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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협력자들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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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협력자들 (막 2:1-12)

 “함께 모이면 시작할 수 있다. 함께 있으면 발전할 수 있다. 함께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 헨리포드의 말입니다. 개인끼리는 경쟁하지만 조직 안에서는 협력하는 정신, 작은 일은 경쟁해도 큰 일은 협력하는 정신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체는 약하지만 모이면 강해지는 공동체가 되려면 협력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떤 의미에서 경쟁자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누가 더 크냐고 서로 크기를 비교하다가 선생님께 꾸짖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둘이 서로 다른 개체가 아니라 둘이 “함께” “우리”가 되었을 때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의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둘은 하나보다 많고, 둘은 하나보다 강합니다. 혼자 못하는 일도 둘이 하면 됩니다. 
  
믿음은 산을 옮기는 능력입니다. 믿음이 협력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여기 믿음의 협력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앞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었습니다.


 󰊱 믿음은 목적을 위해 협력한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3절) 네 사람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메고 예수께로 왔습니다. 그 환자를 예수께로 데리고 가면 예수께서 고쳐주실 것이라는 하나된 믿음이 그들을 움직였습니다. 소용없는 짓이다. 쓸데없이 헛수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가면 예수님이 고쳐주신다는 믿음이 모여서 실행한 것입니다. 목적이 선명하면 가는 길이 선명해집니다. 중풍병자를 건강한 사람으로 고쳐주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믿음을 갖게 되면 정체성과 목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목적에 맞는 사람이 되려 합니다. 
  
“목적이 없는 사람은 키 없는 배와 같다. 한낱 떠돌이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사람이다”(토마스 칼라일)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에 끌려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의식에 끌려갑니다. 모세가 죄의식에 끌려 다녔다면 우리가 아는 모세는 없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그는 과거에 끌려 다니지 않았습니다. 목적이 그를 끌고 갑니다. 
  
그가 하나님을 모르고 믿음이 없을 때는 자기 성질을 억제하지 못하고 욱하는 울분으로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나서 변하여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바꾸는 전문가이십니다. 
  
목적은 사람을 단순하게 합니다. 목적이 수단을 신성하게 합니다. 사람이나 공동체나 목적을 가질 때 스스로 크게 됩니다. 영국 격언에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 하였습니다. 목적이 없다는 것은 사는 의미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목적은 모든 노력과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하기 때문에 효율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목적이 있고 초점이 맞춰지는 것만큼 강력한 삶은 없습니다. 광선을 렌즈로 받아 비춰주면 불이 납니다. 목적이 강력한 동기를 유발합니다. 거기서 열정이 생깁니다. 뚜렷한 목적만큼 힘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고, 예배하는 사람을 늘려 가는 것입니다. 불신자를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하신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을 위해 오신 일을 대신하는 것이 그의 몸된 교회가 할 일입니다.  
  
네 사람은 한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가는 것을 가치 있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 일이 힘드는 일이지만 꼭 해야할 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그 환자 한 사람을 메고 거기까지 갔습니다. 그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는 일을 보람 있는 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개인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협력하는 믿음을 더욱 눈여겨보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5절)


󰊲 믿음이 협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무엇이든지 하나로 뭉치면 커지고 강해집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바닷 속의 멸치나 고등어가 한 무리를 이루지 않으면 포식자의 밥이 되기 쉽습니다. 
  
겨울이면 서해안 천수만에 수천 수만 마리의 가창오리가 하늘이 안보이게 떼를 지어 나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창오리가 무리를 짓는 것은 포식자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시위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협력이 안 되면 믿음의 공동체는 위험에 직면합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습니다.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망합니다.
  
믿음이 협력하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네 사람이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 집까지 갔으나 그들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문 밖까지 사람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거기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거기까지 가서 포기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통념이나 금칙을 깼습니다. 지붕으로 올라가 남의 집 지붕을 뜯었습니다. 그들은 남의 집을 부수고 환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월마트 창업자 샘 월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규칙을 깨라! 강을 거슬러서 헤엄을 치라! 전통적인 지혜를 무시하라! 모든 사람이 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반대로 가면서 틈새시장을 공략할 기회를 찾으라!”
  
행동하는 조직은 성취원리를 알고 있습니다. 네 사람은 어떻게 해야 환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아는 것을 실천했습니다. 그것은 지붕을 뚫는 것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역사는 지식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초원의 제왕은 사자입니다. 사자가 제왕이 될 수 있는 것은 협력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커다란 물소를 공격하는 것은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인데 협력자와 함께 해냅니다. 작은 힘을 합하면 커지고 강해집니다. 사자 두 마리가 물소를 사냥하는데 성공하는 것은 협력작전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나홀로”와 “다같이”의 대결이 자기보다 속도가 빠른 사슴을 쓰러뜨립니다. 결속력이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교회는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생각이 달라도 협력해야 합니다. 여럿이지만 하나처럼 움직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마12:30)


󰊳 협력하는 조직은 하나같이 움직인다.

신뢰와 협력은 물리적인 힘을 넘어 서로의 지식을 나누어 더 큰 지식을 공유하게 됩니다. 세포가 짜여지듯이 그물망 같은 협력 체계를 갖추게 되면 하나같이 움직입니다. 
  
물고기나 새떼들의 협력은 본능적입니다.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걸 잘 압니다. 물고기나 새들의 협력은 “무리”이지만 사자는 다릅니다. 사자의 협력은 “조직” 입니다. 사자들은 계획이 있고 작전이 있습니다.
  
“무리” 와 “조직”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무리”란 냇가에 널려있는 돌들이라 한다면 “조직”은 돌을 자르고 깎아 성벽을 쌓는 재료로 쌓아둔 것과 같습니다.
  
돌무더기는 어느 정도 쌓으면 더 이상 쌓을 수 없습니다. 높이 쌓으면 무너지고 맙니다. 하지만 반듯하게 자르고 다음은 돌은 피라미드처럼 견고하게 얼마든지 쌓아 올릴 수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 머리가 둘 달린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이의 출생신고를 해야겠다는 두 사람인가 한 사람인가 구분이 안 되어 랍비에게 찾아가 물었습니다.
  
랍비는 부모에게 막대기로 한 쪽 머리를 때려 보라 한쪽 머리만 울면 둘이고 둘 다 울면 하나라고 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쪽 머리를 아프게 때렸는데 한 쪽 머리가 히죽히죽 웃는다면 하나가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인지 아닌지의 증상은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누구는 뛰는데 누구는 잔다면 하나가 아닙니다. 사사기에는 전쟁에 참여한 자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해야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냥꾼은 사냥을 잘해야 하고, 씨름선수는 씨름을 잘해야 합니다. 신자는 전도를 잘해야 합니다.  
술은 권하는 맛으로 먹는다고 합니다. 못 먹는다 해도 조금 맛만 보라며 정말 조금 따라줍니다. 하도 권하니까 맛을 봅니다. 찡그리며 먹어봅니다. 짜릿한게 나름대로 맛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하고 아주 조금 더 줍니다. 그러다 보면 술을 배우게 됩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 하듯이 나중배운 사람이 술을 더 좋아합니다. 나중 믿은 사람이 먼저 믿는 사람을 앞서가게 됩니다. 
  
전도는 강권하는 것입니다. 싫다는 술을 먹이듯이 강권합니다. 금연 협회에서 발표된 금연 성과는, 자발적으로 하는 것보다 보상을 하는 것이 성과가 많고, 보상하는 것보다 강제적으로 하는 것이 효과가 더 컸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강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
  
강권이란 상대방의 의사에 아랑곳하지 않고 간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시계수리공이 군대에 가면서도 시계를 수리 할 수 있는 간단한 도구를 가지고 갔습니다. 틈틈이 시계를 수리해주고 용돈을 벌었습니다. 나중에는 군인인지 시계수리공인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라고 하니까 수리할 시계가 열 개나 밀려서 못 간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군인임을 망각한 것입니다. 
  
이제 전도를 위해 총출동해야 합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출전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협력자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우리가 협력하여 예수님 앞에 나오게된 사람에게 예수께서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고후5:14)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하심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며 전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가 믿음으로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동일한 믿음의 DNA를 가지고 행동하는 Activity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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