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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감사하는 자 (골 3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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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감사하는 자 (골 3 :15-17)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우리는 독립운동가 하면 김구 선생을 떠올리고, 경제개발 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리고, 민주화 투쟁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광주 하면 5. 18 의거, 나주 하면 배를 떠올리게 됩니다. 저는 우리 송정중앙교회당 하면 광주 서쪽 관문의 랜드 마크라고 자부를 합니다. 이렇듯 사람이나 지역에는 트렌드 마크 같은 것이 따라다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트렌드 마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감사하는 자’ 일 것입니다. 왜 성도는 감사하는 자이어야 할까요?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기독교회가 지키는 절기는 일 년에 4번입니다.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입니다. 4번 중 두 번이 감사절입니다. 두 절기의 공통점은 농사를 마친 후 지키는 감사절이라는 것입니다. 봄에 보리농사를 마친 후 지키는 맥추감사절, 가을 농사를 마치고 지키는 추수감사절입니다. 곡식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감사절을 지키는 이유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우리의 생명이 살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감사인 것입니다. 옛날 농경사회에서 감사절의 의미는 대단히 컸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대가 변하여 농사짓는 사람은 적어졌고,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의 인구는 80%가 넘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감사의 마음도 약화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 절기를 지켜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절기헌금 봉투를 받았을 때 비로소 맥추절이 돌아온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 보다는 의무감에서 적정한 액수의 헌금을 하는 것으로 감사절을 지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감사를 결코 기쁘게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맥추절을 지킬 때, 우리 중의 대부분은 농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먹는 양식, 풍성한 채소와 과일 등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감사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마땅할 것입니다. 또한 맥추절은 시기적으로 볼 때 한 해의 절반을 보내고 맞이하는 절기인데, 각종 병마와 질고, 재난과 사고와 위험이 가득한 세상에서 오늘이 시간까지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국가적으로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은 6월 27일 ‘2011년 상반기 수출입 동향 및 하반기 전망’ 보고서를 통해, 올해 우리나라 수출은 5610억 달러, 수입은 5305억 달러를 기록, 금년 안에 무역규모가 1조 달러를 넘어 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무역규모 1조 달러 시대를 넘어선 나라는 미국, 독일, 중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네덜란드 등 8개국으로, 우리나라는 9번째 무역대국에 해당될 것이라는 보도입니다. 

또한 6월 30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폐막한 제14회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에서는, 한국의 차세대 음악가들이 성악 부문 남녀 동반 1위, 피아노 부문 2, 3위, 바이올린 부문 3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는 보도입니다. 그런가하면 일본과 중국 동남아를 휩쓴 한류 열풍은, 유럽 문화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파리까지 진출해서, K팝(한국 가요) 열풍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그 동안 TV드라마, 영화, 전통가요 등의 한류 바람이 아시아권에서 일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재능 있는 몇몇 연예인의 성공담 정도로 여겼는데, 그러나 지난달 프랑스 파리의 중심지 콩코드 광장에서는 300여명의 금발 미인들이 K팝 공연을 하루 더 연장하라는 이색 시위를 벌여 화제를 모았다는 것입니다. K팝 열풍은 파리 공연 전부터 이미 유럽에 상륙하여 바람몰이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난 2월에는 영국 런던 의 중심지 트라팔가 광장 옆 한국문화원 앞에는 ‘제1회 K팝의 밤’ 행사장에 들어가려는 행렬이 200m 넘게 이어졌고, 600㎞ 떨어진 스코틀랜드에서까지 공연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고 하며, 베를린과 오슬로에서도 젊은이들의 열광은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5천년 우리나라 역사에서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축복이고, 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국격을 높여주신 것은, 세계 각국에 파송한 2만여 명의 선교사님들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선교를 잘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교회적으로 감사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두 날개 양육 시스템을 도입하여, 지금 양육반과 제자대학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성도가 열 한 분의 장로님들을 포함해서 무려 150여 명에 달합니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서 대화의 많은 부분이 두 날개 사역에 대한 것으로, 교회의 분위기가 바뀌어가고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 분들 모두가 우리 교회에서 열심 있는 성도들인데, 이 분들이 양육과 훈련을 통해서 십자군의 정병들이 된다면, 우리 교회는 더욱 강하고 건강한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새벽 기도회나 금요 심야기도회에도 전에 없이 많은 성도들이 참석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렇듯 생각해보면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감사한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많은 것, 나은 것, 좋은 것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아래를 보고 비교하기보다는, 높은 것을 보고 비교하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자신보다 조금만 낮은 것을 보아도 누구나 쉽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집에 전기가 들어온다면, 세상에 전기의 혜택 없이 사는 20억이 넘는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다. 

집에 식수 시설이 되어 있다면, 그렇지 못해 아무 물이나 마시는 10억 명이 넘는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다. 하루 천 원 이상으로 생활하고 있다면, 천 원 미만으로 살고 있는 12억 명의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다. 하루 한 끼라도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8억 명의 영양실조로 고통 받는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다.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 당신의 몸이 건강하다면, 당신은 이번 주를 넘기지 못할 백만 명의 환자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다.

한 번도 전쟁의 위험이나 수용소의 외로움, 고문의 고통, 굶주림의 쓰라림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5억 명의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다. 만약 당신의 냉장고에 음식이 있고, 당신의 몸에 옷이 걸쳐져 있다거나,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다면, 이 세상 사람들의 75%보다 더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다. 당신의 은행에, 그리고 지갑에 약간의 돈이 있고, 어딘가 작은 접시에 동전을 모아 놓았다면, 이 세상의 8% 안에 드는 감사할 이유가 있는 부자다. 두 부모가 아직 살아 계시고 지금 혼자가 아니라면, 보기 드물게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다. 글을 읽을 줄 안다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20억 명 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다.” 기준점을 어디에 놓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감사할 수도 있고 불평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미국 위스컨신 주에 Still Water라는 사람이 성도가 있었는데, 그의 별명은 ‘감사 집사’였다고 합니다. 늘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사람들과 대화할 때마다 “감사하지요!”가 그의 일상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그의 아내가 치매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감사의 미소, 감사의 언어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이 요양원에 보내자고 했지만, 자신이 돌보고 싶다고 거절하고 정성스럽게 돌보았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가족조차 몰라보게 되자, 자식들의 강권으로 치매 환자 요양원에 보내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의 일상은 아침에 요양원으로 출근하여, 하루 종일 아내와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병이 조금 더 깊어지면서, 마침내 아내가 남편조차도 몰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평생에 감사하며 살았는데, 아내로 인하여서도 더욱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아내의 병이 낫지 않아도 좋으나 한번만 옛날처럼 아내가 저를 알아보고 ‘여보’ 라고 부르게 해 주셔요.” 그리고 아침마다 아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요양원에 도착할 때마다 기적이 일어났는가를 확인합니다. 

“나, 누구?” 그러면 “아이스크림 선물하는 좋은 아저씨”라고 답합니다. 감사 집사님이 기도합니다. “주님, 정말 제 기도 안 들어 주시나요?” 이 기도를 하는데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습니다.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되어 요양원 채플을 지도하는 목사님을 찾아가서, 다가오는 성탄절에 자기 아내와 자기를 위해 결혼언약 갱신식을 올려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결혼식을 하고 나면 자기 아내가 다시 자기를 ‘여보’라고 부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와 결혼하자고 조릅니다. 그 말만 나오면 아내는 ‘아니’라고 고개를 흔듭니다. 마침내 비장의 무기를 꺼냈습니다. “아이스크림 안 사주겠다고.” 그랬더니 ‘오케이’ 하더랍니다. 드디어 성탄절 오후 조용한 저녁에, 목사님이 가족들만 입회한 자리에서 신랑과 신부에게 결혼 서약을 시킵니다. “당신은 당신 곁에 선 이 사람을 자신의 배우자로 삼아,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변함없이 당신의 남편/아내로 사랑할 것을 서약하십니까?” 할머니가 ‘예’라고 대답합니다. 그때부터 정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자기 남편을 볼 때마다 ‘여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6개월을 살다가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감사 집사님’이 인사 말씀을 하였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달리 드릴수가 있겠습니까? 저의 아내를 향한 마지막 소원은 아내가 나를 한 번만 더 ‘여보’라고 부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는 저를 ‘여보’라고 불러주었고 제 곁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이 소중한 친구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여보’ ‘당신’ 하고 불러주는 남편과 아내가 있다면, 그 한 가지 사실 만으로도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행복은 감사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독일 역사에 마티 바덴(Marti Baden)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유주의적 사상이 있다는 이유로, 보수파에서 밀려나 젊은 시절에 고생을 많이 한 정치가입니다. 한 번은 그가 어느 지방에 여행을 갔다가 돈이 없어 값싼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깨어 보니 구두가 없어졌습니다. 밤새 도적을 맞은 것입니다. 그는 화가 잔뜩 나서 욕을 하며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훔쳐가게 하시다니!” 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때 친구 하나가 헌 신발을 빌려주면서, 그날이 마침 주일이라 교회에 가자고 했습니다. 

마티는 마지못해 교회에 끌려갔습니다. 그때 교회 의자에 앉아 예배드리는 사람 가운데,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젊은 정치가 마티 바덴은 마음에 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나는 고작 신발 하나를 잃고서 사람을 욕하고 하나님까지 원망했는데, 저 사람은 두발을 잃고도 감사를 드리다니” 그로부터 마티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감사생활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감사할 것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에 크게 봉사하는 정치가로서 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다.”라고 했습니다. 빌헤름 웰러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탈무드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경우에 처해도 배움의 자세를 갖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행복은 소유에 비례하기 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또한 기적을 낳습니다. 지구촌 교회 김명옥 자매의 간증인데, 찬양에 특별한 은사가 있어서 열심히 찬양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찬양으로 주님을 섬기던 그녀가 어느 날 설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찬양으로 섬기던 자매가 설암 진단을 받고 혀를 끊어야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러나 그녀는 기도 중에 “주님, 아직도 내가 말할 수 있고, 아직도 내가 찬양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 기도를 드리고, 주일학교로 돌아가 봉사를 하고, 입원해 있던 연세대 세브란스 신우회 예배에서 찬양으로 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암이 악화가 안 될 뿐 아니라, 암의 징후들이 깨끗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 후 그녀는 온전히 찬양 사역자로 헌신하여, 지금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기적을 맛볼 수 있습니다. 감사로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평범한 직장인의 감사의 고백입니다. <신을 신고 길을 걷는데, 불현듯 뭉클함이 밀려오면서 감사해졌습니다. 만일 두 발이 없다면,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어젯밤 그리도 피곤하여 죽은 듯 잠자던 이 내 몸이, 이렇게 아침이 되고 눈을 뜨고 선연히 살아 있다니…밥상을 앞에 놓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너무나 감사해서…손이 있고, 입이 있어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니…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보고 감사했습니다. 

주위에 할 일 없어 헤매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데…상사의 심한 야단을 맞았지만, 오늘따라 왜 이리 감사가 넘치는지…나에게 아직도 쓸 만한 재능이 있기에 야단을 쳐서라도 다시 하라는 것 아닌가! 지친 퇴근길 눈앞에 펼쳐진 석양에 감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반갑게 뛰어나와 반겨주는 자식이 있기에, 잠자리에 누워 두 손을 가슴 위에 얹고 감사했습니다. 아직도 나에게 건강이 있어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이렇게 모든 게 감사 투성이입니다.> 

어느 식당의 벽에 “만일 당신이 구덩이에 빠졌다면, 첫 번째로 할 일은 더 파 들어가기를 멈추는 것이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만일 우리가 우울함의 구덩이에 빠진 것을 발견한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이 더 우울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 버리면 더 깊이 파고 들어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미움’이라는 구덩이에 빠지면,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앙심’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외로움’이라는 구덩이에 빠지면, 더 깊이 파고 들어가 ‘고독’과 ‘소외’를 자초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게 되면, 자신을 ‘저주’하고 ‘심판’하기까지 구멍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려 합니다. 우리의 본성이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그 타락한 본성을 따라 가면, 우리의 인생을 온통 불평과 불만과 저주로 채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라’ 혹은 ‘기뻐하라’는 명령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따라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쫓겨 나가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계속 된다.”라고 했습니다. 수탉이 물을 먹는 모습을 보고 인도주의자가 말했습니다. “저렇게 고개를 올렸다 숙였다 하니 얼마나 힘이 들까? 측은한 일이로다.” 그러자 현실주의자가 이를 받아서 말했습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 아니겠소. 목을 쳐들지 않으면 그나마 한 방울 물이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 이 때 가만히 듣고 있던 크리스천이 말했습니다. “두 분의 말씀이 맞기는 하지만, 저 수탉은 한 모금 물을 마실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사물을 보는 시각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각이 바뀌지 않기에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15절에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하였고, 16절에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했으며, 17절에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느낌만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는 의지적 훈련을 해야 합니다. 윌리엄 로우는 말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자는 기도 많이 하는 자도 아니고, 금식을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절제나 공의의 사람도 아니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솔제니친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경험한 기독교의 아름다움을 두 단어, ‘감사와 용서’라고 증언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에게는 감사와 용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가장 현저한 차이는 감사하는 삶에 있습니다. 따라서 감사는 참된 그리스도인 됨의 표시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트랜드 마크와 같습니다. 오늘 맥추 감사주일을 지키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감사가 여러분의 트랜드 마크와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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