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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 우리는 울며 금식할 때입니다 (느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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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울며 금식할 때입니다 (느 1:1-11)


오늘 우리는 6.25 전쟁 발발 61돌을 맞는 자리에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교단에 있는 남북교회 협력위원회에서 해마다 가는 북한 접경지역을 돌아보는 일을 하고 왔습니다. 깊은 이야기는 다 드릴 수가 없고 압록강을 따라 803km를 가면서 처소 교회를 돌아보고 4000리 길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눈에 비친 것은 모든 산이 다 벌채를 해서 민둥산이 되다시피 한 정말 마음이 아픈 현장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모릅니다. 특히 이성계가 회군한 위화도를 가까이 가보니까 북한 주민들의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처참한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몇몇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선량한 백성들을 굶기다 시피하여 비참한 노예로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고통 받는 나라로 전락한 저 북녁땅을 우리가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 민족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나라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6.25전쟁 때 이 땅의 자유를 위해 싸운 국군 포로의 조속한 귀환 문제입니다.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질 때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는 8만2000여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남한으로 송환된 포로는 8343명에 불과합니다. 7만3000여명의 국군포로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북한에 남겨졌습니다. 분단이 고착화된 뒤 귀환한 국군포로는 80명에 불과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피 흘린 우리의 형제를 저렇게 버려 둘 수가 있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억울하게 끌려간 군인들은 탄광에서 고된 노역에 시달렸고, 가족마저 감시의 대상이 되는 등 고통의 세월을 보내는 저들을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우리 품으로 안기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생존 국군 포로가 560명이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김정일 집단은 자신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 엄청난 군사력 중강과 남침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천안함 침몰에 이어 북한이 6.25 이후 처음으로 우리 영토인 연평도에 포탄을 쏟아 붓지 않았습니까? 민간인까지 희생된 최악의 사건에 대규모 맞대응 훈련이 이어지고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지 않습니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언제 또 도발할지 모르는 상태이지만 여전히 국민들이 안전 불감증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 교회와 성도들이 먼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할 때라는 생각에 기도의 부담이 더  커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남북의 이 분단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통일에 대한 열망이 있으십니까? 지난 2000년 이후의 우리 겨레의 통일 의식 조사 연구를 살펴보면 통일 의식은 세월이 흘러 갈수록 후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 져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아직도 80% 정도의 국민이 지속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만, 되도록 신속하게 통일이 이루어 져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2000년에는 69%가(남북 정상 회담의 기대치가 끼친 영향), 2004년에는 30% 정도로, 그리고 2006년도 말의 한 통계에는 약 14%의 국민들만이 동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에는 통일 비용 부담을 꺼리는 경제 의식이 가장 중요한 반통일 의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성도가 가져야 할 민족에 대한 자세를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조국의 어려운 처지를 들은 느헤미야가 조국을 위해 기도했고, 그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조국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역사의 문을 연 아주 중요한 사건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6.25 기념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모든 믿음의 식구들이 느헤미야와 같이 우리 민족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 민족이 당면한 모든 고통과 문제들이 해결되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전 4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은 오늘 본문보다 무려 140년 전인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라가 멸망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아끼던 성전도 파괴되고, 주권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벽도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의 집들은 거의 다 불타버렸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야 했습니다. 빈천한 자만 그 땅에 남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때 사로잡혀 갔던 포로에게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자신의 고국에서 온 몇몇 사람에게서 조국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다같이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그 동안 느헤미야는 14여 년 전 에스라가 2차 귀환을 한 후 공사를 실시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에 타버렸으며,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때 느헤미야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가 어떻게 행동을 했습니까? 

첫째로 슬퍼하며 기도하며 울었습니다. 

다같이 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는 수일 동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왜 느헤미야가 슬퍼하며 울었을까요? 13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조국이 큰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기 동족들이 큰 환란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1세에게 신임을 받아 수산 궁에서 ‘술 관원’으로 있었습니다. ‘술 관원’은 왕이 마시는 술에 독이 들어있는지 없는지, 미리 술을 맛보는 사람입니다. 요즘의 경호실장이나 비서실장과 같은 직책으로서 독살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왕을 보호하고, 왕과 함께 앉아서 국정을 논하는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당시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실세 중의 실세였습니다. 그는 이민자로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포로로 끌려간 사람으로서 출세하기 쉽지 않았지만,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페르시아 제국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떠나온 조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건,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져 있건, 성문이 불타 버렸건, 그러한 것은 그의 삶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에게는 모든 초점이 권력에 있습니다. 어떻게 권력을 잡을 것인가, 잡은 권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술관원 역시 어떻게 왕의 신임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렵게 오른 이 자리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주인공인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1,300Km나 떨어진 조국이 큰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잠깐 울다가 그친 것이 아니라, 수일 동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느 2:1을 보면 느혜미아가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하며 기도를 한지 아십니까?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왕이 느헤미야를 보니까 전과 달리 그 마음에 수심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시기입니다. 니산월이라 되어있습니다. 지금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모습을 본때가 니산월이라는 말입니다. 니산월은 4월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고향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하기 시작했던 때가 1:1을 보면 기슬르월입니다. 기슬르월은 11월에서 12월경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4개월 이상 경과한 것입니다. 오랜 기도의 시간입니다. 이 기도는 응답이 될 때까지의 기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참 힘든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기다림입니다. 언제인가부터 우리들은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뛰어야 하는 민족,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 자동으로 닫히는 그 시간을 인내하지 못하고 단추를 눌러 닫아야 하는 대표적인 민족이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 빨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습관은 우리의 기도생활에도 영향을 끼쳐서 우리는 기도를 시작하자 당장에 응답을 기대합니다. 소위 인스턴트 문화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도조차 인스턴트식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도란 시간과 함께 열매를 맺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장인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가18:1이하에서 주께서는 기도를 가르치면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 지속적으로 탄원하는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그러면 왜 주께서는 당장의 응답보다 기다림의 과정을 거치게 하실까요? 아마도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기도의 응답 그 자체보다 기도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를 더 중시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북한 접경지역을 다녀보면서 느낀 것은 60년을 기다렸는데 이제 좀 통일이 되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저 철의 장막이 닫혀있는 모습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누구보다 한국의 통일을 열망하며 이 나라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시다가 돌아가신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제 생각에는 한국의 통일을 위해 하나님이 행동하실 기도의 잔이 다 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잔이 다 채워지기까지 기도할 중보자들이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보다도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중보의 용사들의 중보의 잔이 다 차면, 그리고 마침내 때가 이르면 주께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분단의 벽은 무너지고 평화 통일의 그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피 흘림이 없이 서로를 안고 통일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피 흘림이 없이 서로를 안고 통일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다시는 비극의 전쟁터로 이 땅을 물려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둘째는 느헤미야는 자신을 일꾼으로 써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기도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꾼이 되도록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느헤미야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여기서 “이 사람”은 아닥사스다 왕을 가리킵니다. 

왕 앞에 은혜를 입게 해 달라는 것은 자신이 조국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도록 왕으로부터 허락을 얻어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조국으로 가고 싶은데 왕이 허락해 주지 않으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는 왕의 신임을 얻고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이기에 왕이 보내주지 않으면 아무리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왕궁에서 왕의 신임을 받으며 높은 지위를 얻어 평안한 삶을 살고 있는데, 그 모든 지위와 안락함을 다 버리고 조국으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조국에 가는 것은 결코 형통하고 평안한 길이 아닙니다. 험난한 길입니다. 또 조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이 지위와 편안한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느헤미야는 조국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조국 이스라엘로 가는 길이 열렸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신앙인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만 하고 끝나서는 안 됩니다. 기도한 대로 내가 주님의 도구요 일꾼이 되어서 험난한 길이라 하더라도 가겠다는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나는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면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약에 바울을 보세요? 그가 은혜 받고 난 다음 마음에 고통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롬9:1절에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그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큰 근심이 되었고, 그 근심이 지나쳐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육체가 아픈 것을 고통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아픈 것을 슬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아픔이 지나쳐서 그것이 바울에게는 육체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자기 동족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 때문에 큰 근심이 되었고, 이 근심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나중에는 큰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큼 고통했느냐 하는 것은 3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는 말씀에서 저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인데,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리 없지만, 끊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형제, 나의 친척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열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 부르짖음이 있습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한 때 도움이라도 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이들은 바울에게 어떤 관계입니까? 바울이 피를 토하듯 끌어안고 기도하며 사랑했던 그들은 다름 아닌 바울을 배척했던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일생동안 자기 동족으로부터 쉬지 않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바울은 평생 동안 괴롭히고 해를 끼친 사람은 이방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 사람도, 태장을 때린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재판에 붙인 사람도 동족이요, 감옥에 가두어 놓은 것도 동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벌인 자도 동족이요, 사사건건 미움과 박해를 가한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어찌 이런 자들을 사랑할 수 있으며 기도할 수 있으며 자기의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생명을 바칠만큼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갈며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미워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핍박할수록, 견딜 수 없는 자리까지 고난에 빠뜨려도 오히려 바울은 자기 동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더욱더 간청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자리에 서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워해 달라고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그는 안타가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라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미약하나마 내가 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내가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내 가정을 사랑하여 기도했다면 어떻게 하면 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찾아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기도만 하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위선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처럼 위선적인 기도일 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셔서 66년 전에 우리 민족에게 해방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주셨습니다. 6.25전쟁으로 인해 공산국가가 될 위기에 빠졌을 때에도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 민족을 구해주셨습니다. 제2의 국치일이라고 말하던 IMF에서도 건져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한 우리 민족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느헤미야처럼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 민족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바로 이 민족의 희망둥이들입니다. 여러분, 느헤미야처럼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오늘의 어려움에서 해방의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우리 가정에, 직장이나 생업의 터전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느헤미야처럼 기도함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저는 믿습니다. 지금, 60년의 세월이 긴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통일을 위한 여러 장애 가운데 통일 비용도 만만치 않음을 압니다. 그리고 사상이 다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늘 북녘 땅에 동포들을 만나 보면 하나라는 진한 형제애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좀 더디드래도 힘이 들더라도 통일을 위한 기도가 멈춰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통일은 반드시 됩니다. 그러나 그 통일은 반드시 복음의 통일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시대에 8000만 내 동포들이 예수를 믿고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해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쓰임 받는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은 세계 앞에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진 나라입니다. 얼마 전에 간 아이티, 그 못사는 나라도 우리나라의 전쟁의 비참함을 외면하지 않고 그 당시 돈 800만 달러를 원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아 만큼 사는게 잿더미였던 우리나라가 이 정도 살게 된 게 누구 덕입니까? 원래 한국인은 머리가 좋고 뛰어나서 그런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일제의 지배는 받았나요? 6.25 때 참전한 16개국 UN 군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는 영영 서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의 은혜를 늘 기억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기억하는데 정작 도움 받은 우리가 잊어버리면 곤란합니다. 

워싱턴 D.C에 가면 한국전쟁 기념공원이 있죠. 거기 비석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겁니다. 잊지 말자는 겁니다. 터키 앙카라에 가면 한국공원이 있는데, 거기에도 ‘한국 참전 토이기 기념탑’이 있습니다. 전사자 명단이 죽 적혀 있어요. 6.25 때 전사한 한국 군인과 외국 군인이 수십만 명에 달합니다. 미군 전사자만 해도 5만 명이 넘습니다. 이건 인류 역사 상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한 나라를 위해 이렇게 여러 나라 군인들이 희생한 예는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한 마디로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중국에서 우리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재임 소식을 들었습니다. 반기문 총장의 연임을 추천하는 안보리 결의안이 192개 유엔 회원국 만장일치의 박수로 통과됐습니다. 어떻게 이 작은 나라가 세계 평화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세계 역사는 우연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와 유엔의 역사는 정말 뜻이 깊습니다. 이제 겸손하게 엎드려서 통일 한국을 꿈꾸고 세계 복음화를 위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을 만들기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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