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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의 유익 (벧전 3: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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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유익 (벧전 3:13-22)


결혼한 지 8년째, 여인의 얼굴은 어두움이 가득했습니다. 남편은 회사를 부도내고 도망중이라 연락이 되질 않는데 법원집달관은 매일같이 남편이 어디에 있느냐고 닦달하고, 아이들은 창피해서 학교를 못 다니겠다며 방안에서만 있었습니다. 여자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상황에서 친정어머니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어느 날 무작정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엄마, 너무 힘들어요.”
그러자 그녀의 어머니는 갑자기 부엌으로 가서 냄비 세 개에 물을 채웠습니다.
그리고는 첫 번째 냄비에는 당근을 넣고, 두 번째 냄비에는 달걀을 넣고, 세 번째 냄비에는 커피를 넣고는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불을 끄고 어머니는 딸에게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 사물이 다 역경에 처하게 되었단다. 끓는 물이 바로 그 역경이지. 그렇지만 세 물질은 전부 다 다르게 반응했단다. 당근은 단단하고 강하고 단호했지. 그런데 끓는 물과 만난 다음에 부드러워지고 약해졌어. 달걀은 연약했단다. 껍데기는 너무 얇아서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보호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끓는 물을 견디어내면서 그 안이 단단해졌지. 그런데 커피는 독특했어. 커피는 끓는 물에 들어간 다음에 물을 변화시켜 버린 거야.” 딸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으며 물었습니다.
“힘드니? 힘든 상황에서 너는 당근이니, 달걀이니, 커피니?”

누구나 좋은 사람과는 함께 있고 싶어 하고 성격이 사나운 사람과는 함께 지내기를 한사코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사람 곁에서보다도 성격이 사나운 사람 곁에서 겸손의 덕을 닦기가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까다로운 사람 없이 우리가 어떻게 참아야 할 일이 있고. 남에게 시달리는 일없이 우리가 어떻게 인내의 덕을 닦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나의 일을 가로막는 사람 없이 어떻게 용서하는 사랑을 배울 수 있고, 나의 뜻을 반대하는 사람 없이 어떻게 인종의 아름다운 덕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부당한 명령을 하는 사람 없이 어떻게 자기 부정의 연단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고, 나에게 빈번히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 없이 어떻게 남에게 자비를 베풀 기회가 주어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서보다도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서 더 훌륭한 덕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일을 절대로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은 여러 사람들 속에서 수많은 괴로움과 시달림을 받으면서 다듬어져 나오는 보석 같은 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 27:17은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은 가인이고 둘째 아들은 아벨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쳤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립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왜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 단순히 그 제물을 받으시고 안 받으셨다고 하지 않고 가인과 그 제물, 아벨과 그 제물이라고 하신 대목을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물 자체가 문제가 아닌 제물을 드리는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의 상태를 우리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주셨던 말씀에서도 보거니와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가인을 받지 않으셨다는 뜻이요 그 이유는 저가 선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신 분은 하나님이지 아벨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하나님이 자기와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 씩씩거리고 있는 자신을 하나님이 책망하시자 그 분풀이를 대뜸 아벨에게 해댑니다. 그래서 아벨을 죽여 버리고 맙니다. 아니 아벨이 무슨 죽을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그는 단지 마음으로부터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고 그런 아벨과 그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신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그러니까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내가 너와 네 제물을 받지 아니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처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땅에서 나는 식물들만 먹을거리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농사를 지은 것은 이해가 되는데 아벨은 어찌해서 양을 쳤을까요? 양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먹을거리로 쓰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가 양을 쳤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가죽옷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면 양털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가죽옷이나 양털이 무엇 그리 많이 필요했겠습니까? 어차피 그것을 쓸 사람도 몇 안 될 때가 아닙니까? 

결국은 이건 형제간의 갈등이 있었다는 뜻밖에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장남으로서 알게 모르게 가인은 둘째인 아벨을 괴롭히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오죽하면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삼아 드렸을까요? 그때는 율법이 생기기도 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물로 양을 드리라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양을 드렸다는 것은 그가 가진 것이 그것밖에는 없었다는 뜻도 됩니다. 어쨌든 아벨은 양의 첫 새끼 즉 처음 열매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립니다. 하지만 가인은 단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첫 열매가 아닙니다. 그 마음의 자세를 하나님이 보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선을 행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이제부터라도 선을 행함으로 죄에 발목 잡히지 않도록 하여야 하는데 가인은 오히려 아벨을 쳐 죽임으로 최초의 살인자요 그 땅에서 쫓겨나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하는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맙니다. 

다시 오늘 말씀으로 돌아옵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랬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게 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다시 말해서 열심히 선을 행하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할 수 있다 해를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고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합니다. 오히려 그런 우리를 보고 아니 어찌해서 그렇게 애매하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근심도 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거든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살아가되 책잡힐 만한 일이 없도록 살아가게 될 때 결국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상급이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창 15:1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약속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우리들에게도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심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선을 베풂에도 불구하고 해를 당할 때도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속상해하거나 억울해 할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원수도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자들은 결국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녀된 우리들에게는 지극히 큰 상급으로 갚으실 것입니다. 보통 상급도 아닙니다. 지극히 큰 상급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염려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다고 하면 그건 내가 지은 죄로 인한 마땅한 벌을 받는 것이 되겠지만 나는 고난을 받을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뿐이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바 선을 행한 것뿐입니다. 뻔히 욕을 먹습니다. 그래도 욕을 먹는 줄 알면서도 주고 또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의 소망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결국은 하나님 나라인 것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지극히 큰 상급이 아니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끊임없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한데 그 선을 행할 수 있는 힘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나는 선을 베풂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내 참 제자인 줄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랑 안 하려야 안 할 재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얼굴을 안 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가만 두지를 않습니다. 내 마음이 불편해서 더 못 견디잖아요. 결국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선을 베풀고 그를 위해 축복하며 이윽고는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랑은 어떤 조건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을 긍휼히 여기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심장으로 그 사람을 대하면 그 사람이 너무도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주님을 모르고 죽어갈 그 사람이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를 그냥 보고 지날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선중의 선은 그에게 그리스도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이 한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물에 빠진 사람 건져놨더니 보따리 달라고 한다고 오히려 좋은 일 하고서도 욕을 먹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난의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요 그 예수를 억척같이 전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잘못하고서 비난받고 욕먹고 고난당하는 것보다는 좋은 일하고 비난당하고 욕먹고 고난당하는 것이 더 낫고 주님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럴 때 주께서 갚으시리라 즉 주께서 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 되도록 그의 심령 속에서 강권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때가 상당히 늦어질 때도 있다는 것이요 끝끝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가 예수를 믿기를 거부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실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가서 주님의 말씀을 복음을 전해주는 것은 반복해서 해야 될 일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의 소관이 아닌 주님의 소관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모든 선한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거두시고 아울러서 지극히 큰 상급으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예수께서 의인으로서 죄인을 대신했다는 사실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가지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땅 수로보니게로 가셨다가 그곳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십니다. 그것도 그 딸을 만나서가 아닌 주님을 찾아온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 딸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벳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제자들을 그날 먼저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신 후 산에 올라 기도하시던 중 밤새 풍랑으로 인해 바다 한 가운데서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을 위해 물 위로 걸어오셔서 배에 오르시니 풍랑이 잔잔해집니다. 그리고 난 다음 이제 제자들과 함께 다시금 헬몬 산 자락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에까지 오셔서 제자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대답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실 때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난 다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십니다. 물론 그때 깜짝 놀라서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다고 예수님께 된통 혼이 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자신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우리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 제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구약 시대는 제사장이 제물을 잡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고 그 피를 가져 속죄소에 뿌림으로 생명으로 생명을 대신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중보자요 동시에 축복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의 사명 그러니까 기름부음 받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시는데 특별한 제물을 사용하십니다. 그 제물은 바로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신 주님 자신입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십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에게는 죄로부터 온전해질 수 있는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기는 죄인인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사실은 의인이신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것입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이 땅에 들어왔지만 이제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다 음부로 던져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함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빚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믿음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나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우리는 믿어야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지만 그러나 이미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빚어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타는 횃불로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가셨는데 이제는 찢기신 예수님의 몸을 제물 삼아 우리를 약속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을 떠난 자들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왜 지옥에 왔습니까? 하고 따지고 드는 자들에게 너희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음으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였으니 이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옥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더 이상 아무런 핑계할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노아의 때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때는 메시야가 누군지 알지도 못했습니다라고 할 때 그때는 노아를 통해서 증거하였다는 것입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하시고 자그마치 120년 동안이나 주님이 기다리셨는데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에 올라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오직 노아와 그 가족 모두 8명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것이니 이 세상에 대 홍수가 나서 세상에 다 멸망할 것이니 너희는 이제 다 방주에 오르라고 하였지만 동물들이 다 방주로 나아와 방주로 들어가는 동안 그 날들에 그 누구도 방주로 오지 않아서 멸망을 당했으니 그때 사람들 역시 믿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고 시비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례를 받아야 하느냐 하면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신앙의 표식으로 생긴 것이 세례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을 믿는 성도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습니다. 이 세례의 의미는 노아의 홍수 때 물로 다 죽었는데 방주를 예비한 노아의 여덟 식구만 물로부터 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은 세례를 받을 때 물 속에 들어가는 순간 옛 사람이 물속에 장사 되어 죽고, 물에서 나올 때 이제 영의 새사람이 되어 살아났다는 표식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빚어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듯이 이제 의인이 죄인은 대신한 것처럼 우리가 그 은혜 안에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담력 다시 말해서 선한 양심으로 간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이제 내 안에 계십니다. 그분이 내 마음을 붙잡아주셔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간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받은 자의 특권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를 믿었으니 세례는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좋은 것이 아니라 세례는 오히려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증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우리가 믿음 안에 있음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결혼식을 통하여 우리가 이제 부부가 되었습니다고 만민들 앞에서 선포하는 것처럼 세례를 통하여 누구도 시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죄로 인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예수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산 자가 되었음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그리고 우리를 시험하려고 하는 악한 마귀 앞에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라는 말은 단순히 물세례가 아닌 동시에 성령 세례인 것이요 따라서 그 믿음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도 우리가 또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 귀한 믿음으로 날마다 이기고 또 이기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죽었다가 다시 산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능력이십니다.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이 곧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당연히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신앙고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주님께 남은 또 하나의 역사가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심판하는 일입니다. 그럼 누구를 심판하십니까? 주 안에 있지 아니한 자입니다. 믿지 않는 자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더군다나 그 때가 마냥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때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 가능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때는 더 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고후 6:2은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바로 오늘이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할 때요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은혜 베풀 때에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가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혜의 때에 구원의 역사가 있기를 위해서 우리는 간구해야 할 것이요 또한 힘써 주를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14장에 보면 예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제 곧 그날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가 다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영접되어 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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