을 선포하였다면, 사도행전에서는 천상의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의 지제들과 교제함으로 인해 제자들의 예수님께 향한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증거 행위, 즉 그들의 설교와 이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동일한 구원의 메시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승천하심으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중단되거나 사역의 주도권이 성령으로 넘어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전히 주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든 족속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전에 '위로부터 능력'인 성령을 기다려야 했던 이유가 여기 있으며 이 성령의 능력을 받은 이들이 "예수의 증인"(행 1:8)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 평소에 예수님의 사역을 돕던 여자들,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의 동생들 모두 합쳐 약 120명가량이 다락방에서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다 같이 모이기를 열흘째 되는 날 아침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온 집에 들리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였습니다. 모인 무리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각기 다른 나라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하여 천하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 즉 예수님을 통한 구속역사에 대하여 분명하게 듣게 되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후 사람들이 다시 교만하여져서 바벨탑을 쌓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함께 있던 사람들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바벨탑을 쌓는 일이 중단이 되었는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며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지난 삼년간이나 예수와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도 받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직접 보며 훈련을 받았으나 예수님의 뒤를 이어 효율적인 사역을 하기에는 아직 부족하였기에 성령 충만을 통한 능력을 받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밀을 수확하는 절기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뜻 깊은 절기인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오순절을 맞이하여 유대 땅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각 나라에 흩어져서 살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지중해 주위의 동서남북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사롭지 않은 소리를 듣고 이상히 여겨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이들은 갈릴리 억양을 사용하는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자기들이 태어나서 살고 있는 '각 나라의 언어'로 각각 듣게 되는 놀라운 사건을 목도합니다. 

누가는 그들의 반응을 '소동하여'(6), '다 놀라 기이히 여겨'(7), '다 놀라며 의혹하여'(12), '어찜이뇨'(8) 등으로 표현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 갈릴리 사람들이 술에 취하여 주정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 중심의 설교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예수님의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는 복음서에서 보여준 나약하고 배반하던 모습과 달리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의미를 소리 높여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예수님께 향한 베드로의 증인 사역으로서 그의 첫 설교가 오순절에 행해졌습니다. 

베드로는 구약 성경의 세 부분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첫째로 베드로는 요엘서를 근거로 갈릴리 사람들의 기이한 행동은 술 취함 때문이 아닌,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그들에게 임함으로, 즉 하나님의 약속된 성령의 오심이 성취된 것임을 밝힙니다. 구약시대에 특정한 사람들에게 임했던 것과 달리, 이제 하나님의 성령은 성별이나 연령이나 사회적 계층에 차이가 없이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종말론적 새 시대에 따른 영적 특권들(예언, 환상, 꿈)을 부여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 마지막 날,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에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피하고 구원을 얻는 길이 '주의 이름'을 찾는 모든 자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로 시 16:8-11을 인용함으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그 다윗의 후손이며, 베드로와 사도들이 이 예수 부활 사건의 증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이어 베드로는 시편 110:1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승천을 언급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실제로 다윗의 주가 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또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서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을 보내 주셨다'고 선언합니다. 구약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보내던 것처럼, 이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할 제자들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36절에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표현은 전에는 아니었는데 부활과 승천으로 새로운 신분이 되셨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그분의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라서 베드로의 설교의 초점은 예수님의 사역(22), 죽음(23), 부활(24-32), 승천(33-36)에 기초한 구원의 메시지로 나타납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으로 충만했던 베드로의 첫 메시지는 철저하게 예수님 중심이었습니다. 
  

청중들에게 회개가 일어납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행해진 베드로의 선포는 담대함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듣는 자들로 하여금 감동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심령이 변하기 위해서는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고 또한 그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 속에 들어갈 때, 보이지 않고 볼 수 없었던 자신의 존재와 상태를 직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예수를 향한 자신들의 무지와 죄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찌할꼬"(37).

베드로가 모인 무리들에게 요구한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두 개의 명령형을 사용하여 답변합니다. "회개하라"는 것과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각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헬라어의 과거 명령형은 '지금 당장하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이 말을 듣는 대로 지금 당장 회개하라, 지금 당장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라 하며 결단을 촉구합니다. 회개와 죄 사함의 메시지는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에서 계속되는 구원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마음의 결단이나 돌이킴을 넘어서서 그에 따른 행위를 동반하는 삶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회개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는 행위를 요구함은 이 회개가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로의 헌신과 관계된 돌이킴이요 그에 따른 자기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에게 이 약속이 주어집니까? 너희 -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  너희자녀 - 유대인의 자녀,  모든 먼데 사람 - 디아스포라로 로마제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더 나아가서 모든 이방인들을 포함한다. 더 분명한 단서를 하나 붙이는데 -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종의 구별 없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다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는 약속하십니다.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지금 베드로의 말을 듣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자는 구약에 예언한 남은 자들이 되어 구원에 이르리라는 약속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초점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첫 말씀 선포는 놀라운 결실을 가져왔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고 누가는 증언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선포되는 예수님에 대한 증거였고,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거듭나게 된 예수살렘 초대 유대인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는 사람을 낚는 능력 있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한사람을 통하여 하루 동안에 얻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얻은 사람보다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예수님보다 더 능력이 많았는가? 숫자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3년 동안에 열두제자와 그 외 몇 사람만을 얻었던데 비하여 더 큰 결과를 베드로가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목회는 장차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사역이었기에 열두제자에게만 관심을 두셨습니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오순절이후 제자들의 사역을 통하여 실현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반드시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회개의 역사는 지금도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며 외친 메시지의 주제는 회개였습니다. 회개는 중생을 거쳐 성화에 이르는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회개 없이 중생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하기 어려운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자존심과 수치심입니다. 체면과 명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큰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회개 과정에 성령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는 부흥회의 주제가 회개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1903년 8월 원산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도 그랬습니다. 13년차 고참 하디의 고민은 깊어만 갔습니다. 원산을 거점으로 강원도 북부 선교를 담당한지 3년이 지났지만 눈에 띄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도 김화에 있는 지경터 교회가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1

898년 지경터에 설립된 지경터 교회는 그가 맡은 후로 교인들의 신앙 열기도 떨어지고 교인수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에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수고하였으나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실망이 컸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요인이 지경터 교인들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조선인들은 종교적으로 기독교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903년 8월 24일부터 일주일간 원산에서 여선교사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여선교사들은 연장자인 하디에게 성경공부 인도를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애를 써도 수고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령을 말했으나 성령을 체험한 바 없고, 회개를 말했으나 회개의 체험이 없는 이론적 신앙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이때부터 하디는 기도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마침내 성령의 임재와 함께 회개가 터져 나오는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하디뿐 아니라 기도회에 참석했던 선교사들에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기도회를 마치고 처음 맞이한 원산교회 주일예배 설교 때 하디는 교인들 앞에서 진솔한 자세로 자신의 믿음 없었던 것과 고집불통이었던 것과 교만했음을 자백했습니다. 교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설교하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잘못과 오만을 회개하며 용서를 비는 모습으로. 하디의 눈물 설교가 처음엔 충격이었지만 곧바로 감동으로 바뀌었고, 교인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일 지나 곧바로 원산 지방 남감리회 선교부 사경회가 열렸습니다. 하디가 인도한 사경회는 처음부터 은혜의 바다였습니다. 사경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앞 다투어 회개하였다. 유명한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의 불길은 서울과 개성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원산부흥운동은 하디의 회개에서 출발했습니다. 밖에서만 찾던 목회 실패의 원인을 자기 안에서 발견함으로 시작된 회개의 역사였습니다. 코가 높았던 외국선교사가 자존심을 꺾고 회중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이 회중들의 회개를 이끌어냈습니다. 

신약의 모든 성도와 교회는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인침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재연하고 부흥을 경험하기 위하여 신앙의 자세를 어떻게 회복하여야 합니까? 성령은 교회를 시작하게 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교회 부흥의 열쇠는 성령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과 관련하여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새로운 도전과 희망을 줍니다.  

1. 성령의 임재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과 기대가 언제나 우리가 지녀야할 신앙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기다림의 신앙인들의 모임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행하셔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기다림'은 우리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주실 것을 알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기다리는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귀히 여기는 모습이고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입니다. 반대로 조급함, 성급함은 불신앙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무시하고 그 자리에 자신이 등장하는 무례한 모습입니다. 사울 왕의 타락은 바로 조급함과 성급함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태가 위급해지자 조급한 나머지 제사장이 집례해야 할 번제를 자기가 나서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결국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질책을 받습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이 일로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삼상 13)며 버림을 받습니다. 이 사건의 아이러니는 예배한 것 때문에 버림받는 점입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존중히 여기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것을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과 활동에서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기다림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그가 행하시기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수많은 프로그램과 모임과 조직과 활동이 있는데 성령의 임재를 충분히 기다리고 있는지 항상 물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할 기다림의 모습입니다. 단순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이 되어 기다립니다. 순수함과 신뢰함과 간절함이 녹아있는 믿음의 현장입니다.  


2. 성령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변화와 새 창조는 성령의 감동에 의한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납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모든 사람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행 2:14) "이스라엘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행 2:22)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회개와 구원의 역사, 후에 삼천 명의 결신자의 기적적인 역사는 '들으라'는 이 권고에 순종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대해 거기에 모인 이들이 집중하여 경청했을 때 회중이 감동하고 회개의 마음이 들었고 구원에 대해 갈망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믿고 세례를 받은 자들이 삼천이나 되었습니다. 귀를 기울여 듣는 신앙이 중요한 것은 자아의 재발견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변화와 새 창조를 위해 필요한 힘입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듣는 민감함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 속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음 속에서도 성령의 음성이 들립니다. 역사와 사회적 사건을 통해 들려오는 성령의 세밀한 음성이 있습니다. 이세벨을 인하여 낙심하고 한때 죽기를 구했던 엘리야는 세미한 가운데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사명을 회복하였습니다. 이러한 들음에 헌신할 때 우리 각자의 입에서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오래될수록 이 탄성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어찌할꼬"는 초신자들만이 외치는 음성이 아닙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더욱 진지하게 물아야 하는 질문입니다. 특히 중직을 맡으신 분들은 더욱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주여 제가 어찌하오리이까?"라는 질문을 하는 성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성령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행하는 일꾼이요 종임을 제대로 깨닫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3. 성령의 이끄심에 힘써 따라가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말씀을 듣고 마음에 변화를 받아 구원의 약속을 얻은 이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힘쓰는 자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에 그 은혜에 감격하여 힘쓰는 것입니다. 의무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이 아니라 복음적이고 은혜 중심의 감사의 신앙의 삶입니다. 성령의 이끌림이 없이 혼자 결단하여 행하는 '힘씀'은 하면 할수록 공허하고 힘들고 불평과 서운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각 부서에서 임무를 맡아 활동하여 많은 수고와 헌신을 할 때 살펴야 할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자신이 과연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가와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생길 수 있고 그런 과정에서 오해와 서운함과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성령의 이끄심에 응답하는 헌신의 열매와 힘씀일 때, 생명력이 있고 감사의 열매가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과 감동하심에 대한 기다림과 들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지혜와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도들은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기다렸고 베드로의 설교를 가슴으로 들었습니다. 변화와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구원의 약속이 선포되었습니다. 구름 떼처럼 성도들이 모여듭니다. 이때 감사와 감격의 찬송과 함께 '힘씀'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은혜의 행렬입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성도간의 교제를 즐거워하고 예배에 온전히 힘쓰게 됩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고 귀와 눈이 열립니다. 소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루살렘서 방언의 기적의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도저히 소통할 수 없는 '너와 나'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자원하여 자기가 가진 것으로 공동체와 이웃을 섬기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일할 일꾼이 적거나 봉사자와 헌신자들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고 성령의 인도함에 이끌리기보다 성령의 자리에 다른 것들이 차지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성령의 계시와 비전을 자신의 계획과 야심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우리 교회에서 성령은 어디에 계십니까? 오늘은 세계 교회가 성령강림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다시 한 번 성령께서 나를 주관하시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교회를 시작하시고 지금까지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님을 기다리는 성도가 귀합니다. 성령의 세밀한 소리를 듣고 성령의 앞서 가심에 따라 힘써 따라가는 성도가 될 때 변화와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저희 교회는 성령 중심, 예수 중심, 말씀 중심, 구원 중심의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고 성령의 소리를 듣고 성령의 이끄심에 힘써 따라가기 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 가운데 나타난 성령의 임재요 성령의 능력입니다. 

겔 37:9-14,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가 들어갔을 때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곧 살아나서 하나님의 큰 군대를 이루었듯이 오순절에 하나님의 성령이 모인 무리들에게 권능으로 임하여 초대교회가 부흥될 수 있었던 것 같이  우리들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때 우리의 삶이 변화가 되고 하는 일 가운데 능력이 나타나고 주안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성령 충만 했던 초대 교회교인들이 가졌던 그 생동감을 맛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할 능력을 받으며 은혜가 충만하여 신앙생활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