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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성령님은 이와 같습니다 (행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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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은 이와 같습니다 (행 2:1-4)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믿는 자 속에 오셔서 믿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은 보혜사이십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곁에서 돕는 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8:28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신 성령의 도움을 받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인생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중에 한 사업가를 삼성그룹을 이끄는 이건희 씨가 힘껏 돕는다면 그 사람의 사업은 어떻게 될까요? 날개를 달고 크게 성장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이건희 씨의 능력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성령님의 능력이 더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성령님의 능력이 더 큽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천지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피부적으로는 이건희 씨의 능력이 더 확실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설교를 들으시고 여러분에게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는 간절한 마음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을 붙잡고 10일 동안 전심으로 기도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받은 기록입니다.
   
성령님은 그들 가운데 강력하게 역사하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또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바람의 역사, 불의 역사 그리고 언어가 변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언어가 변했다는 말은 그들 인생이 변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입술의 열매를 먹고 살아갑니다. 성령께서 120문도의 입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성령께서 그들의 인생을 이끌어가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성령의 이끄심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오순절, 성령강림절입니다. 오늘 설교는 성령님에 관한 설교입니다. 본문에 보니 성령님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람 같은 성령, 불같은 성령이십니다. 저는 오늘 여기에 두 가지를 덧붙여서 성경에서 성령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들 중에 대표적인 것 4가지를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그 상징이 주는 의미를 한 가지씩 생각도록 하겠습니다. 
 
1. 성령은 바람 같습니다. 
   
2절에 보면 성령께서 임하실 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께서 바람처럼 역사하신 것입니다.
   
바람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니다만 그 중에 능력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람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기적이 일어날 때 바람으로 인하여 일어난 기적들이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질 때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바람의 능력으로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넜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고 바람이 불게 하셨습니다. 그 바름은 동풍이었습니다. 광야에 동풍이 부니 그 바람을 타고 메추라기 떼가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메추라기가 사방 하룻길에 2규빗이나 쌓였습니다. 계 7장에 보면 네 천사가 사방의 바람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 바람은 온 세상을 해롭게 할 권세입니다. 계 7장은 바람은 부정적인 면이지만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람은 능력을 보여줍니다.
   
요즘은 신재생에너지 사업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신재생에너지 사업 중에 뺄 수 없는 것이 풍력발전입니다. 풍력발전은 바람의 능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전 세계의 풍력발전에 대한 자료는 못 구했지만 풍력발전을 통해서 바람의 능력을 잠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교회에 출석하는 김광명 성도는 대부도에 삽니다. 저는 늘 멀리서 교회에 오시는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대부도에 가면 누에섬이라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중보기도팀원들과 몇 차례 대부도에 가서 회를 먹은 식당이 있는 곳입니다. 그 식당 안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풍력발전기 3대가 보입니다. 그 3대의 풍력발전기에 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봤습니다. 높이가 100m인 3대의 풍력발전기에서 만들어내는 전기량이 연간 3,969mw입니다. 그것을 현금으로 계산하면 연간 4억6000만 원입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설명하면 3대의 풍력발전기가 한 달에 만들어내는 전기의 양은 전기를 10만원어치 사용하는 가구 383세대가 사용할 수 있는 양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게 바람의 능력입니다.
   
우리나라는 바람이 별로 강하게 불지 않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는 강력한 바람인 토네이도가 자주 일어납니다. 토네이도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웬만한 자동차는 물론이고 집도 통째로 날려버립니다. 바람의 능력이 파괴적으로 나타나서 그렇지 그 능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은 토네이도처럼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능력이 아닙니다. 풍력발전기로는 비교할 수 없지만 풍력발전기를 돌리는 바람처럼 긍정적이고 사람에게 큰 유익이 되는 능력입니다.
   
성령님이 삼손에게 역사하실 때는 힘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다윗에게 역사하실 때는 수금을 잘 타는 능력을 주시기도 했고, 물맷돌을 잘 던지는 능력을 주시기도 했고, 시를 잘 쓰는 능력, 정치를 잘하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솔로몬에게 역사하시니 지혜를 주셨고, 선지자들에게 역사하실 때는 예언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행 3장에서 베드로에게 역사하시니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바울에게 역사하시니 세계 선교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역사하실 때는 손재주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어린 시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으로 살았고, 기도로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를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그에게 학문을 주셨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며 모든 환상과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왕이 다니엘을 테스트 해보니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10배나 나았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다니엘에게는 지혜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고 축복 속에 살려면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려면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으려면 먼저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데 두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역사하시며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행 1:8에서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을 주십니다. 다이나마이트가 폭발할 때 나타나는 능력처럼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을 통해서 폭발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에게 바람 같은 성령, 능력의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령은 불 같습니다. 
   
3절에 보면 성령께서 임하실 때 마치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였고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불처럼 역사하신 것입니다.
   
불의 특징 중에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뜨거움입니다. 냄비에 물을 붓고 밑에서 불을 지르면 물이 뜨거워집니다. 계속 불을 가하면 물이 끓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성령께서 불 같이 역사하시면 우리의 신앙은 뜨거워집니다. 열정이 생깁니다. 적극적이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열심을 내기를 원하십니다. 롬 12:11에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또 계 3:15,16에 보면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을 책망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종말 시대를 사는 교인들의 특징이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미지근함입니다. 주님은 이런 신앙을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주님은 그런 신앙인을 주님의 입에서 토하여 내치시겠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이 뜨거워지려면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합니다.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면 불같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냄비에 있는 물이 스스로 뜨거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열을 받아야 합니다. 불을 받아야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열을 받아야 합니다. 불같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신앙의 열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영적인 에너지가 충만하려면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합니다. 불이 식어지면 영적인 에너지가 사라지기 때문에 영적으로 무기력해지는 것입니다.
   
증기기관차는 불이 있어야 움직입니다. 증기를 만들려면 물을 끓게 할 수 있는 불이 있어야 합니다. 불을 공급해주면 물이 끓고, 그 끓는 수증기로 인하여 기차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같은 성령으로 충만하면 불같은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신앙의 엔진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엔진이 움직이면 기차가 달리는 것처럼 불같은 성령의 역사로 영적인 엔진이 움직이면 우리의 신앙도 파워 있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살펴보면 세 종류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먼저 에너지가 넘치는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에 에너지가 넘칩니다. 교회에 오는 것이 신납니다. 말씀 듣는 것이 좋습니다. 예배에 은혜가 넙칩니다. 사역을 행복하게 하며 적극적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 속에 불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종류는 영적 에너지가 없습니다. 교회에 오기도 힘들고, 말씀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믿음도 없고 감동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할 생각도 없고 하려고도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신앙생활의 의미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성령의 불이 꺼져서 그렇습니다. 불이 꺼졌으니 에너지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한 종류는 에너지가 부족한 신앙생활입니다. 교회에 오기는 오지만 그냥 그렇습니다. 말씀 듣는 것도 그냥 그렇습니다. 예배는 늘 드리지만 은혜가 없습니다. 사역도 하기는 하지만 별로 기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의미는 알지만 몸이 적극적으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뭔가 영적인 활동은 하는 것 같은데 감동은 없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불이 꺼져가기 때문입니다. 아주 꺼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활활 타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앞의 세 종류 중에 어디에 속하십니까? 성령의 불을 받으십시오. 열정이 회복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의미가 있어질 것입니다. 교회에 오는 것이 기뻐질 것입니다. 예배가 감격스러워질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받으십시오. 
 

3. 성령은 기름 같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름부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눅 4:18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시대에 직분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었습니다. 왕을 세울 때 기름을 부었고, 제사장을 세울 때도, 선지자를 세울 때도 기름을 부었습니다. 구약시대의 기름부음은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임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기름으로 표현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등잔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기름이 필요한 것처럼 믿는 자들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살려면 착한 행실이 필요합니다. 마 5:16에 보면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착한 행실을 보이는 것이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럼 착한 행실을 보일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행 10:38에서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선한 일이 바로 착한 일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가 전에 사용하던 개역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님은 착한 일을 하시기 전에 먼저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받으셨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 것 즉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증거는 착한 일과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는 일 즉 전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 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무리가 없는 인생,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성도로서 인생을 부드럽게 살아가고 무리 없이 살아가려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작년에 목양실 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열쇠를 넣고 돌려도 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키~익 소리도 나고 문도 잘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 주방에 가서 제 열쇠에 식용유를 한 방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식용유가 묻은 열쇠를 손잡이에 넣고 돌리니 방금 전 까지만 나던 끼~익 하는 소리도 사라졌고, 문도 아주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열렸습니다.
   
성도들이 성령을 소멸하면 고장 난 자물쇠와 같습니다. 하는 일들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매끄럽지 못합니다. 그리고 시끄러운 소음도 많아집니다. 불신자는 상관이 없겠지만 믿는 우리들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일들이 자연스럽습니다. 매끄럽습니다. 시끄럽지 않고 조용합니다.
   
지난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저녁으로 오순절 성령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집회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 집회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자동차에 휘발유를 넣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도 기름 떨어지면 무용지물입니다. 달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인생에 성령의 기름이 떨어지면 자동차가 멈추는 것처럼 신앙생활이 멈추는 것입니다.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 없는 자동차처럼 영적으로 멈추게 됩니다.
   
오늘이 성령집회 마지막 날입니다. 오셔서 은혜 받으십시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다시 한 번 자동차가 힘차게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영적인 하이웨이를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4. 성령은 생수 같습니다. 
   
호주에 가면 세계에서 가장 큰 바위가 있습니다. ‘울루루’라는 바위인데 높이가 348m이고 둘레가 9.4km입니다. 그나마 2/3는 땅속에 묻혀 있고, 걸어서 둘러보려면 몇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너무 커서 그런지 ‘지구의 배꼽’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울루루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얼굴을 바꾼다고 합니다. 시간에 따라, 하늘과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색이 달라집니다. 새벽녘부터 여행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해 질 녘이면 울루루 주변에 도열해서 대자연이 연출하는 ‘홍조’를 감상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말도, 어떤 미동도 없다고 합니다. 감동 그 자체입니다.
   
저는 그 바위 위에 꼭 한번 올라가보고 싶습니다. 제가 갈 때 여러분도 함께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바위에 올라갈 때는 반드시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생수병입니다. 보통 1.5l짜리 생수병을 가지고 올라간다고 합니다. 너무 건조하기 때문에 금방 갈증을 느끼게 되고 평상시처럼 물을 마시지 않으면 탈수증상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제가 울룰루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어서입니다. 울룰루 여행에만 물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심지어 ‘물은 곧 생명’이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생수처럼 역사하신다는 말은 성령은 우리의 영적생명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존재하셔야 할 분입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물없이 육적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성령님 없이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령을 받으셔야 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요 7:37-39에 보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지만 늘 갈급한 분들이 있습니다. 내적인 만족이 없습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늘 답답합니다. 때로는 자기도 모르는 분노가 내면에서 올라옵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은혜를 받은 것 같은데 예배를 마치고 나면 만족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면에 생수가 터져야 합니다. 내면에 생수의 강이 흘러야 합니다. 이 말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면에 생수가 터지지 않으면 언제나 외부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외부로부터 공급을 받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물을 뿌려놓으면 말라버리는 것처럼 외부적인 공급은 일시적 만족만 줍니다. 외부적인 공급은 지속적이질 못합니다. 우리가 늘 예배를 드리고, 늘 안수를 받고, 늘 상담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수색에서 잠시 살았습니다. 그 동네는 수도 시설이 되어있지 않아서 공동수도를 이용했습니다. 아침이면 사람들은 공동수도에 가서 물동이를 들고 줄을 서서 물을 받았습니다. 저도 줄을 서있던 생각이 납니다. 얼마 후 우리 가족은 효창동에 집을 사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효창동은 집마다 수도 시설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이사한 집에도 수도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효창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물동이를 들고 공동수도에 가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물을 받아서 힘들게 집으로 들고 오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집 안에 수도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영적으로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집안에 수도가 없어서 공동수도를 이용해야 하는 불편한 곳에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집안에 수도 시설이 설치되어서 언제든지 필요하면 물을 공급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있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기 때문에 생수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이제 인생에 만족함이 있습니다. 언제나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는 갈급함이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신앙생활을 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은 바람처럼 역사하시며 우리에게 하늘의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불처럼 역사하셔서 우리의 신앙에 열정과 영적 에너지를 공급해주십니다. 성령님은 기름처럼 역사하셔서 우리의 인생을 무리 없는 인생, 자연스러운 인생으로 만들어주십니다. 성령님은 생수처럼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주시고 갈급함이 없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이 시간은 낮예배 시간이지만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시고 간절하게 주님을 부르며 통성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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