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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 (계 2:1 - 계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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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 (계 2:1 - 계 3:22)  

  
주 예수님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신 각각의 편지 내용에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를 향해 주시는 말씀을 듣는다. 오늘날의 교회는 일곱 교회 중 한 형태에 해당하기도 하겠지만, 이는 극히 드문 일로 보인다. 오히려 일곱 교회의 다양한 모습이 동시에 혹은 시차적으로 한 교회 안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그 분은 좀 더 상세히 자신을 소개하신다. 이 소개를 통해서 편지를 받는 사람들의 관심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께 집중시키신다.

여기서는 다음 세가지로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예수님은 역사의 시작과 마지막이 되시는 전능하신 분으로서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해 죽으셨으나 부활하시어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으로 소개된다. 또 교회를 돌보시고 지키시는 분으로 나타나시면서 교회의 주인이시요, 만왕의 왕으로 소개된다. 끝으로 순결하시고 거룩하신 분으로서, 모든 것을 살피시는 분으로서, 그리고 친히 싸우시는 분으로서 소개된다. 일곱 교회를 향한 개별적인 편지글의 서두에 발신인으로서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그 교회의 형편에 맞게 적확히 소개되는 것을 다시 보게될 것이다.

사도 요한이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자.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1:9) 이는 예수님의 사도로서 성도들이 현재의 상황과 처지에서 동일한 고난과 시련을 겪어왔음과 그 동일한 형편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을 받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아무나 환란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당시 성도들과 동일한 환난 가운데 처한 사도 요한을 소개함으로써 혼란하거나 휩쓸리지 않고 거룩하게 지켜가야할 교회에 대하여,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도 영광스런 소망을 이룰 인내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사도 요한의 고난 가운데서 걸어갈 길과 위로에 대하여 성도들의 마음과 생활을 추스리도록 하시는 것이다.

맨 먼저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셨는데, 에베소는 소아시아에서 제일 큰 도시이다. 육로와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세계에서 제일 큰 아데미 여신전이 있어서, 여신상을 주물이나 조각으로 만들어 세계 각곳에 파는 것이 중요한 산업이었다. 계속되는 신전 축제가 있었고, 여신에 대한 충성 서약이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과 함께 강요되고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오른손에 일곱 별(교회의 사자)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교회) 사이에 다니시는 이"(계2:1)라고 소개하셨다. 주님이 친히 일곱 교회를 은혜와 진리로 돌보시며 거룩한 교회로 지키시는 분으로, 그리고 일곱 교회에 세우신 사자들을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도록 오른손으로 붙드셔서 의롭게 세워가시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신다. 이는 에베소 교회가 처한 상황 가운데서 개입하시는 주님의 접근을 실제적으로 느끼게 한다.


진리 지키기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인정하심과 칭찬은 환난과 시험 가운데서 부지런한 수고와 복음으로 인내한 모습에 있었다. 진리를 어긋나게 가르치는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그 거짓 가르침의 잘못된 것들을 드러내어 교회를 거짓으로부터 보호하고, 진리를 수호한 용기있는 모습을 칭찬하셨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신 주님의 인정과 칭찬의 내용은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에서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교회의 우선 순위가 진리 수호보다는 다른 무엇을(교회 성장, 가정의 평안, 개인의 건강을 비롯한 문제 해결 등등) 위한 수단으로 변해버리지는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하다.

요즈음처럼 분별력이 요구되는 때도 없을 것이다. 성경에 대한 연구와 이해보다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우리들의 우선되는 관심이 되었고, 이 부분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무엇도 우리들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심히 우둔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니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은 우리에게 부럽기만 하다.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이 이 시대를 분별하는 기준으로서의 진리를 성도들의 실제 생활 속에 활발히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있는 성경 연구가 계속되기를 바라며, 이를 위한 목회자의 시간 안배에서 우선적인 배려가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이는 목회자 개인의 결단으로 되지않는, 성도들과 함께 이루어가야할 부분으로 여겨진다.


처음 사랑, 처음 행위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이게 무슨 말씀인가?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린 사랑없는 교회라니? 많은 수고와 믿음의 인내와 진리 수호에 앞장 서 온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린 사랑없는 교회라니…. 충격이다. 처음 사랑을 경홀히 여겼다거나, 사용하지 않았다는 책망이 아니라, 처음 사랑을 아예 버렸다는 말씀은 인정과 칭찬을 받은 에베소 교회를 생각할 때 이해하기 어렵다.

많은 일을 하고 그 일을 성공적으로 잘 해내면 인정과 칭찬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자로 낙인찍히는 우리 사회에서 에베소 교회에 주어진 주님의 책망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과의 처음 사랑 없이도 그런 일들을 힘써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랑 없이도 사람들 보기에 훌륭한 일들을 많이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런 지적을 우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지적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가볍게 넘어가 버리는 자들이라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거짓과 싸워 이겼으면 됐지, 그 와중에 처음 사랑을 지켜갈 여력이나 있겠느냐"고 오히려 주님께 그 상황을 들먹이며 따지고 나올 우리 세대는 아닌가? 우리에게 옳다고 여겨지는 한 두가지가 있으면 그 일에 매달리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가? 그런데 주님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것도 이것과 저것이 서로 합해지기 어려울 것같은 상황에서 말이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할 때 우리는 개인적으로 적용해서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되었을 때 드렸던 순수한, 헌신적인, 온전한 사랑 고백 없이 그냥 주어진 일에만 열심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의 순수함을 찾아야 겠다고 다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당한 효과가 있는 적용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책망을 듣는 이는 에베소 교회이다. 에베소 교회 초창기 성도들이 지켜왔던 주님을 향한, 성도 서로를 향한, 교회 밖의 한 영혼 영혼을 향한 사랑이 지금의 에베소 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상황이 주는 사안들은 잘 대처해 왔으나, 에베소 교회를 우리들의 조상이요, 신앙의 선배들인 성도들이 지켜왔던 처음 사랑은 버려진 것이다. 그 대안은 계시록 2장에 "처음 행위를 가지라(Do the first works!)"고 하신 말씀 속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어떻게 자신의 명예와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도 아니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성도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인가? 우리는 정답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교회가 역사 현장에서 일을 찾아하면서 또는 훌륭한 사람의 지도력을 따라 나아가면서도 이런 책망을 듣게 되는 것은, 교회를 향한 주님의 목적이 분명하게 서로에게 인식되지 않고 고백되어 오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역사 상황도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 지도자도 바뀐다. 이렇게 바뀌는 중에도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시대의 상황이나 사람의 지도력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교회의 목적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는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있는가, 어떤 지도자들이 있는가를 살피는 동시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에 주님 주신 목적은 어디에 있으며, 그 목적이 어떻게 교회의 역사와 구조 속에서 선배 신앙인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는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초기 교회 성도들의 생각과 비전은 상황에 따라 수정될 수 있겠으나, 그들의 오랜 기도와 수고는 무시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회의 목적으로서 처음 행위

오늘날 교회들은 꿈은 크나 현실적인 삶은 힘이 없다. 한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다하려고 덤비지만, 곧 그렇게 할 수 없어 쓰러지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가 지향해 온 교회의 목적을 지속적으로 수정 보완하며 이루어나가기 보다는, "새로운 것, 새로운 것" 하다가 둘 다 놓쳐버렸기 때문으로도 보인다. 교회 안에도 깜짝 행사들은 즐비하게 소개되지만, 도대체 교회 역사를 돌아보아 일관성 있는 발전상을 찾아 보기 힘들다.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주님은 말씀 하신다. 지금은 처음 사랑을, 처음 행위를 회복할 때라고.


기회를 주심이 은혜이다

"만약 회개하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고 하신 엄청난 주님의 경고 속에서, 그 심각성을 우리는 무시해서는 안된다. 처음 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회를 가지고는 주님이 원하셨던 교회의 역할을 도저히 할 수 없었기에 주님은 그 교회의 역할을 다른 곳으로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지금 에베소 교회의 모습은 사람들이 돌아갈 본향도 아니며, 주님의 새 백성을 맞이하며 함께 균형있게 성장할 공동체도 될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가 택한 일에만 몰두 할 것인가?

지금은 처음 사랑을, 처음 행위를 회복할 때라고 말씀하시며 주님은 기회를. 개인적인 신앙 여정의 관점을 무시할 수 없지만, 우선적으로 우리가 속한 신앙공동체의 처음 사랑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자. 그 처음 사랑이 교회마다 가닥이 잡혔으면 좋겠다. "우리 교회의 처음 사랑은 무엇인가요?", "우리 교회의 처음 행위는 무엇으로 시작되었나요?" 그냥 좋은 질문이라고 넘겨버릴 것이 아니다.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이 물음의 정직한 답변을 통해 오늘날 우리 교회가 서로 별 차이 없이 비슷 비슷 흉내내기 바쁜 모습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주님의 교회의 다양함 속에서 하나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차이가 나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교회를 이루어가는 우주적 교회를 기대하자. 모방으로 얼룩진 획일적인 활동이 아닌, 사명의 독특함을 지닌 일관된 교회의 역사를 기대하자.

우리의 관심은 모두가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우리에게 주님 맡기신 독특한 사명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신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의 일관성 있는 발전상을 가지고 만나 주님 안에서 새 백성, 새 공동체 이루기를 바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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