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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흔들리며 피어나는 인생 (고후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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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어나는 인생 (고후 1:8-11) 


“인생에 있어서 확실한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세금이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 중 하나인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말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만큼 불확실성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불확실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불안입니다.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불안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정을 추구합니다. 변화를 싫어하고 현실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하고, 담대하게 무언가를 추구하지 못합니다. 그건 비단 현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이고 인생은 불확실성과 불안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요즘 길거리에 쏟아져 나와 절규하는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저들의 손에 들려진 핏켓엔 등록금 반값을 외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미래를 이끌어 갈 청년들에게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절규를 하고 있습니다. 점점 무한 경쟁 시대 속에서 어렵게 들어간 대학 생활에서부터 엄청난 등록금이 저들의 허리를 휘청하게 만듭니다.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4년 동안 학자금 융자를 받아서 공부하며 수천만 원의 빚을 끌어안고 졸업을 합니다. 그러나 졸업하면 직장이 있을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거리엔 젊은 실업자가 쏟아져 나오고 그들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신용 불량자라는 불명예를 달고 버겁게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를 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양파 껍질을 벗기듯 한번만 벗기고 들어가 보면 남모를 아픔과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자녀의 일로, 직장의 일로, 사업의 일로, 인간관계의 일 등 크레파스처럼 다양한 색깔의 역경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이 없는 평안한 삶을 하나님께 구하지만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고통과 역경의 쓰나미가 밀려옵니다. 누구도 그것을 거부할 수도,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삶을 포기하고픈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본문입니다. 바울도 그런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본문 8절은 그런 바울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여기 바울은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후11:23-27에서만도 우리는 그가 얼마나 크고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를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 환난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그 환난이 그 때까지 사도 바울이 당한 것 가운데 가장 극심한 환난이었던 것으로 짐작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8절 하반절과 9절 상반절에 보면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으며, 10절에 보면 그 때의 그 상황을 "큰 사망"이라고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살 소망이 없는 절망 중에서도 바울은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3절을 보세요.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위로의 아버지를 찬송합시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바울의 전도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서민계층 민초들이었습니다. 도시의 부요 앞에 상대적인 좌절감을 안고 살아가던 서민들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새로이 선택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조롱과 핍박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당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부딪힌 핍박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들이 평생 모았던 재산을 몰수당합니다. 가정으로부터 쫓겨나야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직장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회에서 당하는 불이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부딪힌 핍박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들이 평생 모았던 재산을 몰수당합니다. 심지어는 감옥에 갇혀 엄청난 고문을 당합니다. 
  
오직,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라는 그 한 가지의 이유 때문에 그들은 핍박을 당하며 죽어야 했고, 옮겨 다니는 도망자로 방랑의 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를 믿으면 잘 살 줄 알았고, 복 받을 줄 알았지, 예수 믿어서 이렇게 된다면야 그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당시의 교인들은 복 받는 것은 두고라도 예수를 믿자마자 이렇게 엄청난 핍박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좌절하지 말고 살 소망이 끊어진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야 될 이유가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환란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바울이 절망 속에서 선택한 희망-그 희망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절망을 만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해 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이신가를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묵상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 여기 <하나님만>이라는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과거에 바울이 하나님만을 의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자기도 상당히 믿고 하나님도 믿고, 자기 인생에서 자기 자신과 하나님이 거의 동등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바울은 비로소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도’의 신앙이 ‘하나님만’의 신앙으로 성숙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 사형선고 같은 인생의 고통을 허락하셨을까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바울은 세상의 모든 성공 조건을 갖추고 살던 자입니다. 최고의 혈통에, 학벌에, 로마의 시민권까지 갖춘 성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도 얼마나 말을 잘했던지 하늘에서 내려온 신으로 떠받들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쯤 되면 그가 얼마나 교만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더 혹독한 인생의 흔들림의 가시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도 몹시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바울이 자신의 몸에 있는 육체의 가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12:10)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들은 바울은 크게 기뻐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왕이면 안 아프고 건강하게 복음전하는 것이 좋지 불편한 가운데 사역하는 것이 무엇이 좋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깨닫습니다. 자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힘이 나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연약할수록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내가 약할 그 때가 강함이라”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흔들림의 순간은 바로 나의 교만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훈련의 시간입니다. 그 흔들림을 통하여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위한 특별한 시간입니다. 바로 그 흔들림의 시간은 저주나 심판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채워 가시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의 변장된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2. 하나님 체험입니다. 

바울 사도를 절망에서 일으킨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하나님 체험이었습니다. 그는 오늘이라는 캄캄한 어둠속에서 지나간 과거에 하나님이 그를 도우셨던 일을 기억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지나간 날 나를 도우셨다면 그는 오늘 이 순간도 나를 도우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10절의 고백입니다. “그가 이 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이러한 사도 바울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우리에게 위로가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그리고 그의 이 모든 경험과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그 위로의 하나님을 찬미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3-4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 찬송은 보통 찬송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극심한 고난을 겪고 나서 드린 찬송입니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능히 부를 수 있게 된 찬송입니다. 그리고 그가 항상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는 찬송입니다. 
  
17세기, 30년 동안 유럽대륙을 초토화시켰던 "30년 전쟁"이라고 하는 무서운 전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절망하며 낙심에 빠져 살았을 것 같은데 놀라운 사실은 그와 같이 무서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사상 가장 아름다웠던 가장 은혜스러웠던 찬송을 불렀다고 하는 것입니다. 환켄 나우어라고 하는 음악가가 이 당시에 불려졌던 노래들을 수집해 보았더니 32,000곡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후에 웨첼이라고 하는 음악가가 다시 수집을 했더니 55,000곡이나 되었습니다. 
  
30년간의 전쟁을 통하여 평화스러울 때 부르지 못하던 찬송이 성도들의 입을 통하여 샘솟듯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가운데 노래할 수 있다. 환란 가운데 찬송하며 살아간다. 또 그렇게 살 수 있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향한 한 별명이 있다고 하면 환란 중에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참 그리스도인 됨은 실패와 역경과 환난을 당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 없이 보이다가도 고난의 때에 그들과의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가 언제 드러납니까? 도끼에 찍히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향나무는 찍힐수록 향기를 더욱 진동하지만, 가짜는 찍을수록 도끼의 날만 상하게 할 뿐입니다. 
  
겉모습은 똑같아 보일 수 있지만 찍히우므로 비로소 진위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생화와 조화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진짜 꽃의 잎은 떨어지지만 인조 꽃잎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진짜 꽃은 벌이나 나비에게 기꺼이 자신의 꿀을 빼앗겨 주고 나누어주지만, 모조 꽃은 떨어지거나 빼앗길 것을 아예 소유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요즈음 조화를 얼마나 잘 만듭니까? 구별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떨어짐과 빼앗김의 유무에 따라 생화와 조화 여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인가 아닌가는 평소에는 판가름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적인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내 건강이, 내 재물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바로 그 순간마저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결정적일 때를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일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믿음이 필요할 때에 비신앙적인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참된 신앙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환란을 통해 고난 받는 이웃들의 위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로 받았다는 것, 그 사실은 여러분이 이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네가 노래함으로 말미암아 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너와 함께 노래하고 찬송하게 만드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삶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환란, 고난이라는 단어보다 위로라는 말이 더 많이 나온다고 했지요. 그런데 본문을 잘 관찰해 보면 위로라는 단어 10번보다 더 많이 나오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라는 말입니다. "우리"라는 단어가 자그만치 16번이상 등장하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 곁에 환란 당하는 자가 있으면 우리가 그 곁에 가서 함께 있어 주라는 겁니다. 우리 중에 고난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가 달려가 그를 위로해 주라는 겁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고난 받는 자와 함께 하는 마음, 그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한번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격려의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넘어져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넘어진 자였습니다. 모세도 쓰임 받기 전에 넘어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넘어진 경험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다 허물이 많았던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격려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별명은 '보혜사'였습니다. 파라클레토스! 직역하면 '옆에 서서 돕는 자'입니다. 오늘 말로 번역하면 '우리를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왜 보내셨는가? 우리는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고 우리가 낙심하는 것을 방지하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시간, 도종환 시인의 글을 읽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시가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모진 비바람을 이겨낸 결과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의 인생길 어찌 흔들리지 않고 갈 수 있겠습니까?그러나 흔들리는 순간마다 죽을 힘을 다해 다시 일어서십시오. 그 흔들림 속에서 인생의 꽃은 더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요즈음 우리는 힘든 때를 살고 있습니다. 경제침체로 사업이 잘 안되며 살림이 어렵습니다. 직장을 잃고 새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각 이익집단들 사이의 분쟁으로 희생이 된 사람들도 있고 생존의 대책이 막막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정치는 얼어붙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고난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며 위로하시고 견디게 하시며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는 그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 고난을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승리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을 뭇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한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찬송의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께 드린 그 찬송이 오늘 우리의 찬송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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