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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에서 희망으로 (왕하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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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희망으로 (왕하 4:1-7)
  

1. 이제는 희망을 말할 때 

며칠 전 수원에서 50대 가장이 부인, 그리고 아들 두 명과 함께 집에 연탄불을 피워 동반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중학생 초등학생인데 너무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이 가정은 보증금 2천만 원에 월세 70만 원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으나 몇 달치 집세를 내지 못하는 등 최근 형편이 몹시 어려웠다고 합니다. 생활고를 비관해서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생활고를 비관하고 신병을 비관하는 이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갈 정도로 경제가 좋아졌다고는 하나 가정 형편이 어려운 분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했다고는 하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 시대에 절망하는 이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요즈음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희망을 말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저는 희망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전할까 고민하다가 약 2년 전에 했었던 설교를 다시 한 번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만큼 이 말씀이 희망에 대해서 훌륭한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다 알고 있는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또 한 번 마음의 문을 열고 은혜받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본문은 엘리사 시대에 일어난 기적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두 아들과 함께 큰 빚을 진 여인이 그 빚을 다 갚았을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생활비까지 해결했다는 줄거리이지요. 고대 근동 지방에서 과부가 큰 빚을 져서 생계가 막막해진 상태에다가 두 아들까지 노예로 넘겨줘야 할 형편이라면 절망 중에서도 최악의 절망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가정은 어떻게 절망으로부터 빠져나와 희망의 빛을 찾게 되었을까요? 

2. 절망에 이르게 한 문제, 문제들 

먼저 이 가정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1절을 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주인공은 선지 생도의 아내였습니다. 오늘로 친다면 신학생 전도사님의 사모님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그만 아내와 아들 둘을 남겨놓고서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냥 죽은 것만 해도 슬프고 답답한 일인데 큰 빚까지 처자식에게 남겨놓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답답한 나머지 남편이 다니던 신학대학의 엘리사 학장님께 찾아와 자기 가정의 딱한 사정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여기 선지 생도의 부인에게는 절망에 빠지게 한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믿고 의지할 가장이 없습니다. 그 옛날 중동 지역에서 남편의 비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야말로 한 집안을 떠받치는 기둥이요 대들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은 오로지 남편과 아버지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은 남편을 잃은 과부와 아버지를 잃은 고아를 특별한 돌봄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 여인은 장차 목회자가 되고자 큰 꿈에 부풀어 신학공부를 하던 남편 전도사님을 잃고 졸지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두 아들과 함께 먹고 살 일이 막막한 과부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남편만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설상가상으로 큰 빚을 졌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빚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으면 바울 선생의 말씀대로 사랑의 빚 이외에는 빚을 지지 말아야 합니다. 빚을 지면 자유함이 없습니다. 항상 채주에게 눌려 지내기 마련입니다. 이자라도 줘야 할 날이 오면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잃은 것만 해도 큰 슬픔인데 거기다가 막대한 빚까지 졌습니다. 너무도 안타까운 형편이었지요. 

셋째, 큰 부채로 인해서 사랑하는 두 아들을 노예로 넘겨야 할 처지였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어떤 사람이 정해진 시간 안에 빚을 갚지 못할 경우 본인은 물론이고 그 자녀들까지 노예가 되어서라도 변제할 것을 합법화했습니다. 여인은 집안 형편이 너무나 가난해서 도저히 빚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2절에 보면 이 집에 남은 것은 기름 한 병이 전부입니다. 그야말로 빚을 갚는 것은커녕 먹고 사는 일 자체가 막막했지요. 그리하여 이 여인은 생때같은 두 아들을 꼼짝없이 채주의 집에 노예로 보내서 최소한 6년 동안은 머슴살이를 시켜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3. 절망에서 빠져나와 희망으로 가다

산이 크면 그늘도 크다는 말이 있지요. 죄가 크면 은혜도 크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망이 클수록 희망도 큰 법입니다. 극심한 생활고로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한 가정이 살아납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갑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첫째, 엘리사에게 찾아가 부르짖었습니다. 

자기 남편이 다녔던 선지학교의 교장인 엘리사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는 것이지요. 이 여인이 찾아가 도움을 구할 대상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마 남편의 친인척들도 겨우 자기 식구들의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였지 이 여인을 도울 처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그래도 자기 남편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엘리사에게 찾아가 딱한 사정을 하소연합니다. 

우리가 큰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른 대상을 찾아가야 합니다. 본문의 여인은 자기 남편을 가장 잘 알았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찾아갔습니다. 다른 세상 사람들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라면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엘리사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큰 문제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가면 해결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0: 13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 문제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해결책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엘리사는 여인에게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2절을 보세요.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하니."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 여인이 어떤 형편에 놓여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돕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반드시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하여 돕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허공에서 기적을 베풀지 않습니다. 사실 엘리사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었기에 얼마든지 금방 돈을 만들어서 즉석에서 빚을 다 갚도록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인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작은 것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5천명을 먹이실 때에도 한꺼번에 기적을 일으켜서 전원을 다 먹이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작은 소년이 싸들고 온 도시락,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초로 해서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실 때에도 먼저 빈 항아리 여섯 개에 아귀까지 물을 가득 채우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큰 문제 앞에 여러분이 갖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본문의 여인처럼 지극히 작은 것, 즉 기름 한 병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작은 것을 통하여 큰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셋째, 엘리사는 여인에게 할 수 있으면 모든 이웃에게 많은 숫자의 빈 그릇을 빌려오라고 했습니다. 3절을 보세요. "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왜 빈 그릇을 빌리되 되도록 많이 빌려오라고 했을까요? 그 빈 그릇에 한 병 남은 기름을 가득 채워준다는 암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능력을 믿는 이 여인이 이것을 모를 리가 없지요. 여기서 빈 그릇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을 말합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은 당연히 빈 그릇도 적게 빌려오겠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이 기름 한 병 밖에 되지 않는,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믿음의 분량에 따라 빈 그릇을 많이 준비하면 그 그릇마다 가득 차게 해주실 줄 것입니다. 

넷째, 엘리사는 여인에게 두 아들만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빌려온 빈 그릇에 기름을 부으라고 했습니다. 4절을 보세요.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이 '두 아들과 함께'와 '문을 닫고'입니다. 5-6절 말씀을 보면 이웃집을 돌면서 빈 그릇을 빌려온 것은 두 아들이었습니다. 두 아들은 어머니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지시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치된 순종이 꼭 필요합니다. 이 집안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마지막 한 병 남은 기름을 붙들고 큰 믿음으로 빈 그릇을 많이 빌렸습니다. 세상을 떠난 남편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 아내와 자식들 역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일에는 한 가지였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온 가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가 되어보십시오!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비록 마지막 남은 것이 기름 한 병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준비한 믿음과 순종의 그릇 수만큼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왜 세 모자만 자기 집에 들어가 문을 닫고 빈 그릇에 기름을 부으라고 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먼저 기름 한 병은 이 집안에 마지막 남은 재산입니다. 그 기름 한 병마저 채주에게 빼앗긴다면 이 집안에는 기댈 희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름이야말로 이 집안을 지탱해주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문을 닫고 비밀스럽게 그 기름 한 병을 다른 빈 그릇에 부으라는 것은 그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채주에게 빼앗기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마지막 남은 이 기름 한 병을 '믿음'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무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기름 한 병,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라는 기름 한 병만 가진다면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그 기름 한 병을 세상의 채주에게 빼앗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문을 닫아야 할 이유는 기름 붓는 행위에 방해를 받지 말라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가운데 기도해야 할 이유도 오직 기도에만 집중하고 방해를 받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름을 빈 그릇에 붓는 행위는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빌려온 빈 그릇마다 가득 채워주심을 믿는 마음 하나로 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말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지요. 

5-6절을 보세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 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엘리사의 말 그대로 순종했다는 말이지요. 아들 둘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빈 그릇을 빌려왔고, 드디어 세 모자는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어머니는 두 아들이 가져오는 그릇대로 기름이 가득 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신기하게도 빌려온 모든 그릇이 가득 찼을 때 기름은 뚝 그쳤습니다. 구약판 오병이어의 기적인 셈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지요! 

이제 결론부인 7절을 보세요.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그가 이르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이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기름을 팔아 빚을 청산하면 됩니다. 이제 빚만 갚으면 두 아들이 노예로 팔려갈 일이 없습니다. 빚에 대한 압박과 설움으로부터 해방된 것이지요. 그리고 나머지 남은 기름을 팔아 앞으로 생계비로 쓰면 됩니다. 현재의 문제뿐만 아니라 미래의 문제까지도 해결된 것이지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희망의 빛으로 넘어간 것이지요! 

5. 무지개 = 비 + 태양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이 있지요. 한 노인 어부가 84일 동안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조수로 일하던 소년마저 크게 실망해서 노인을 떠나 다른 어부의 배로 갑니다. 홀로 먼 바다에 나간 노인은 사흘간의 사투 끝에 대어를 낚아 배 뒤에 매달고 육지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피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어 떼와 노인은 또 한 차례 목숨을 건 싸움을 벌입니다. 노인이 이 모든 싸움을 물리치고 가까스로 항구에 닿았을 때 그가 잡은 물고기는 상어 떼에 물어뜯겨 앙상한 뼈만 남습니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통하여 처절한 절망 가운데에도 희망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위엄있게 싸우는 인간의 용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물고기와 싸우면서 노인이 내뱉는 명언들이 나옵니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It is silly not to hope. It is a sin). 

이 노인의 말처럼 우리 역시 인생의 고비마다 닥치는 온갖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파괴될지언정 패배 당하지 않는다”는 불굴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암세포와 싸울 때 비록 파괴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패배는 당하지 않는다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더욱이 아무리 절망의 밤이 깊더라도 결단코 희망의 새벽이 밝아온다는 확신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히틀러 정권에 의해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냈던 시가 있습니다. 독일 퀼른에 있는 한 지하방공호의 벽에 쓰여 있는 시의 내용입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주위에 사랑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지만, 나는 사랑이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비록 침묵 속에 계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또한 20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매튜라는 청년은 죽기 10개월 전에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태양이 없으면 우리는 무지개를 가질 수 없지. 비가 없어도 우리는 무지개를 가질 수 없지. 아! 태양과 비! 웃음과 고통! 그것들이 함께 어울려 무지개를 만드는 거지!” 

옳습니다. 일곱 색깔 무지개는 비가 온 뒤 태양으로 인해서 생깁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도 무섭게 쏟아지는 소낙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소낙비 다음에 태양이 비칠 때 찬란한 무지개가 뜹니다. 절망 다음에 희망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갖가지 절망스러운 문제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일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모든 것이 불만족스럽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에게 남은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힐 때 큰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믿음과 순종으로 빈 그릇을 준비해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그 빈 그릇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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