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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으면 이깁니다 (창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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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으면 이깁니다 (창 15:1-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시험에 든 적이 있었습니다. '큰 아버지'라는 의미를 가진 아브람에서 '열국의 아비'라는 의미를 가진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은 17장 5절부터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아직 아브라함으로 바뀌기 전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볼수록 우리 각자의 인생 여정에서 실제로 느끼고 아파하고 고민하는 내용들이 아브라함의 삶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의 실현이 지체가 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기다리다 지쳐서 낙심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찾아와 어떻게 그를 회복시키시는지 살펴보면서 기근도 만나고, 위기도 당하고, 실망도 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분을 의지함으로 회복을 경험하시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을 가지고 살며 주 안에서 승리를 맛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1~11장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려고 몸부림치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인 인간의 생명까지도 경시하거나 자기들 마음대로 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단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이 되는 죄악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죄악이 줄어들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더 확장됨으로 마침내 온 세상이 연합하여 하나님께 반기를 드는 바벨탑 사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도리어 그 악을 더하게 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회복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서 있는 사람들이 존재할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런 사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서지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곳에서 하나님은 또 한 사람을 불러내십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부름 받은 것은 그가 완벽한 믿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그를 붙드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아브라함은 마침내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렇게 빚어져 가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브람을 찾아오십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그돌라오멜의 동맹군과 더불어 싸워 이기고 나서 아브라함은 수많은 전리품들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소돔 왕은 아브람을 영접하면서 전리품은 다 가지라는 제안을 하지만 아브람은 거절합니다. 가나안 지방에서 아주 부자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마다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실 복이 그돌라오멜에게 쟁취한 전리품보다 더 귀하고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는 매사에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고 조금만 일에도 섭섭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 후에'란 믿음으로 위기에 도전하고 믿음으로 물질의 유혹을 이겨냈던 몇 년 후입니다. 아브라함이 낙심하여 방황하던 때에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믿음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에서 시작되고, 또 견고하게 됩니다.   

큰 민족, 창대한 이름, 복의 근원, 모든 민족이 아브람을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창세기 12:2-3절의 약속은 단 한 가지 조건이 만족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자손.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자식이 생기지 않자 아브람이 초조해집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에게 그러한 약속을 했을까,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도중에 계획을 바꾸신 것은 아닐까, 공연히 고향을 떠나 이민 온 것은 아닌가?' 별의 별 생각이 다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니 현재 누리고 있는 삶이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고, 그 동안 쌓아온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두려움이 아브라함을 엄습합니다. 남부럽지 않은 부귀와 명예를 가지게 되었지만 아브람은 지금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생각했던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은데 대한 낙심, 무엇을 할 것인지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는 방황, 믿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 기도의 응답이 더디 오는데서 오는 안타까움 등등이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런 문제들로 눌리다 보면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인하여 감사하지 못하고,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인하여 자신은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 찾아오신 그 하나님이 오늘도 저희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찾아오십니다. 설교를 통하여,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가, 성경 공부를 통하여, 성도의 교제를 하다가 찾아오십니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이 잡히는 것이 없는 것 같아도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아브라함을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첫마디가 무엇입니까?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단순히 심리적인 위로를 넘어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시기 때문 

방패라는 말은 하나님이 보호자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탐을 갔던 열 사람이 가나안은 크고 강한 성읍이요 그곳 사람에 비하면 우리들은 메뚜기 같다고 보고하니 이 말을 들은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4:9).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보호자임을 믿지 못하며 두려워 떨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 군대와 싸우기는 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도와 이기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웠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다윗을 도와 이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시기에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싸우시며 이기게 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 상급이 되시기 때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이 믿는 자의 상급이 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세상의 금은, 우양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풍성함에 참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런 믿음을 가졌기에 수많은 전리품을 주겠다는 소돔 왕의 제안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상급을 항상 바라보며, 또한 주실 것을 믿고 늘 사모하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딤후 4: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만이 진정으로 복 받은 자가 됩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입니다. 환경을 넘어서 방패가 되시고 상급이 되시는 주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빚어가십니다 

기근을 피하여 하나님께 묻지 않고 애굽을 갔던 아브람입니다. 믿음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귀한 교훈을 배웠지만 낙심하며 믿음을 잃게 되니 다시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이 얼핏 보면 하나님의 방법보다 더 호소력이 있고 더 효과적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나는 너의 상급’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평을 토로합니다.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만 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저는 아직 아들 하나도 없는데요. 아브람은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며 하나님보다 더 똑똑한 척 합니다. “나는 자식이 없습니다. 나의 상속자는 엘리에셀입니다.” 

아브람은 자식을 갖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실 때 자식의 복을 약속해 주셨기에 그 약속이 실현될 날을 기다려 왔는데 자기와 사라는 이미 늙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양자라도 하나 데려와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시 중근동 지방의 풍습을 보면 아들이 없을 때 청년을 입양하여 그에게 유산을 물려줍니다. 입양되는 사람은 주인이 잘 알고 신뢰할 수 있는 하인들 중에서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주여 내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아브람이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시니 그냥 우리 집에서 일하던 자를 나의 상속자로 삼겠습니다. 나도 이제는 지쳤어요. 더 이상 못 기다리겠어요. 내가 언제까지 이 문제로 인하여 마음 고생해야 합니까? 아브람의 안타까운 절규입니다. 

아브람의 모습이 어쩌면 이렇게도 우리의 모습과 같은지요?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안타까움 속에 짜증을 내고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했으면 믿음으로 끝장을 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복을 바라면서도 그 과정은 자기 방법대로 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면서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조정해야 하는데 도리어 하나님의 뜻이 바뀌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런 열심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통로를 막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 하는 아브라함이 불신앙적인 말을 할 때 그를 책망하거나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아브람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자식이 없음을 인하여 안타까워하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너의 상속자가 아니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아브라함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은 자비로우시면서도 단호합니다. 한편으로는 아브람의 제안을 확실히 거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서 생긴 자식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갈 자라는 것을 재확인합니다. 막 결혼한 젊은 부부가 아이를 가지는 것은 믿음이 별로 없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이가 많아 자식을 낳을 가능성이 희박한 노부부를 통하여 당신의 약속을 이루겠다고 하시겠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늙기까지 약속을 미루신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더 큰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가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사달라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의 손을 붙들고 밖으로 나가는 아빠처럼 하나님은 마음이 불편한 아브라함을 데리고 조용히 밖으로 나가십니다. 아브라함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겠습니까?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을 바라보고 말없이 걸어 나갔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라”(Look up at the heavens)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공해가 없던 시절 얼마나 많은 별들이 보였겠습니까? 수많은 별들이 영롱하게 빛나며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이 보였을 것입니다. “별들을 세어보아라 (Count the stars)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는 동안 자식이 없음으로 인하여 가졌던 안타까움이 사라집니다. 

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늘을 보고 별을 세라 하셨겠습니까? 믿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현실과 환경을 보면 절망하고 좌절하지만, 자신의 내면 세계를 보면 자신이 없어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그곳에는 비전과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과 사라의 나이가 많지만 그의 자손을 별처럼 많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물론 믿음이 생긴다고 갑자기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회복했다고 아이가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아브라함은 일 년을 기다려야 할지 십 년을 기다려야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을 회복하고 나니 상황을 보는 눈,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는 힘을 다시 얻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깁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를 얻습니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킴으로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랑하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를 얻었습니까? 율법이 아브라함 때에는 아직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성경에서 믿는다는 말이 처음 나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즉 아브람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의’로 번역된 히브리어 체다카는 인간 행위의 궁극적인 표준이 되는 의로움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 '의'는 우리의 행위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표준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고 약속하셨을 때 비록 자손이 한 명도 없었고, 아브람 자신도 늙고 사래도 경수가 끊어진 상태였지만 그 약속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기에 하나님은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전까지 아브람은 믿는 자가 되어져 가는 초보 과정에 있었으나, 이제 아브람은 믿음으로 약속의 참여자가 되었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사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고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문제를 주시고 해답까지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떨어뜨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알게 하시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의지할 때 하나님의 풍성한 복이 임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듯이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듯이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된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믿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믿습니다. 

‘자손’이란 말은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인 이스라엘 자손을 의미할 뿐 아니라 영적인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자손인 지라 주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할 때에 우리는 아브라함에 약속하신 복을 얻게 됩니다.   

나의 처한 형편을 보면서 지금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열등감, 좌절감,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내게 주신 아홉을 인하여 감사하기보다 내 뜻대로 이루지 못한 하나를 인하여 안타까워하지 않습니까? 문제만 바라보며 거기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믿지 않고 의심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막 5:36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심한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믿음을 촉구하셨습니다. 믿음을 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는 믿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치 않는 믿음, 하나님의 때와 그의 응답을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를 둘러싼 의심, 불안, 염려의 안개가 사라지게 됩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히 12:2)볼 때 우리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됩니다.     

본문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합니까? 

1) 믿음으로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가장 필요로 할 때에 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믿었을 때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며' 또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롬 4:20)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의 의지와 상식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긴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람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 하셨지만 실제로 그가 자손의 복을 받은 것은 십 수 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신에게 약속된 복 역시 분명하고 확실하지만 믿음의 시험을 참고 견딘 후에 이루어지므로 어떠한 환란과 고통이 닥친다 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험난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유일한 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기십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이후에도 아브라함이 때때로 불신앙적인 태도를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약속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주변 환경으로 인하여 믿음이 연약해져서 두려움과 의식에 흔들리기도 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약속하시고 또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약속 성취의 결정적 요인이 인간의 믿음이기보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함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약속에 내포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믿는 믿음은 선행과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모든 노력과 속박에서부터 참된 자유를 가져옵니다. 우리도 주님이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과 용서를 믿지만, 날마다 행하는 믿음의 여정에 불확실한 일들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들 때문에 흔들리게 되고 그릇된 선택을 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자기의 부족함과 한계와 죄악됨을 인정하고 정직하게 대면할 때 하나님은 믿음의 진보를 통하여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요구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분이십니다. 

어떤 때는 약속의 말씀으로, 어떤 때는 예배와 같은 의식을 통하여, 어떤 때는 환경을 통하여 약한 믿음을 세워주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 눈높이로 연약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만나주십니다. 아브람은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경험하게 되면서 점점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3)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졌더라도 현실은 여전히 초라하거나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믿음의 눈을 떠 하나님의 비전을 갖고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사람은 현실에 파묻히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창세기 13:18절을 보면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예배를 드리면서 믿음이 더욱 살아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상황이 변하고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믿음은 당대로 그치지 않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이 자식들에게 전수됩니다. 아버지가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을 본 자식들도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 

창세기 26:25절에는 이삭이 브엘세바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창세기 35:7절을 보면 이삭의 아들 야곱도 벧엘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성도들은 예배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감사와 찬송을 돌리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 택하신 자들에게 기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즈음은 참으로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만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40년을 산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홍해 앞에서 마른 땅으로 건넌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건너게 하신 땅이 젖은 땅과 진흙땅이 아니라 마른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이것이 복을 받는 비결이요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믿음은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며 새로운 마음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소유하게 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눈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조차 확실히 가능한 것으로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표현하게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의롭게 해주십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을 완전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때와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1:10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아는 사람은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별을 세어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던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믿음으로 여리고성을 점령하고 가나안 땅을 점령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임마누엘의 주님과 동행하면서 두려워하기보다 도리어 믿음에 견고하여 그분의 기쁘신 뜻을 이루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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