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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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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26-31)


사회 저명 인사들의 자살에 대한 세간의 반응이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급히 편성된 한 라디오 프로그램은 순천대 임 총장의 자살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자살 신드롬을 다시 진단했습니다. 출연자는 전직 대통령에서부터 재벌 회장들, 전직 장관들, 대기업 사장들, 명문대 학생들,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을 되짚으며 병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자살의 사회적 치유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수치심을 못 이겨 자살을 선택한 사례는 의외로 많습니다. 최근 모 아나운서가 운동 선수와의 열애 사실 여부가 논란이 되면서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사회 저명 인사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등 부지기수입니다. 대부분 감당할 수 없는 명예의 훼손으로 수치심을 느껴서 극단적 선택을 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인데 남을 살리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죽이는 사람들이 최근에 왜 이다지도 많은 것입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습니까? 우리 주님도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그렇습니다! 사람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검찰 수사를 받다가 자살한 사람들은 대체로 억울하고 분해서 차라리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또 인터넷 홈페이지 같은 곳에서 악성 댓글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해서 자살한다고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죽음을 선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의 존재 가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도 물론 아니 되지만 자기 자신의 목숨도 또한 함부로 빼앗아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특히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 바로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 또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상반절) 우리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창조 세계, 즉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창조 세계의 중심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우리 인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가장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도 심하게 절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유대인이라고 하면 선민의식이 지나치게 강해서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오만하기 짝이 없는 민족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런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역사는 그들로 하여금 다른 민족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역사의 반복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사백 년 이상 애굽의 바로의 노예로 지냈습니다. 노예가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노예입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되는 비참한 존재가 바로 노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 히브리 노예들이 어렵게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하여 노예 상태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주변 강대국의 공격에 계속 시달림을 받다가 결국 망했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습니까?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이라는 것도 잠시 반짝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낙심했습니다. 그들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 43:18~20)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새 일을 행하시겠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서 새 일을 행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까? 내 백성, 내가 택한 자를 위해서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이국 땅에 포로로 잡혀갔다고 해서 낙심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3:3~4) 비록 뿔뿔이 흩어졌지만 아주 망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모아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위에 목자들을 세우실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그들이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흩어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이스라엘은 아주 망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 것 같으면 전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새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까? 그 까닭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귀하게 지으심을 받은 존재가 아닙니까? 또 그렇게 지으신 목적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 2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니 인간의 존재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재앙이 아니라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잘 관리하도록 선한 청지기로 세우셨습니다.

그 어떤 사명보다 귀중한 생명에 관한 사명을 맡은 존재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노예 생활을 한 것이나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것도 바로 그 사명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을 언제 어디서나 생육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어떤 악조건 하에서도 땅에 충만해야 하고 땅을 정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 옛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 말씀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깨닫고 비로소 고백했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루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절망적이어서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아니 새 일을 행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바랍니다. 일찍이 주님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요한복음 16장 33절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을 이겼다고 선포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새 창조의 역사에 동참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으로 복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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