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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이 무엇이관대 (시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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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엇이관대 (시 8:1-9)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작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크신 하나님이 이 작은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시느냐. 왜 참견하시느냐. 여러분은 그런 질문을 하실 때가 없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아니고 사람에 대한 질문입니다. 오늘 시편 저자의 위대한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누구시길래’라고 묻지 않고 ‘사람이 무엇이관대’라고 물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느냐. 여기에서 해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너무 큽니다. 우주보다도 크신 분이십니다. 주일 학교 때 즐겨 부르던 노래 ‘하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와, 하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와, 하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와, 오! 크신 사랑. 하늘보다 더 크고, 바다보다 더 깊고, 우주보다 더 넓은 오! 크신 사랑’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 현대인은 천문학의 발달로 인해서 우주가 얼마나 큰가를 알고 있습니다. 우주의 거리를 광년으로 표시합니다. 일 광년은 빛이 일 년에 걸쳐서 가는 거리를 말합니다. 빛이 일초에 삼십만 킬로를 가는데 일 년에 걸려서 가는 거리가 일 광년이니까. 

그런데 밤하늘의 북두칠성이 지구로부터 수백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북두칠성은 지금의 북두칠성의 모습이 아니고 이성계 시대의 모습이 이제 빛으로 도달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천문학적이다 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북두칠성은 우주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우주에는 은하계가 한도 끝도 없이 많이 있다고 하니까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광대한 우주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우주보다도 크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에.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시대 사람들이 우주가 얼마나 큰지를 몰랐기 때문에 창조론이라는 신화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식이 부족해서 신화적인 창조 스토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교만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히려 고대인들은 자연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무서운지를 실감하면서 살았습니다. 

현대인들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 보내지만 고대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연 속에서 살았습니다. 만일 고대인들이 우주가 얼마나 큰지를 몰랐다면 성경저자는 오늘 본문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3절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성경 저자에게 이미 우주는 충분히 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궁금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때로는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럴 때가 없으십니까. 소떼를 방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게 소떼가 아니어도 됩니다. 닭을 치는 사람일수도 있고 돼지를 치는 사람일수도 있고 양을 치는 사람일수도 있는데 소들이 건강하고 잘 자라주기만 한다면 그 이상은 주인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소들이 서로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속이는지, 도둑질하는지, 미워하는지 여기에 대해서 소주인은 알 수도 없지만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동들을 지켜보는 유치원 선생님은 아이들이 놀다가 다치는지 아이들이 사이좋게 노는지 여기에는 관심을 갖지만 그 아동들의 마음이 착한지 안 착한지, 서로 미워하는지, 시기하는지 여기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크신 하나님이 이 작은 사람들 마음속의 시시콜콜한 생각까지도 꿰뚫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판단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하는지, 거짓을 행하는지, 시기하는지, 다투는지, 우리 속의 시시콜콜한 생각까지도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시고 또 그것을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 말씀에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하는 것, 탐내는 것은 행위에 아직 이르지 않은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인간의 마음의 상태까지도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개입하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관심하셨으면 낫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가 심판받을 일도 없을 것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일도 없을 텐데 왜 하나님은 간섭을 하실까.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father-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bother-귀찮게 하는 분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불편한 것입니다. 

실제로 지성인들 중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까지는 인정하고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만드셨다는 것까지는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역할이 거기에서 끝났고 더 이상은 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신론이라는 것입니다. 

Deism이라고 하는데 미국 건국의 아버지 토마스 제퍼슨이라든가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사람들이 이신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시계 제조자와 같았어요. 시계 제조자가 시계를 만들어서 태엽을 감고 그리고 내버려두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주만물과 인간을 지으시고 그리고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 이신론의 지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의 삶에 관여하지 않고 사람도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 없고 예배할 필요 없다, 그것이 이신론이 믿는 것입니다. 

우주가 얼마나 광대하다는 것을 생각하노라면 이신론이 우리에게 어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크시고 바쁘신 하나님이 이렇게 작은 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개입을 하실까? 그건 신화일거야. 그건 사람의 소원에서 비롯된 걸 거야. 이런 식으로. 하지만 이신론자들의 질문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 저자는 수천 년 전에 이미 그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저자는 아마 다윗이 쓴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시편 저자는 이미 그 질문을 했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그것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러러 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 저자는 반대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내버려 둔 게 아니고 인간을 어떻게 하신다고요? 생각하고 권고하신다. 

그래서 시편 저자가 묻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권고하시나이까'' 여기서 권고한다는 말은 care한다 보살핀다, 관심을 가지고 아낀다는 뜻입니다. 이신론자들이 생각한 하나님은 차가운 하나님이에요. 그들의 세상은 차가운 세상이에요. 하나님은 냉정한 분이에요. 하지만 다윗이 생각하고 경험한 하나님은 친절한 분이요 선하신 분이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생각하시고 권고하십니다. 

제가 설교 초반부에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간섭하시는 것이 불편하다 두렵다고 해석했지만 시편 저자는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의 미움이라든가 정죄라든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좀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수영장에서 구조요원이 없었으면 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수영을 하다가 쥐가 났을 때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냥 내가 물에 빠져 죽었으면 좋겠습니까. 내가 수영을 잘하든 못하든,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간에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내가 수영하는 동안 누군가가 거기 앉아 있다는 사실은 좋은 것입니다. 그걸 불편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은 왜 하나님의 개입을 참견 불편한 것으로만 보고 왜 거기에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보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면서, 좋으신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사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을 왜 불편하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고백하지 않습니까.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God is so good''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고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왜 하나님이 나도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 것뿐만이 아니고 그것을 통하여 자녀가 반듯한 사람이 되고 의로운 사람이 되고 세상에 축복이 되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면서 그것이 자녀들을 타락시킨다든가 자녀들을 게으르게 만든다든가 무책임하게 만드는 것을 원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는 것 뿐만이 아니고 부모보다도 더 바르고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에요. 사람이 악할지라도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거룩한 하나님은 당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하기를 바라시고 선하기를 바라시는 것이고 만일 하나님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데에 해답이 있습니다. 신앙의 성장은 하나님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을 아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의외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어요. 사람은 더 축소되고 하나님을 확대해야 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자라는 과정에서는 하나님을 알수록 사람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이 이웃이든 원수이든 나에게 빚진 사람이든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어른이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이 그들도 사랑하시고 악한 자에게도 비를 내려주시고 악한 자에게도 햇빛을 비춰주신다는 사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면 상급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성장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을 알수록 사람을 알고 귀하게 여기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에요.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여성을 천대한다든가 죄인을 정죄한다든가 또 가난한 사람을 천대한다든가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는 것이고 사람에 대한 지식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초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도 귀중하고 여자도 귀중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천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살 필요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인자가 온 것은 너희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 반대로 ‘도적이 오는 온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인간을 미워합니다. 인간의 인간됨을 추하게 여기려고 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하여 수치심을 갖게 만듭니다. 자기 자신을 숨기려고 하게 만듭니다. 자기 자신을 멸시하게 만들게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우리의 귀에 너는 형편없는 존재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실패자다, 이제 끝났다, 포기하라고 끊임없이 우리의 귀에 속삭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뿐만이 아니고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교만해져는 안 되지만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한 말이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여기에 대한 해답이 그 다음 절에 나옵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성경 아래쪽을 보면 난하주에 하나님이라고 쓰여 있지요, 그 말은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는 구절을 ‘저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번역자들도 설마~ 설마~ 하고 천사라고 번역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여기에 난하주를 넣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기한 것입니다. 

이건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동의 안하셔도 됩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우주에 인간과 같은 존재는 지구에 유일하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우주는 생명에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우주에 생명이 더 많지 않다는 사실이 놀라운 게 아니고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게 실감이 안 나시면 비행기를 타고 가실 때 창문에 구멍을 내보세요. 창문에 구멍을 내면 모든 것이 빨려 나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높은 고도에서 살 수 있는 이유는 비행기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혹시 잠수함을 타시면 벽에 구멍을 내 보세요, 어떻게 되나. 오징어가 됩니다. 그 말은 깊은 바다 속에서 사람이 생존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우주뿐만이 아니고 지구에도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그렇게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이 더 많지 않다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생명이 이만큼이라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봐야 되고 서로를 어떻게 보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서로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느냐. 남에게 상처를 주고 남을 이용하고 또 남을 무시하는 것이 왜 나쁘냐? 그건 하나님이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 사람도 귀중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니고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나 스스로를 멸시하면 안 됩니다. 나 스스로를 업신여기고 내 생명은 헛된 것이라고 함부로 산다든가 함부로 자기의 삶을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나를 생각하시느냐. 그렇다고 교만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평소에 생각하는 것처럼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할렐루야.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만큼 귀중하다는 사실이에요. 그 사실을 알면 우리 삶의 작은 시련과 아픔을 우리는 넉넉히 감당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실 크고 위대한 일들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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