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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망의 몸에서 건져주신 예수님 (롬 7: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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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의 몸에서 건져주신 예수님 (롬 7:15-25)
   
우리 안에는 두 얼굴이 아니라, 천의 얼굴을 가진 ‘나’라고 하는 사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 나를 잘 봐주고, 나를 알아주고, 나를 위해 보호막을 잘 치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곱게 화장도 합니다.  
우리 안에는 선을 행하는 자아가 살고 있으며, 악을 행하는 자아도 공존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은 함께 공존하기 어렵기에 서로 싸우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고, 마음은 전쟁터가 되고 있습니다.   나라는 사람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더 성숙한 사람으로 살지 못하여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인생이란 바로 나 때문에, 내가 곤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자아성찰, 자기 점검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말씀의 자리에 벗어났다면, 좌표를 바르게 설정하시고, 수정도 하고, 있어야 할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헨리나우엔 박사가 예일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페루의 빈민가에서 함께 살았고, 하버드대학의 교수로 돌아와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며 강의하던 중에 장애인 공동체 데이브레이크에 마지막 생애를 섬김의 삶으로 보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합니다.   

“그동안 오르막길만 올라갔습니다.  이제는 내리막 인생길을 걷고 싶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 영혼의 선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고 싶어서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1996년 9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장애우들의 친구로 살았습니다.  캐나다의 데이브레이크 공동체 가면 조그맣고 초라한 벤치가 있습니다.  나우엔 박사가 즐겨 앉던 벤치로 알려졌습니다.  그 벤치는 나우엔이 하나님과 만나는 비밀의 장소였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자리였다고 합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을 바르게 가는 길인가? 우리는 해답을 얻어야 하고 마지막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세상 만물을 다 꿰뚫고 모든 이치를 알아도 먼저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헬라 철학의 대가 탈레스에게 물었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에 탈레스는 “자신을 아는 일”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 “가장 쉬운 일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솔직해진다고 하면, 우리 모두가 보잘것없는 인간이요, 부족한 죄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상한 척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너무 늦게야 찾아오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시간입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작가 스티븐슨이 쓴「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한 동리에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 이름은 너무나 유명한 지킬박사였습니다.  사랑이 많고 동정심도 많고 인자하고 과부와 고아를 돌보고 사회 많은 공헌을 하였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성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동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밤이면 ‘하이드’라는 흉악범이 설치고 다닙니다.  강간, 살인, 방화, 강도짓을 합니다. 그래서 동리 사람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동리 사람들이 모여서 결심을 하고 이 하이드를 잡기로 작정했습니다.   어느 날 밤에 보안관의 총성이 들리고 하이드를 잡았다는 소문이 나자 동리 사람들이 하이드를 구경하기 위해서 다 와서 그 가면을 벗겨 보니까 너무나 깜짝 놀라게 그가 바로 지킬박사였습니다.   그렇게도 낮에는 착하고 성자다운 지킬박사가 밤에는 흉악한 하이드 라는 범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작가 스티븐슨 이 소설을 통해서 인간의 실상, 인간의 이중적인 실존을 파헤쳤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밖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선하고 착한 사람 같지만 속에는 모두 다 범죄 할 수 있는 하이드가 숨어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중인격자입니다.  위선자들입니다.  지킬박사가 있는가 하면 하이드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지킬박사가 이길 때는 훌륭한 성자로 보이고 하이드가 이길 때는 악한 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영과 육의 싸움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나를 두고 두 자아가 싸우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새번역으로 읽어봅니다.  15절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19절에서 같은 내용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고민은 아무나 하는 고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사람만이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가면서 자신을 방임하고 맡겨버리는 사람은 고민도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철저한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율법을 모를 때에는 내가 살아서 율법을 다 지킨다고 큰소리치면서 살아있었는데, 율법이 무엇인지를 알고 보니 자신은 죽고 죄는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율법대로 살아가려고 힘쓰던 분들은 율법 앞에서 고백하기를 죄인이며,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롬7:9에서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거룩한 눈을 뜨게 되면 그 자신은 죽음에 처해지고 죄는 생생하고 똑똑하게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에, 우리 주님을 만나기 이전, 철이 들기 전에는 자기가 제일인 줄 알았고, 자기만 똑똑하고 자기만 완전한 인간인 줄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내가 살아서 꿈틀거리고, 내가 살아서 다 된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 앞에서 은혜를 받고 율법을 깨닫고 보니 율법 앞에서 나는 죽었다고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율법이란 선한 것이요, 좋은 것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여 주신 것으로 아주 좋은 것이지만, 그 율법을 가지고 구원받으려고 하면 잘못이요, 이룰 수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한없이 부족한 소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 롬7장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고뇌와 갈등의 신음소리를 듣게 됩니다.  

17절에서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합니다.  그것을 행하는 자는 바울 자신이지 그 속에 거하는 죄에게 떠넘길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죄인은 자기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아담은 범죄하고, 하와가 먹으라고 했고, 뱀이 따먹으라고 했다고 남에게 넘기는 것이 죄의 특성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내 속의 죄는 유혹할 뿐이었습니다. 

18절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본문 롬7:23-24절에서 그 고뇌와 갈등의 신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전 서신을 통하여 이렇게도 심한 갈등과 고뇌에 빠져 신음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 본문의 “내”, “나”  ‘나’라는 사람은 구원받기 이전의 바울이냐, 아니면 구원받은 이후의 바울을 가리키느냐 하는 것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여기서 그렇게 고민하는 나는 구원받기 이전, 중생하기 이전의 구도자의 고백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중생하기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중생한 이후에도 여전히 그런 처절한 고민과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로마서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롬7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의 학문적이고 신앙적인 본문해석 전체가 달라지게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는 사람이 중생하기 이전의 불신자였느냐, 아니면 중생한 이후에 힘써 잘 믿어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관점입니다.  

첫째로 바울이 중생하기 이전의 경험이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롬7:15-25의 고백은 중생하기 이전의 고백이라는 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신 바울의 현재적인 경험이라고 보기에는 유치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율법 하에 있었던 유대인이나 초신자의 경험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동안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씀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부활의 승리’를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에 넘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망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오늘의 롬7장의 경험은 바울의 중생하기 이전의 고백으로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들은 바울이 바리새인 시절에 겪었던 과거적인 경험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과거 바울이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에 율법을 따라 살아가려고 힘을 썼지만, 실제로는 세상을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중적인 자아 분열, 중생하기 이전의 과거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성령에 충만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면 7장에 기록된 그런 고민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바울은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자기 경험을 말하고 율법의 무능함을 말하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견해로는 중생한 이후의 바울의 현재적인 경험으로 보려는 견해입니다. 이 고백은 바울의 현재적인 고백이라고 합니다. 불신자들이라면 이렇게 처절하다고 말할 정도로 고민하는 이들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런 절규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보려는 이들이 겪는 고민이었습니다.  

저도 이 본문을 가지고 여러 번 심사숙고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바울이 중생하기 이전의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에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과거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면서 지금도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 현재적인 경험입니다.  구원, 거듭남, 이 중생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현재적인 구원입니다. 조금이라도 내가 들어가거나 내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면, 나로서는 안 된다는 결론입니다.   구원받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었고, 나의 능력과 열심을 가지고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요, 내가 구원 얻은 것이 아닙니다.  

고대의 교부들 중에 ‘어거스틴’은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은 오늘의 롬7장 본문을 해석하면서 사도바울이 중생하기 이전의 고백일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 이것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적인 투쟁으로 보았습니다.  신앙의 연륜을 더해 가면 갈수록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면서 사도바울과 같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도 중생한 이후의 신앙의 실상입니다.  

지금 신앙의 연륜을 더해 가면 갈수록, 영혼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느냐?  아니면 은혜로 구원받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종교개혁자들은 매일같이 모여 토론하고 또 토론하며, 정리한 결과는 그래도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를 가지고 그들이 먼저 더 많은 고민에 고민하였습니다.  아무리 행위가 바르고 좋아야 하고 말씀 중심으로 가야하고 성숙한 행함의 신앙을 가지려 하여도, 그것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부름 받아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신종 바리새인들이 되어 자기가 잘 믿어서 구원받고 축복받은 것으로 말합니다.   은혜가 아니면 감격도 없고, 눈물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감격과 눈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엘리사 시대에 나병환자 아람나라의 나아만이란 사람이 와서 요단강에서 7번 목욕하고 나음을 입었습니다.  엘리사에게 조금이라도 선물을 주고 싶어 하였지만,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하인 게하시가 뒤따라가 은 두 달란트와 두 벌 옷을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엘리사가 게하시를 책망하면서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왕하5:26)라고 했습니다.  그는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나아만의 죽을병에서 나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감격하고 돌아가게 해야만 합니다.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었으니, 나로서는 할 일을 했고, 조금 부족하지만 대가를 주었으니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고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공로와 대가를 주고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조금 무엇을 봉사하였고, 수고할 수 있었던 것도 다 하나님의 주시는 값진 은사였습니다.  

“매일의 만남”(Daily Encounter)이란 책에 실린 ‘로빈슨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1949년에 전쟁이 끝나고 목사님 가족은 할머니의 병으로 깊은 근심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할머니는 피가 부족한데 그 피는 RH 마이너스 AB형으로 아주 드문 혈액형입니다.   아무리 그 피의 혈액형을 가진 사람을 찾아도 찾지 못해서 결국 그 할머니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어서 온 가족이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이 피만 있으면 살겠는데 RH 마이너스 AB형의 피를 가진 사람이 좀처럼 없기 때문에 수혈을 받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그의 아버지는 병원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차를 몰고 가다가 길에서 차를 태워 달라고 한 군인이 손을 듭니다.  할머니 일 때문에 너무 상심해서 그냥 지나가려다가 마음속에서 ‘태워 드려라. 태워 드려라.’ 그런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아서 차를 멈추고 그 군인을 태웠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안하고 눈물을 줄줄줄 흘리면서 차를 운전하니까 군인이 옆자리에서 보다가 “아니 왜 눈물을 흘리십니까?” 그래서 그가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지금 죽어가는데 다른 병이 아니라 피가 없어서 그런데 그 피가 RH마이너스 AB형이라서 그 피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른 형의  피는 아무리 수혈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군인이 씨익 웃더니만 신분증을 내놓습니다. 군인 신분증에 보니까 군인의 피가 RH 마이너스 AB형인 것입니다. 백만 명 가운데 몇 명 있을까 말까한  RH 마이너스 AB형의 피의 형태를 가진 군인이 그 차를 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군인이 “빨리 나를 병원으로 같이 데리고 가십시오.” 너무나 좋아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도로 차를 돌려서 병원으로 데려가서 그 군인의 피를 헌혈하였고, 살렸습니다.  피를 나누어 준 군인은 이름도 주소도 말하지 않고 수혈이 끝나자 아무도 모르게 병원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목사님의 가족들은 군인의 이름을 모르는데, 진짜 군인이었는지, 아니면 군복을 입은 천사였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땅의 모든 아담의 자손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악하고 더러운 피를 받아 태어납니다.   히9:22에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값을 치러야 죄에서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았는데, 구원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아들 예수님이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그 몸을 찢기시고 그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요6:53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흘리신 피는 예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피와 물을 다 쏟아주셨습니다.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생명이 생명을 낳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 한 생명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회는 피의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새언약의 중보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피를 흘리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세우신 언약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악한 죄는 예수님의 보혈로만 깨끗이 씻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으신 감격을 안고 살아가시기를 원합니다.  

M. R. 디한 박사는 율법과 은혜에 대해서 아주 간략하게 7가지로 표현했습니다. 

1) 율법은 가장 선한 사람도 정죄하지만, 은혜는 가장 악한 사람도 구원한다. 
2) 율법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하지만,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은 영생이라고 말한다. 
3) 율법은 죄의 빚을 갚으라고 하지만, 은혜는 이미 죄값은 지불했다고 말한다. 
4)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지만 은혜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한다. 
5) 율법은 돌에 새겼으나 은혜는 마음에 기록되었다. 
6) 율법은 두려움을 가져오지만 은혜는 화평과 확신을 가져다준다. 
7) 율법은 복종을 강요하지만 은혜는 순종하는 능력을 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즉시 죽어 천사가 되었다고 하면 좋은데, 여전히 부족한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죄 아래 팔려가고 죄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답답합니다.  나를 살펴보면 답답합니다.  24절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러한 현상은 바울의 고백이 아니라, 바로 나의 고백이요, 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25절을 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회개하지만 죄에 매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감사하는 신앙이 좋은 신앙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에게 맡겨야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에게 감사하면서 나아가십시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대속의 피를 흘려 한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려주셨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다니...  

우리는 예수님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천국을 확보하고 신앙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입니까?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헌신하면서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고 주님을 닮아가려고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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