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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마무리 (렘 4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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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렘 44:20-20)

리더십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이 리더에게 주신 potential, 즉 역량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제대로 거두었는지 그 정도에 따라 finish well, finish bad, 그리고 finish so so로 구분합니다. 이를테면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선진들의 이름이 열거됩니다. 아담은 인류의 시조이며 에덴동산 최초의 거주자이며 960세까지 살았는데 그의 이름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지 않습니다. 

므두셀라는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산 사람입니다. 무려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기네스북에 당연히 이름이 오를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도 없습니다. 

사울은 어떠합니까? 그는 이스라엘 통일 왕국의 초대 왕입니다. 성령이 감동 되어 방언을 한 적도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전쟁에 계속 이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도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인물들인데 믿음 장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무리 오래 살고,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랐다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우름다운 마무리를 짓지 못했기에 그들의 이름이 믿음 장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에녹은 어떠합니까? 그는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믿음을 가졌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에녹은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뜻을 구하며 그의 뜻대로 살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기에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요셉은 어떠합니까? 창 39:2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요셉은 현실을 탓하거나 형들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과 더불어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성실하게 살았더니 마침내 애굽에서 2인자인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7년 풍년 동안에 거둔 양식을 가지고 칠년 기근에 시달리던 천하 백성들에게 양식을 공급하며 그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천하 만민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 요셉에게 실현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어떻습니까? 모세 밑에서 지도자 수업을 잘 받고 광야 제2세대와 더불어 모세도 하지 못했던 가나안 정복을 믿음으로 이룰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도 사사 시대에서 왕국 시대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 사사의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왕국 시대의 문을 열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주신 사명 잘 감당하며 finish well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신약 시대에도 아름다운 마무리를 지은 선진들이 많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어떠할까요? 그들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잘 사용하며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 예루살렘 초대 교회를 든든히 세웠습니다. 한

때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로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수많은 교회를 세웠고 그가 쓴 편지는 성경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비록 순교를 당했지만 그들이 남긴 자취는 아직까지도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떠할까요? 요즈음 표현을 빈다면 모세는 finish well 하기에 2%가 부족하다 하겠습니다. 왜 그럴까요? 모세는 물론 위대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출애굽의 위업을 이룬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이 있다면 모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물을 달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반석을 향하여 외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분노하면서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쳤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그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바라만 보고 죽었습니다.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린다는 말이 있는데 만약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혈기를 부리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에 들어갔겠죠. 모세는 끝맺음의 관점에서 볼 때 almost finish well이라 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finish well한 가장 본이 되는 분이 누구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3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를 사셨지만 불꽃 같이 그의 몸을 불사르며 우리 죄를 대신 십자가에서 지시며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 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potential을 제대로 사용하시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지으셨기에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빌 2:10-11)습니다. 제가 일부러 언급은 안했는데 다윗은 어떨까요? 목장에서 한 번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애굽에 있는 유다 백성들은 여전히 죄에서 떠날 줄을 모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예레미야를 다루었습니다. 특히 44장은 지난 40여 년 동안의 예레미야 사역을 마감하는 장이기에 더욱 뜻 깊다 하겠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멸망 직전까지 유다 백성들에게 바벨론에게 항복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에는 바벨론의 통치 아래서도 유다 땅을 떠나지 말고 거기에 남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선포하는 내용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유다 백성이 저지른 죄악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우상숭배와 불순종. 하나님은 그들의 패역한 행위를 친히 살펴보셨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으셨기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철저하게 심판하셨습니다. ‘전철을 밟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와 황무지가 되고 저주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유다 백성은 도무지 바뀔 줄 모릅니다. 요하난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바벨론을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도망하려 했습니다. 이미 심중에는 애굽으로 가려고 결정해 놓고 예레미야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든지 자기들은 따르겠다고 합니다. 열흘 후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지 말고 유다 땅에 머물면 하나님께서 그 남은 자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은 자기들이 기대했던 대답이 아님을 알자 태도가 돌변합니다. 예레미야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말하며, 자기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려는 계략이라고 우깁니다. 결국 자기 고집대로 애굽 땅으로 들어갑니다.

예레미야는 여전히 선지자의 사명에 충실합니다.

이전에도 말씀 드렸던 것처럼 예레미야서는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대 백성들이 칼과 기근과 전염병 가운데 죽어 가는 것을 직접 보고 느끼며 예레미야 자신이 감옥에 던져지고 각종 위협과 박해를 받는 급박한 상황에서 쓰였기 때문입니다. 

45장부터 51장까지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은 여호야김 4년인 주전 605년에 일어난 일이며, 52장의 바벨론의 패망에 대한 예언도 시드기야 4년 즉 주전 594년에 한 것입니다. 

따라서 44장은 예레미야의 마지막 설교를 담고 있습니다. 죄를 끝내 회개하지 않는 유다 백성들과 그들이 애굽에서 여전히 우상 숭배하겠다는 주장을 들으면서 최후의 정죄를 선포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시 언급합니다.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애굽에 거주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도 조상들과 같은 죄를 범하고 있기에 그들에게도 예루살렘에 행하였던 하나님의 심판이 그대로 임할 것을 선포합니다. 

예레미야의 설교를 들은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하늘의 여왕'(The Queen of Heaven)을 섬길 때에는 식량을 풍족하게 얻었고 재앙을 겪지 않고 복을 누리며 살았지만 하늘의 여왕에게 예배하는 것을 멈춘 후에는 궁핍과 칼과 기근으로 인한 멸망을 당했다고 억지 주장을 폅니다. 얼마나 엉뚱한 결론을 내립니까? 마귀의 역사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제대로 분별할 줄을 모릅니다. 유다 백성들의 눈이 가리어졌습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유다가 멸망하게 된 것이 하늘의 여왕을 섬기는 것을 중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며 여호와께 죄를 범한 것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의 대상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애굽에 머물면서 가증한 우상숭배의 행위를 다짐하는 모든 백성과 그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여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들이 서원한 대로 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유다 백성들에게 진정한 안전과 번영을 가져다주는지 여호와 하나님인지 하늘의 여왕인지 시험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애굽에 있는 유다 백성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애굽에서 유다 백성의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이 되지 않으실 것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고, 애굽에 있는 모든 유다 백성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뜻도 됩니다. 어떤 의미를 갖든지 하나님이 자신의 선언에 대하여 그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시며 유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가 결연함을 드러냅니다. 

둘째, 하나님은 애굽에 머물고 있는 유다 백성에게 확실한 재난을 내림으로, 그들은 생명 얻기를 원했던 애굽 땅에서 멸절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유다로 돌아올 것이며, 돌아온 사람들이 애굽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셋째, 유다 백성이 의지하고 있는 애굽 왕 바로 호브라가 원수들의 손에 넘겨지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표징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호브라는 유다 왕 시드기야와 동맹관계를 맺고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포위공격을 당하고 있을 때 군대를 파병한 인물입니다. 

또한 호브라는 유다 백성이 애굽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애굽에 머물고 있는 유다 백성에게 그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유다 왕 시드기야를 느부갓네살 왕에게 넘겨주신 것처럼 유다 백성이 의지하는 애굽 왕 호브라가 원수의 손에 넘겨서 죽임을 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심판을 강력하게 외치고 나서 예레미야는 사라집니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많은 전승이 내려옵니다. 다밧에서 죽었다고도 하고, 모세가 갔던 산으로 가서 동굴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갔다고도 하고, 

에녹과 엘리야와 함께 있어 메시야가 오기 전에 돌아올 것이라고도 했고 심지어 예레미야와 바룩은 오늘날 아일랜드에 도착했다고도 하지만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레미야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 즉 말씀을 신실하게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명을 다한 모습으로 끝까지 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보여줍니다. 한 개인의 생애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어떻게 충실하게 수행하는 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 예레미야와 같이 아름다운 마무리를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또한 악한 자들을 벌하시는 심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기 때문에 장차 무슨 일들이 일어날 지 다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우상숭배와 불순종의 길을 가면 죽는다고 거듭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의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유다 한 나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통치는 우주적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도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유다 백성이 아무리 완강하게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유다 백성들이 애굽으로 간다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습니까?

생명의 자리와 사망의 자리의 차이는 육체적으로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참된 안전과 평안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하시지 않는가에 달려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이 듣기 원하는 평안의 메시지가 아닌 심판의 메시지를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심판을 지나야만 진정한 회복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이 담긴 말씀을 듣고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불순종하였고 더 나아가 하늘 여왕을 섬기며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망각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복 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타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만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보다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들은 마귀에 사로잡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나름대로 옳다고 한 행동이 결국은 그들을 망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사십년을 지나면서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보다 똑똑하시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또 망각하였습니다. 하나님 없이 잘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려다 또 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2-3) 

역사는 반복됩니다. 혹시 오늘 우리에게도 유다 백성과 같은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뒷전이요 내가 나의 삶에 주인이 되어 스스로 행복해지려고 애쓰는 교만한 모습은 없습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소리를 들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그랬습니다. 그래야 아름다운 경주를 할 수 있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믿음의 경주자. 나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명자라는 분명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전하기 원하는 메시지만 전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그리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주신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신실하게 전했던 예레미야의 모습은 사명자로서 살아가야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특히 말씀 앞에 불순종한 유대인들에게 애굽까지 따라가서 하나님의 뜻을 끈질기게 전했습니다.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아무리 완강하고 교만하게 거절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과, 그 뜻에 거역하고 대항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애굽에서 보여준 사역은 길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백성들의 적대적인 반응에도 예레미야는 포기하지 않고 편한 말과 위로의 말보다 시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기를 끝없이 요청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세운 목표를 이루려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일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자 다른 사명과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어려움을 인하여 좌절하거나 낙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명자를 기억하시고 인도하시고 그 미래를 책임지십니다. 

45장에 나오는 바룩이 그렇지 않습니까?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탄식을 아시고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유다 백성들은 망하지만 진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바룩의 생명을 보존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따라서 사명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는 순종이 요구됩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바벨론에 의한 하나님의 심판이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예레미야 때보다 더 악하면 악했지 결코 낫지 않은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어떤 심판이 다가옵니까? 노아 때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였으나 이 세상 마지막 때는 불로 심판합니다. 

말세를 사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베드로 후서 3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3:12-14) 

그리스도인은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베드로는 권면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나선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하는 자들을 우습게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레미야의 심정을 가지고 이웃을 위하여 중보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도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주신 사명이 무엇이든지 성실하게 그리고 끝까지 감당할 때 우리는 주님 앞에 점도 없이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하늘 보좌 앞에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신지, 나는 누구인지 바로 깨달으며 주신 사명을 끝까지, 그리고 성실하게 감당하면서 주님께 보여드릴 열매가 많은 복 있는 사람들, 아름다운 마무리를 짓는 복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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