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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대제사장 (히 7: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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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대제사장 (히 7:26-28)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우리에게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원래 우리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멸망당할 수밖에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사함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방인이었던 우리들도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사건은 우리들에게 더할 수 없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신 사건은 예배라는 관점에서 볼 때도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성전제사는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에 제사 드리러 나올 때 반드시 제물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제사에서 짐승 제물을 바쳤는데, 이 때 그 제물을 죽여 피 흘리게 했고 그것을 불태워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성전에서 제사 드린다는 일은 보통 힘이 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에 나올 때 짐승 제물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매번 성전에 나올 때마다 짐승 한 마리씩 끌고 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 드리는 과정에서도 그 짐승을 잡아야 했고 불태워야 했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고 번거로웠을까요? 

제사장들도 제사 때마다 제주인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제물을 잡고 또 제단에 바칠 수 있게 각을 떠야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제단을 정결하게 해야 했고, 또 제단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배드리러 나올 때 제물로 짐승을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배드리는 도중에 짐승의 피를 흘리게 한다든지 각을 떠서 제단에서 불사를 필요도 없습니다. 목회자들도 제사장처럼 짐승의 피를 뿌리거나 짐승의 각을 뜨거나 또 제단에서 짐승을 불태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약시대의 성전 제사를 끝내시고, 신약시대의 예배를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라는 관점에서 볼 때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우리에게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어떻게 하셨기에 구약에 제사가 신약의 예배로 바뀌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구약의 제사와 달리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우선 본문의 히브리서의 특성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 이야기를 기록한 의도를 아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주 독특한 관점에서 히브리서를 썼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서 보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구약은 신약의 성취를 대망하고 있고, 신약은 구약에 의해서만 사실 여부가 확인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구약과 신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신약과 연결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완성된 모습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본문이 다루고 있는 제사입니다. 구약의 제사제도가 신약의 예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고 완성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는 본질적으로 연결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전된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가 본질적으로 같은 점은 무엇일까요? 우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입니다. 제사나 예배는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제사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만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 역시 죄인들이기 때문에 섣불리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사제도를 만드셔서,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 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고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점은 신약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임을 천명했습니다. 히 10:25를 보면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신약시대에 제사가 예배로 바뀌었어도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사에 최선을 다한 것처럼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신약시대에도 예배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가장 직접적인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가장 중요한 장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시무하던 교회에 암으로 죽어가던 여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자신이 걸을 수 있는 한 교회에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말을 지켰습니다. 

어느 날 삶이 다해 가고 있던 그분이 여위고 허약해진 몸으로 천천히 예배당 안으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그분은 머리카락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고 얼굴빛은 매우 창백해 보였습니다. 남편이 산소마스크를 들고 그녀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맨 뒷자리에 조심스럽게 앉혔고, 그녀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손을 들라는 가사의 찬양을 부르는 동안 그녀는 야윈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고, 힘없이 떨리는 손이었지만 계속해 들고 있었고, 눈을 감고 약간의 미소를 띤 채 나지막하게 찬양을 불렀습니다. 

이 목사님 말씀이 그날 예배에는 두 개의 설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강대상에서 선포한 설교였고, 다른 하나는 맨 뒷자리에 앉았던 그 여 집사님이 몸으로 보여준 설교였습니다. 자신은 목사로서 예배 내내 그 여 집사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강렬한 메시지에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중단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예배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배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우선시하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복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복이 임한다는 것을 간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가 달라진 점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대제사장이 달라진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를 중보자로서 진행했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중보자로서 사역을 완성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인간 대제사장이 필요 없는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인간 대제사장의 중보사역을 통해 드린 구약의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신 후 우리가 드리는 신약의 예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첫째, 불완전한 제사와 완전한 예배

26-7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날마다 속죄 제사를 드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기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죄 값이 전가될까 두려워서 매일 속죄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자기들도 모르고 부주의한 가운데 저지른 죄 때문에 백성들에게 죄 값이 전가될까 두려워서 매일 속죄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제사 드리러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는 일에 제사의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아야 했습니다. 저들이 다 허물과 죄를 용서 받지 못한 채 주 앞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제사는 이렇게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혹시라도 제사를 집전하는 대제사장이 부지불식 간에 죄를 범했으면 그 제사는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사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사함 받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제사 자체를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은 늘 두려움과 떨림으로 제사에 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예배는 다릅니다. 신약의 예배를 여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날마다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이미 해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에 나와서 속죄하는 일에만 매달릴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예배는 더 이상 불안해하며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배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이 여기에 중요한 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롬 12:1을 보면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제 우리는 우리의 죄나 대제사장의 죄 때문에 짐승을 죽여 제물로 드릴 필요가 없어졌으니 대신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제물의 희생을 통한 속죄에 매달릴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대신 우리 자신이 산 제물이 되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예배에는 더 이상 짐승을 제물로 드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릴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을 죽여 그 피로 죄사함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산 제물을 드리라 한 것입니다.

공식적인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님의 어린 시절 일화입니다. 주일학교 예배 시간에 헌금시간이 되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헌금하는데 언더우드만은 헌금을 하지 않고 눈 감고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따로 불러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집이 너무 가난하여 헌금할 돈이 없어 대신 그 시간에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그러면 무슨 기도를 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내 몸과 생명과 내 일생을 바치겠다고 기도드려요."라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예배 때 자신을 다 드리던 언더우드는 결국 약속대로 자신의 일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쳤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완전한 예배는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자신의 온 마음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과 소유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 자체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저 회개에만 머무는 예배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 은혜 받으려고만 하는 예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의식적 예배와 영적 예배

본문 28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구약의 대제사장은 율법에 따라 정해진 대로 제사를 집행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레위기의 율법 규정은 정말 철저했습니다. 그리고 그 규례가 너무도 복잡했습니다. 제대로 지키기가 너무도 힘이 들었습니다.

몇 가지 내용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제사의 목적에 따라 제사 종류가 다섯 가지나 됐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입니다. 그리고 이 제사들은 저마다 구체적인 제사 규정이 다 다릅니다. 철저하게 그대로 드려야 했습니다. 

다음으로 제사 방법에 따라 제사 종류가 네 가지나 됐습니다. 화제, 요제, 거제, 그리고 전제입니다. 역시 이 제사들은 저마다 구체적인 제사 규정이 다 다릅니다. 철저하게 그대로 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율법대로 드리는 일에 철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마음은 온통 그 제사가 율법대로 드려졌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제사가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예배는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신 뒤에 달라진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모든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완결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예배에는 제물을 드리는 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물과 관련된 그 많은 율법 조항이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배 드려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친히 이 점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요 4:24을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는 구약의 제사와 달리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영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예배 안에서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소통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의 순서와 프로그램의 과정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영이 자유를 얻고, 우리의 영이 힘을 얻게 됩니다.

다음으로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예배 안에서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의 순서와 프로그램의 과정 속에서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게 됩니다. 그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그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게 됩니다. 그 말씀을 순종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배 안에 영적 사건이 일어나고,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이후 제사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물론 제사나 예배는 모두가 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귀하고 소중합니다. 우리가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사에 최선을 다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사가 아닌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몸을 산제물로 드리고자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주님께 드리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다음으로 영적인 예배를 드리고자 해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인 소통이 일어나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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