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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 체험의 단계 (행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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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체험의 단계 (행 19:1-7)


오늘은 모든 교회들이 성령강림기념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서 성령 충만함을 입어 온 세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 약속대로 되어졌음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성경말씀에는 이해하기 힘든 문장이 하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이런 이야기가 지금 나왔습니다. 

무슨 일이, 어떻게 된 것인가? 오늘 성경말씀 1절에 ‘아볼로’라는 사람이 한명 나옵니다. 이 사람은 대단한 지식인으로 18장에 소개 되었습니다. 유대인인데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해서 헬라 문화권에서 최고의 지식을 쌓은 엘리트입니다. 언변이 좋아서 설득력이 강하고 성경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서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능통한 자라고 해석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복음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갖고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 체험은 없는 상태임을 밝히고 있는 인물이 아볼로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뭔가? 처음에 백성들은 요한이 나타났을 때 메시야인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착각할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영적 선택 민족이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하늘의 영적 음성을 예언자를 통해서 들어야 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 소리가 안 들리면 답답해하고 갈증을 느끼고 그 소리가 자기들과 맞지 아니할 때는 예언자나 선지자들을 핍박하면서 그러나 그들이 없으면 못사는 애증 관계로 선지자, 예언자들과 관계성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하늘의 그 영적 음성이 끝이 났습니다. 선지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예언자가 다 없어졌습니다. 이 기간을 약 250년에서 300년으로 잡고 이 중간기 역사를 암흑기라고 신학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면 왜 예언자가 다 없어졌느냐? “지금은 메시야가 올 차례이다. 마지막으로 메시야가 오실 터인데 그때라서 예언자가 끊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표현하기를 메시야 대망 사상이라고 합니다. 

‘언제 메시야가 오실 것인가?’ 메시야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매우 갈증스럽게 사람들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었을 때 어느 날 이상한 차림을 한 요한이라는 사람이 광야에 나타났습니다. 그 옷차림은 약대 털옷을 걸쳤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 소리를 듣자마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이 그에게 뛰어나갔습니다. “아!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의 출현이다.” 마태복음 3장 5절에 보면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로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온 유대 땅이라고 했으니까 한 나라가 다 뒤집혀 버린 것입니다. 왜냐? 메시야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이제 나타났다.” 그래서 모두가 세례요한에게 찾아와서 그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그들에게 설교하는 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열매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설교한 내용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눠주어라.” 구제활동 선언입니다. 세금 걷는 것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국세청 직원들이 요한 앞에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는 세금을 걷는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무슨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정한 세금 외에는 늑징치 말라.” 사회 정의입니다. 군인들이 “우리는 직업이 군인입니다. 우리 같은 군인들이 무슨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강포하지 말라.” 권력 남용에 대한 규제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메시야가 줄 수 있는 구원의 복음인가? 솔직히 말해서 그런 것은 기독교 아니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예언자 말고도 일반 사회 지도자들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우리는 구원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주시는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해주십시오.” 그랬더니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 그런 말은 내 뒤에 그리스도가 오시니 그분이 너희들에게 하실 것이다. 나는 물로 세례를 너희에게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메시야가 아니라면 당신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예수가 오신다는 것, 즉 메시야가 오신다고 길을 닦으러 온 사람이다. 

내 뒤에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 그가 오시면 내가 주는 물세례가 아닌 성령의 세례를 주실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타나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소개하려는 분이 이분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에베소 교인들은 요한의 물세례까지 이해하고 성령 체험은 모르는 상태로 오늘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가르쳐주고 세례를 주고 안수를 해주니까 비로소 성령체험 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말이 오늘 성경말씀의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대로 처음 교회 다닐 때 처음부터 성령 체험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볼로와 에베소 교회 교인들과 같은 단계에 머물다가 성령 체험의 단계에 가도록 되어 있으므로 첫 단계에 계신 교우님들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성령 체험 단계로 인도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순서가 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런 예를 들면 이해에 다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예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본래 종교가 무당종교입니다.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5천년 뿌리 깊이 박힌 민속종교의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현재도 약 7만 명의 무당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무당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진짜 무당을 강신 무당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는 약 20%입니다. 나머지 무당들은 습득 무당, 혹은 학습 무당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무당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한 사람들입니다. 배워서 그대로 흉내를 낸 사람들입니다. 그럴듯하기는 해도 가짜입니다. 여러분! 무당을 찾아가려면 강신 무당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진짜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습득 무당도 똑같은 일을 계속 하다가 강신을 받게 되는 그것이 우리나라 무당 문화입니다. 지금은 교회에서도 그 말 자체가 없어졌는데 옛날에는 학습 교인이라고 있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세례 받기 전에 학습을 받았습니다. 학습 받은 지 일 년 지나야 세례를 받았습니다. 학습 교인은 뭐냐? 아직 교인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지금 학습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에베소 교인들은 학습 교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학습교인들에게 바울이 가서 복음을 새로이 가르침으로 체험교인이 지금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이 자리 교회에 생전 처음 나오신 분이 계시다고 합시다. 생소하실 겁니다. 교회 예배의 모범이 찬양도 불렀다가 기도도 했다가 설교도 했다가 하나도 낯익지 아니한 생소 경험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성령 체험에 대한 이야기도 에베소 교인들과 똑같이 그런 말 들은 적도 없다고 해야 사실입니다. 그러면 나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예수 믿기 틀린 사람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 단계가 매우 오래 가는 사람이 있고 단 시일 내에 체험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됩니다. 

오늘 처음 교회에 나오셨지만 오늘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 체험의 단계입니다. 10년 다녔는데도 아직 체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온 세계 다니면서 부흥회를 많이 했는데 그 경험 중에 너무나도 잊어버리지 않는 부흥회가 하나 있습니다. 부흥회 약속을 하고 기다리는데 그 교회 지도급의 교인들 몇 사람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부흥회 오시기로 약속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그 교회 교인들인데 부흥회 하시기 전에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지만 저희들 말을 한번 들으셔야 될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보를 한번 주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이야기해 보십시오.” 그분들이 자기네 교회 담임 목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아마 평가를 하면 이 세상에서 제일 인격적 신사입니다. 성격이 얼마나 온화하신지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절대 격분하지 않으십니다. 욕심도 하나 없고 우리 목사님은 공부도 얼마나 많이 하셨는지 영국과 미국, 한국에서 최고의 좋은 학교를 거치시면서 학위를 받으셨는데 비교 종교학에 있어서 아주 권위자이십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박식하십니다. 누가 봐도 성인군자형 좋은 인격을 지니신 훌륭한 목사님이 바로 우리 담임 목사님이십니다.” 그러면서 저한테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요?” “네, 대단히 죄송하지만 다 좋으신데 예수의 십자가 구원이 확신이 없으십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목사가 예수의 구원의 확신이 없으시다니요?” “그래서 문제가 됩니다. 우리 목사님은 온 세계에서 제일 좋다는 학교에서 비교 종교학을 하셔서 종교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도록 많이 알고 계시는데 기독교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으십니다. 

이 종교, 저 종교 많이 알고 계신데 그래서 설교의 50퍼센트 이상은 언제나 타 종교를 이야기하십니다. 기도하실 때도 부처님 같이 하십니다. 참선하시는 것처럼 하십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책상다리처럼 하고 앉아계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인지 부처님인지 분간이 안갑니다. 그리고 불교의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끝이 없이 박식하십니다. 타종교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 우리가 지금 절에 와있는 건지 대학에서 비교종교학 강의를 듣고 있는 건지 교회에 와있는 건지 분간이 안갑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표현이 뭐냐 하면 “우리는 예수의 피에 굶주린 백성입니다. 십자가의 피의 공로가 무엇이며 이것에 대해서 우린 너무나 굶주리고 그냥 일반 종교 강의를 듣다가 끝이 나니까 너무나 답답합니다. 목사님! 이거 어떡하지요?” “그런가요? 예수의 피에 굶주린 백성이라……. 알겠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번에 설교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집회는 찬송가도 내가 정해주는 것으로 부르도록 하고 찬송 중에서 피 찬송만 모두 골랐습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구주의 십자가 보혈” “샘물과 같은 보혈” 어쨌든 피 찬송만 다 끄집어내서 계속 피 바다를 만들었습니다. 

설교도 “왜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는가?” “구약 시대에 왜 속죄를 위해서 양을 잡아다 피를 흘리고 뿌렸는가?” 피의 연결에 대해서 계속 설교를 했더니 교인들은 오랜만에 피 맛을 봐서 얼마나 흥분하고 좋아하는지 그렇게 3박 4일 집중적으로 피바다 부흥회를 끝냈습니다. 마지막 다 끝나고 목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 목사님! 기독교의 십자가 구원관에 대해서 나는 이번에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저 공부 다시 하겠습니다. 여태까지 헛일만 했습니다.” 그 목사님 그래서 신학을 다시 하셨습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다. 이 성령 체험은 바로 그런 단계가 있습니다. 비교한다면 지금 아볼로 목회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았느냐?” “성령이 뭐죠? 그런 것은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들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성령 체험의 단계를 성경에서 한번 찾아봅시다. 첫째 단계는 내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3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엘리야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그 사회에서 최고 존경받는 인물을 갖다 대고 예수님을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거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다. 네 자신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가 너에게 알게 해주셨다.” 이런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 순간이 예수님에게 가장 기뻤던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바로 그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첫 단계 성령 체험자들입니다. 그 고백이 있으십니까? 

그 다음 단계는 성령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확실한 단계가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9절에 나오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너희에게 세 가지 책망을 하실 것이다.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책망하실 것이다. 그런데 죄에 대하여라 함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질문을 해보시면 이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 기독교에 대해서 말하는 죄의 개념에서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뭔가? 죄 중의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 죄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보십시오. “제1은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제2는 우상을 만들고 절하지 말라.” 이게 뭡니까? 이게 제일 큰 죄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믿는 것은 가장 큰 죄이다.” 신약이나 구약이나 다 똑같이 그렇게 가르쳤지 않습니까? 그러한 신학에 기초해서 말하면 지금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을 말하면 제일 큰 죄인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죄인 줄 압니까? 절대로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아느냐? 성령을 받은 사람만 아는 겁니다. 이게 성령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여러분 이웃에 사는 아주 모범심이 많고 착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고,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말해보십시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오.” 어떤 반응을 일으키겠습니까? “이런 미친 사람!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당장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실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 체험한 사람들의 고백이 됩니다. 성령 체험한 사람들만이 그것이 죄인 줄 아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절대 모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약속을 하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게 된다.” 그러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그랬는데 여기서 말씀하신 성령의 임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이미 제자들은 성령 체험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생활 3년이나 다 한 상태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지 않습니까? 성령 다 받았는데 이때 또 무슨 성령의 임함이 필요한 것인가? 그런데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분명히 그렇게 약속을 하셨지 않습니까? 이때에 성령의 임함은 은사적 개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내가 특별히 해야 할 어떤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업그레이드 된 한층 높은 단계의 성령 충만의 역사를 주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그랬습니다. 권능적 체험이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가 특별히 해야 될 일이 기다리고 있을 때 성령 충만의 역사는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 이미 기도를 할 만큼 성령 체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또 다른 성령의 은사적 역사가 충만하게 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들은 지금 온 세계 다니며 복음을 전해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사명을 위해서 한 단계 높은 은혜적 체험에서 은사적 체험으로 성령 충만을 주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은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을 위해서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 거리로 뛰어나가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였다.” 그 말을 하면 그 사회에서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끌어다 죽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권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성령 충만의 단계적 역사입니다. 

제가 쉬운 예화를 하나 들 수가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주일학교 시절에 성령 체험을 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기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 했는데 제가 지금 나를 판단하면 하나님이 나를 가장 예쁘게 보실 때가 나는 그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춘기 시절에 얼마나 순수했고 정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깨끗하게 살고 아주 신났고 얼마나 교회 봉사 열심히 했는지 모릅니다. 

눈이 오면 새벽 일찍 나가서 교인들 눈 밟지 말라고 눈 쓰는 거 다 했고 새벽 종 다 쳤고 교인들 추울까봐 산에 가서 나무 잘라다 나무 피우고 주일학교 선생하고 사춘기 시절에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릅니다. 그대로 일평생 살아가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나한테 어느 날 또 다른 성령의 역사가 찾아왔는데 이때부터 나는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아니, 이게 내가 왜 이러나?’ 내가 나를 봐도 정상이 아닌 겁니다. 여기 불곡산이라고 있습니다. 

그 최고 높은 봉우리에 12월 달에 그 눈이 무릎까지 쌓이는 곳에 가마떼기 하나를 걸머지고 그것을 정상에 펴놓고 밤새도록 눈을 맞으면서 사춘기 소년이 기도를 드리고 있고 정신 나간 사람 같은 겁니다. 심각해 졌습니다. 괜히 눈물이 나고 멀쩡하게 나보다 더 잘 사는 사람보고 불쌍하다 그러고……. ‘이게 도대체 내가 뭔가?’ 아무리 내가 나를 생각해도 내가 정상이 아닌 겁니다. 막 가슴은 뜨거워서 견딜 수 없고 소리 지르고 싶고……. ‘내가 왜 이러는 거야?’ 바로 그것이 나에게 목사가 되라는 소명 의식의 성령 충만의 은사적 체험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같습니다. 수십 년 전에 훌륭한 신앙 고백 다 했고 세례 받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신앙생활 잘 했고 아무 문제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새로운 사명이 주어질 때 하나님이 내 마음에 불을 던져버립니다. 그러면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뜨거워집니다. 그런 때가 되면 어떻게 되느냐? 나는 그러한 하나님의 영적 은사를 따라서 나에게 주신 그 사명을 위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이때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면 성경에는 영원히 사심을 받을 수 없다는 말까지 발표했습니다. 

나중에 이 성령 체험의 은사적 단계는 나를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느냐? 순교의 자리까지 갑니다. “너는 이제 이 진리를 위해서 죽어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다. 그게 순교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 단계, 저 단계까지 거쳐서 마지막에는 그 단계까지 갈 수 있도록 성령이 이끌어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젊은 나이에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찬송을 부르면서 순교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생활을 할 때 성령이 내 마음을 터치해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길을 자꾸 따르도록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크게 쓰임을 받고 믿음이 더 깊이 있는 믿음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조그만 일도 도무지 결정이 안 되고 실천이 안 되는 교인들도 수없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그 기간이 짧고 어떤 사람은 매우 깁니다. 예수 믿은 지가 벌써 수십 년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려는 일은 움직여지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 그렇게 많이 말한 우리 삶의 수입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까 드리라고 했는데도 그 은사의 성령 체험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절대로 못합니다. 평생 못합니다. 그런 단계가 수없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 체험은 절대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한 은사적 성령 체험을 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더 큰 사명을 주십니다. 교회도 한 가지 사명에 충실하면 나중에는 더 크게 쓰임을 받습니다. 그렇게 성령 체험의 단계가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주일 전에 미국에 살고 있는 제 오랜 친구 목사님이 제 사무실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반갑게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이 만난 다른 사람 이야기 하나를 의미 있게 저에게 들려주고 갔습니다. 그 사람은 누구인지 저는 모릅니다. 아주 지식인이고 똑똑하고 글 잘 쓰고 말 잘하고 누구도 당할 수 없는 학문 세계의 실력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끼리만 모인 그룹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그룹이 열심히 하는 일은 반기독교, 예수 믿는 일을 반대하는 일이랍니다.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회의처럼 하는데 그 사람이 자기의 모든 실력을 총동원해서 책을 하나 출판했는데 제목이 뭐냐?「예수는 없다」입니다. 

학문적으로 자신 있게 써서 출판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한 작은 일을 너무나 표출화 해서 이렇게 기독교가 퍼진 것이지 그런 예수는 없었다.” 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이 출판해서 책으로 나왔습니다. 이번에 그 사람을 만났답니다. 그를 만나서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아주 훌륭한 실력을 동원해서「예수는 없다」는 책을 쓰셔서 출판이 되었는데 제가 한 가지만 질문할 텐데 곤란한 질문이지만 제가 꼭 이 질문을 하고 싶어서 하니까 정직하게 대답해주시면 감사하겠고 안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했답니다. “질문하십시오.” “선생께서 그 책을 출판하신 후 편안히 잠을 주무십니까?” 이렇게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눈을 크게 뜨면서 의아스럽게 쳐다보면서 “아니, 목사님이 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렇게 반문하더랍니다. “편안치 않으신 거죠?” “네! 사실 저는 반기독교 인물이라 온갖 실력을 다해서 그 책을 출판했는데 그 이후 목사님 말씀대로 내가 도저히 편안히 잠을 못자고 하던 사업도 다 망했고 이게 도대체 왜 이런가? 지금 그러고 있는 중에 목사님이 질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자기가 ‘이제는 됐다.’ 생각하고 “아니, 그 머리를 가지고 그 실력을 가지시고 뭐 잘났다고 그 책을 쓰십니까?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은 만고불변의 패망 진리가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시겠습니까? 세계적인 석학 영국의 버틀 란트 러셀이라고 있었고 중국의 이모당 박사라고 있었습니다. 

이분들이 반기독교적 책을 출판했지 않습니까? 그분들이 출판한 책을 나는 나오자마자 다 읽었습니다. 그것으로 그들은 세계적인 석학이 되고 그것 때문에 훨씬 더 존경받고 “과연 이모당 박사! 러셀!” 인정을 받았습니다. 한국말로 다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마지막에 다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다 회개했습니다. 회개하면서 전부 반대의 글을 쓰고 죽었습니다. 두 분 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이미 출판은 나왔고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거 서점마다 가서 다 거둬들이시고「예수는 있다」라고 책을 써야 회개가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서 이번 기회가 당신이 믿음을 갖는 하나의 통로가 될 테니 보십시오.” 그러며 전도했다고 나한테 와서 이야기하고 갔습니다. 맞습니다. 성령을 거스르면 안 됩니다. 성령이 시키는 것을 마음을 두드리는 것을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기면 더 큰 사명을 주시고 마지막에는 가장 큰 일에 몸을 바치는 주님의 제자가 되도록 그렇게 인도하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을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그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날마다 성령 충만의 은사적 개념을 내게 주소서.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대로 나를 써주시고 우리 교회에 이러한 성령의 충만을 항상 주셔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쓰임 받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그런 믿음으로 기도하시면서 이 성령강림절 주간을 보내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성령님은 내 영 가운데 오늘도 임재 하셔서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서 주일을 지킬 수 있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날마다 매일같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기억하면서 성령의 역사를 거절하지 말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문을 열어서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기는 능력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나도, 교회도 점점 더 하나님의 큰 사역에 쓰임 받게 하여 주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희생되는 기쁨이, 우리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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