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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른 씨 (창 4: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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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씨 (창 4:16-26) 
 
 
오늘은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가인은 죄벌을 받을 때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과 죽음의 공포가 자신의 삶에 닥친 큰 재앙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14). 하지만 가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재앙은 스스로 만들어냈습니다. 죽임을 면케 하시겠다는 보호를 약속을 붙들기 보다는 오히려 “여호와의 앞을 떠나”(16a)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두지 않은 것이 아담과 다릅니다. 여호와의 앞을 떠남으로써 가인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과 무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호와 앞을 떠난다는 것은 영원한 저주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가인은 하나님의 판결이 영 못마땅했습니다. 가인처럼 죄인들도 하나님의 판단을 못마땅해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의 말씀에 대해 ‘그래도 나는 싫다’고 말하며, 천국에 대한 약속조차도 ‘너나 잘 믿으세요’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을 떠난 삶을 오히려 ‘자유로운 삶’으로 여기며, 그 삶을 진심으로 좋게 여깁니다. 가인의 선택은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가인도 그 후의 죄인도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날에 결코 핑계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앞을 떠난 가인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면서 아내와 동침했고 “에녹”을 낳습니다. “성”을 쌓고 성에 아들 이름을 붙였습니다(16b-17). 갑자기 가인의 아내가 등장하는데 구속사 서술에 필요한 인물들만 선택적으로 기록하는 성경의 특성을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을 떠난 가인의 삶은 유별나지 않습니다. 엄청난 재앙이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지금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삶을 살다 죽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가인이 거주했던 “에덴 동편”에서 가인의 육대손인 “라멕”과 그의 세 아들들에 의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 문화가 만개하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을 떠난 자들이 반드시 이 땅에서 비참한 삶을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18)는 말씀처럼 대부분은 자식을 낳고 평범하게 살다 죽습니다. 오히려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잠 24:19)는 말씀은 행악자가 이 세상에서 더 잘되기도 함을 함의합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고 더욱 담대히 죄를 짓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라멕”과 같은 사람이지요.

라멕은 두 아내들을 취했습니다. 하나님이 절대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아담과 하와를 통해 보이셨던 일부일처 형태의 가정을 유지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마음에 원하고 능력이 되면 자기를 위해 얼마든지 취할 수 있었습니다. 라멕의 아들 중 “야발”은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가 되었습니다(20-22). 의식주에 변화가 생기고 각종 악기들이 만들어지고 최첨단 무기들이 생산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 의해 눈부신 문화의 진보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인류 문화 발전이 유토피아를 가져오지는 않았습니다. 라멕의 노래 혹은 시는 인류 최초의 예술문화 혹은 문학작품인 셈인데, 인간성 파괴 현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23-24). 표면적으로는 위대한 인간에 대한 찬양이지만 심층적으로는 인간의 외설스러움과 폭력을 미화하며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조롱하는 내용이 녹아 있습니다.

라멕이 이 노래를 부를 때, 유발의 수금과 퉁소가 반주로 사용되었을 법합니다. 또 사람을 죽일 때 두발가인이 만든 날카로운 기계를 사용했겠지요. “라멕”(레메크, &m,l,)이라는 단어 자체가 ‘강한 자’를 뜻하는데 그들의 문화는 강한 남성이 “아다”(꾸미다)와 “씰라”(딸랑거리다) 같은 여인들을 차지하고, 여인들은 터프함을 넘어서 강포한 남성에게 매력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약한 자들은 강한 자에게 심각할 정도로 부당하게 짓눌렸음도 추정할 수 있지요. 가인은 죄를 숨기고 뻔뻔한 태도를 보였으나, 라멕은 예술과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죄를 드러내어 노래하며 자랑했습니다. 일종의 ‘열린 시궁창 문화’인 셈입니다.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죄를 즐거워하는 라멕의 모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답과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가인 계열들은 성읍을 건축하고, 이동식 장막과 가축들로 교역을 하고, 악기들을 만들고, 기술 과학을 발전시키고, 문학과 예술을 진보하게 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으로부터는 철저히 퇴보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이 땅의 삶에서는 훨씬 열정적인 경우가 많지만, 열심히 사는 것이 곧 최선의 삶은 아니라는 진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가인 후손들은 마치 열심히 절벽을 향해 뛰어가는 것 같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을 설명하던 성경은 이제 “다른 씨”인 셋 계열을 설명합니다. 아벨이 죽고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버렸을 때 아담과 하와는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식을 낳고 키운다는 것 자체가 두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여인의 후손에 대한 소망보다 ‘죄인이 된 이제도 생육하고 번성함이 과연 복인가?’라는 회의가 더 컸겠지요. 그래서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25)라는 말에서 그들의 지독히도 아팠던 상처의 치유를 보게 됩니다. 5장 3절을 보면 이 때 아담의 나이가 약 130세였는데,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라는 고백 속에서 여인의 후손에 대한 소망도 다시 회복했음을 보게 됩니다.

“셋”이라는 이름은 ‘놓였다’는 뜻입니다. 아마 아벨 자리에 대신 놓였다는 의미겠지요. 셋은 삶은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저 “에노스”라는 아들을 낳은 것만 기록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가인의 5대 후손까지의 삶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언급됩니다(눅 3:38). 셋의 삶이 아무리 평범했어도 가인과는 달리 하나님과 관련 있는 삶이었습니다. 아벨이 의인으로서 죽임당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다면, 셋은 절망 속에서도 새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셋을 통해 다시 소망을 가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통해 절망 속에서 다시 소망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에노스”와 관련해서는 그의 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6)라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 특별한 일이라 생각해서 기록했을 텐데 설명이 참 소박합니다. 4장 1절을 보면 하와가 가인을 낳을 때 개인적으로는 이미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에노스 때는 사람들이 공예배로 모여서 함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의미였든, 셋의 계열과 관련해서는 사람이 이룬 문화적 다양함이나 화려함이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여호와와 관련해서만 소개됩니다. 하나님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셋 계열의 사람들이 가진 삶의 특징이었습니다.

가인의 살인은 한 가정에서 일어난 개인의 사건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치열한 대립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많은 민족들과 많은 국가들이 있을지라도 언약을 기준으로 나누면 언약과 관련된 후손과 언약과 무관한 후손이 있으며, 둘 사이에 치열한 대립은 여전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두 후손들 대부분이 이 땅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언약과 무관한 가인의 후손들과 언약의 후손들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 중심의 문화로 기술되는 후손과 하나님을 중심으로 기술되는 후손의 차이지요. 평범하게 사느냐 탁월하게 사느냐보다 어느 계열에 속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고백록』에서 그의 젊은 시절에 훔친 물건을 즐기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어도 훔쳤는데, 그 까닭은 훔치는 일 자체를 즐거워했기 때문이라 고백했습니다. 어거스틴도 회개하기 전에는 죄 자체를 즐기는 라멕 계열에 속했습니다. 죄인들에게 자유로운 선택권을 주면 어거스틴 같은 인물도 가인처럼 “에덴 동편” 문화를 선택합니다. 타락한 본성은 에덴 동편의 문화를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에덴 동편의 문화가 강력하다 할지라도 언제나 역사 속에는 셋의 계열처럼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재산 몰수와 순교까지 각오해야 했던 초대교회의 핍박 속에서도, 교회가 송두리째 배교했던 중세교회의 부패와 타락 속에서도, 로마 가톨릭과 급진들 사이에 치열한 싸움을 해야만 했던 종교개혁 시대에도,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며 살았던 근대 시대에도, 두 차례 세계 대전을 겪고 이성의 종말을 맛본 후 절대 진리를 포기해버린 포스터모던 시대에도, 아다와 씰라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처럼,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지요.

창세기의 첫 번째 톨레도트(2:4-4:26)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언약을 주시고 셋의 계열을 통해 성취해 가심을 내용으로 하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로 끝납니다. ‘언약’이 역사를 통해 성취되어가는 이 과정을 ‘구속사’라 하며 그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내용이지요. 

오늘 말씀은 소박하지만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음 자체가 참으로 은혜임을 생각게 합니다. 에덴 동편의 삶을 사모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즐거워하는 삶을 늘 사모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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