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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축제]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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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26-34)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1. 한국의 무디라고 일컬어지는 이성봉 목사는(성결교단) 지금부터 약 100년 전 어린 시절 40리길을 걸어 매주일 평양 선교리 감리교회 주일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는 일제시대부터 해방 이후까지 전국 팔도를 돌며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만주, 일본, 미국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세계적인 부흥사였습니다. 이성봉 목사는 설교 중에 찬송을 곧잘 불렀는데, 그의 뛰어난 음성에 신앙적인 가사가 더하여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성봉 목사는 찬송을 만드는데 당시의 대중음악이나 민요 가락을 사용하기도 하고, 기존 찬송가의 곡조에 새로운 가사를 창작하여 부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의 대표적 찬송 중에는 ‘허사가’(虛事歌)가 있는데, 이성봉 목사님이 애창해서 더욱 유명해진 복음성가로 당시 성도들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누구나 일생 중 한 번쯤은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되는 법입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때일수록 잠시 잠깐 후면 가야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지혜인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잠간 감상해보시겠습니다.

‘허사가’(虛事歌)<다같이 불러 보시겠습니다.>

1,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2.인생백년 산대도 슬픈 탄식뿐. 우리생명 무옌가 운무로구나.
그 헛됨은 그림자 지냄 같으니. 부생낭자 헛되고 또 헛되구나.

3. 홍안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마라.
유수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저적막한 공동묘지 널 기다린다.

4. 한강수는 흘러서 쉬지않건만. 무정하다 이 인생 가면 못오네.
토지많아 무엇해 나 죽은 후에. 수의 한 벌 관 한 개 족치않으랴.

5. 땀흘리고 애를 써 모아 논 재물. 안고가나 지고가나 헛수고로다.
빈손들고 왔으니 또한 그같이. 빈손들고 갈것이 명백치않나.

6. 모든 육체 풀같이 썩어버리고. 그의 영광 꽃같이 쇠잔하리라.
모든 학문 지식도 그러하리니. 인간일생 경영이 바람잡이뿐.

7. 우리 희망 무엔가 뜬 세상 영화. 분토같이 버리고 주님 따라가.
천국낙원 영광중 평화의 세계. 영원무궁 하도록 누리리로다.

8. ‘평강’교회 교인들아 예수 잘 믿세. 눈이오나 비오나 교회 나오세
기도하고 찬송해 말씀 행하여. 천국 가서 우리다 다시 만나세 

오늘 본문 29절에,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조차도 이 꽃(들의 백합화)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당시에 누린 부귀영화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케 하는 성구를 보겠습니다. 열왕기 상4:20-23입니다. 

(왕상4:20-23)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 솔로몬이 하수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이르기까지와 애굽지경에 미치기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그 나라들이 공을 바쳐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섬겼더라. 솔로몬의 일일분 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석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석이요. 살진 소가 열이요. 초장의 소가 스물이요. 양이 일백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었더라.

하루 왕궁에서 고위층 인사들이 소비되는 밀가루 90석은 14,000명분의 식량입니다. 그리고 살찐 소 10마리, 초장의 소 20마리, 양 100마리, 수사슴, 노루, 암사슴, 살찐 새들 등등의 고기양은 14,000명이 각각 한 근씩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습니다. 가히 솔로몬 왕국의 경제적 풍요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무후무한 지혜에다 영광의 극치를 누렸던 솔로몬조차도 ‘들의 핀 백합화 하나만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백합화의 그 자연스럽고 찬란한 모습은 그 어떤 예술가도 창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며, 그 어떤 디자이너도 그와 같이 꾸밀 수 없는 조화롭고도 완벽한 치장입니다. 왜냐하면 꽃 하나 하나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숨쉬고,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고 있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솜씨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진, 선, 미의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솔로몬도 이와 같이 아름다운 것으로 자신을 장식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비교하면 ‘들판에 핀 한 송이 백합화의 영광’이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의 ‘궁궐의 영광’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한 평생을 살면서 눈이 원하는 것은 물론 마음이 원하는 것을 남김없이 누려본 후 그가 내린 결론입니다. 

“(전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인생사 모든 것이 ‘허사’(虛事)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죽음으로 끝나는 세상에서의 삶은 어떠한 삶을 살았든 허사입니다. 오래 살았든 짧게 살았든, 잘 살았든 못 살았든, 행복하게 살았든 불행하게 살았든, 쉽게 살았든 힘들게 살았든 모든 인생에는 아쉬움과 한, 미련과 원통함, 억울함과 서운함, 허무함과 공허감 등으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 죽음으로 끝나는 세상에서의 인생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변화될 때, 만사(萬事)가 영원히 행복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합니다. 이것은 전에 있던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계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 즉 ‘믿음이 적은 자들’은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인양 착각해서 그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원한 내일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진정한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고 ‘재물’에 집중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어디에다 보물을 쌓아야 할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 인생들에게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고 묻습니다. 

새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미래의 자기 생존에 관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사실 새들도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다 먹이를 떨어뜨려 주시도록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본능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따라서 ‘거두지도 않고’란 말은 먹을 것에 대한 지나친 고민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 인생들이 바로 이 새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물으십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의 아버지가 되셔서 만물을 이처럼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그 어떤 만물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귀중한 존재인 인간에 대해서 어떠하시겠냐는 것입니다. 새들보다 ‘귀하다’란 말의 원뜻은 ‘다르다’, ‘구분된다.’로서 새와 인간과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공중의 새보다 훨씬 더 귀중한 존재로 하나님께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일에 지나치게 욕심과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생명’, 영적인 생명에 대해 먼저 관심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음식은 생명을 위해 있는 것이지 생명이 음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생명 그 자체보다도 목숨에 소용되는 음식물에 집착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경제적으로 잘 살면 잘 살수록 더욱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고 묻습니다. 

여기 ‘키’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첫째는 염려한다고 해서 ‘키’를 한 자(약20cm)나 늘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이고, 둘째는 생명의 길이를 뜻하는 것으로 염려한다 해서 나이를 더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다시 말해 염려함으로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이는 염려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마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은 자연 발생적으로 자라난 쓸모없이 보이는 풀 한 포기 조차도 하나님이 입히심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성장을 면밀히 관찰해 보라는 뜻입니다. 새들과는 달리 식물은 전혀 이동하지 아니하고 노력하지 아니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심이 곧 없어질 풀에게까지 꽃으로 입히실 만큼 풍부하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인간은 자신의 치장을 위해 ‘옷감을 짜지만’ 그 들풀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마6:30-31)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다른 말로 하면 염려해보았자 ‘허사’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이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한다면 이방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방인들’이란 하나님 나라의 의(義)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면서 오직 먹고 마실 것만 추구하는 자들을 통칭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또한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세상적 염려와 근심에 쫓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방인처럼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2. 믿음의 선진들은 이방인들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1)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가나안 땅에 갔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땅에 이르고 보니 기근이 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근 때문에 애굽에 이주(移住)했습니다. 애굽으로 간 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혀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어여쁜 자기 아내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판단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행세했습니다. 거짓말로 자신의 생명은 보존할 수 있었을런지 몰라도 아내 사라의 순결은 팽개친 꼴이었습니다. 이때 사라의 나이 65세를 웃돈 때이긴 하나(4절 ;17:17) 127세란 그녀의 수한에 비추어 볼 때(23:1) 원숙미를 자랑할 중년기였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아직 아이를 낳은 적이 없으니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으며 혈색 또한 좋았을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애굽 여인네들의 피부색이 거무스름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사과 빛 피부색을 지닌 사라의 용모는 더욱 돋 보였을 것입니다. 결국 바로 왕의 눈에 띄어 그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브라함은 후한 사례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사라는 장차 약속의 자녀를 낳은 열국의 어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바로의 첩으로 전락되는 것을 결코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저지른 실수였지만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게 재앙을 내려 사라에게 손 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하여 다시 아브라함에게 돌아오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에게 애굽에서 나올 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12:20-13:2)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아브라함 자신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여 애쓰고 힘쓴 결과 얻어진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주신 축복이었습니다. 이후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동거했는데 함께 머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소유가 많아졌습니다. 결국 좁은 땅에 많은 가축들을 거느린 두 사람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조카 롯에게 양보하기로 하고 서로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창13:8-9)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롯은 물이 풍부하고 토양이 기름진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습니다. 롯의 눈에 소돔과 고모라는 에덴 동산과 같았고 애굽의 비옥한 땅으로 보였습니다. 너무나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창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 친족이 서로 다투기 보다는 화평을 선택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축복합니다.

(창13:14-17)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에덴동산같고 애굽의 비옥한 땅으로 보인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롯은 결국 소돔 고모라가 유황불 심판을 받아 모든 삶의 터전을 잃고 아내마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아브라함을 떠난 롯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구하지도 아니한 축복을 더할 나위없이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믿음의 자손, 하나님의 약속된 자녀로 살아 모든 것에 더하여 주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2)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 역시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그랄 땅에 거주할 때 아내 리브가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잃을까 해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축복하셨습니다. 

(창26:12-13)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이유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자손, 믿음(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축떼를 키우는 목축업자가 전혀 생소한 농사를 지어 첫해에 백배나 수확하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삭이 그렇게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된 것이 자신의 재능이나 능력으로, 첨단 농법으로 농사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므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목축에 가장 중요한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길 때 이삭은 다투지 아니하고 그곳을 ‘쿨’ 하게 떠나 그랄 골짜기에 우물을 팠습니다. 물길을 전혀 모른 채 우물을 팠음에도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랄 사람들이 와서 빼앗아갔습니다. 이번에도 이삭은 ‘쿨’ 하게 그곳을 떠나 다른 곳에 우물을 팠습니다. 역시 물이 샘솟듯 흘러나왔습니다. 계속해서 다른 곳에 우물을 파는 족족 물이 터져 나와 날로 가축떼들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삭 역시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으로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길만이 믿음의 자손이 되어 인간이 영원히 사는 축복된 길입니다. 

홍수가 나서 온통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집 지붕 위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어느새 물은 자기 발목까지 차올랐습니다. 얼마 있으니까 보트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 보트에 타시오. 고 지대로 옮겨 드리겠소.” “고맙지만 거절하겠소. 난 그리스도인이오.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믿소”라고  대꾸했습니다. 잠시 후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습니다. 이때 자그마한 통통배가 지나가다 구명 튜브를 던져 주었습니다. “이보시오. 그 튜브를 타고 이 배로 오시오. 지금 구출 작전을 펴고 있소”라고 외쳤습니다. “고맙긴 하지만 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소.” 이 사람은 또 구조를 거부했습니다. 이젠 물이 목까지 차 올랐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헬리콥터 한 대가 그 위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밧줄을 잡으세요. 저희가 끌어올리겠습니다.”라고  조종사가 외쳤습니다. “고맙소. 하지만 난 하나님을 믿으니 그분이 날 구해주실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몇 시간 더 버티다가 마침내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하나님 앞에 선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된 점에 대해 불평을 했습니다. “하나님, 전 하나님을 그렇게 고대했건만 끝내 절 구해주시지 않고 죽게 내버려 두셨지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그 말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대체 무엇을 기다렸다는 거냐. 난 너에게 두 대의 배와 한 대의 헬리콥터를 보냈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랑으로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끊임없이 구원의 손길을 베풀고 계십니다. 다만 인생이 어리석어 생활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는 그 사랑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구원의 손길, 사랑의 손길로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마음의 문을 여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아브라함의 자손, 믿음의 자손이 되어 금세와 내세의 영원한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의 문이 열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랑의 예수를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과 사랑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는 어부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몰려온 무리들에게 하나님 말씀 가르치시기를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눅5:4-6)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물을 내리자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경험이나 지혜, 능력으로 축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방법으로 부귀영화를 쟁취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것들이라면 진정한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 말씀에 따른 축복이 영원하고 진정한 축복이 됩니다. 예수 믿고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자녀로 약속에 따라 주어지는 축복을 받으시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신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인가를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예수 믿음으로 솔로몬이 누린 영광보다 더 크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근심 걱정 모두 하나님께 맡기시고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구하시고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에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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