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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받은 자, 용서하는 자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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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은 자, 용서하는 자 (마 18:21-35)

 
1. 도대체 얼마나 용서해야 합니까?

‘성도가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바로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특히 용서의 문제는 더더욱 그러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먼저 조용히 단 둘이 만나서 풀고, 만일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가서 그들의 입으로 말하게 하고, 그것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하신 말씀(18:15~20)을 들은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 多血質인 베드로가 ‘내게 잘못한 형제를 도대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고 물은 것은 조금 의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질이 매우 급한 사람, 즉 ‘한 성질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서 거칠 것 없이 살아 온 베드로는 화가 나고 속이 끓으면 한바탕 퍼부어야 시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죄를 범한 형제를 네 번에 걸쳐서 끈기 있게 권고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사실 여러분, 형제가 우리에게 잘못을 했을 때 참고 견디는 것도 힘든데, 용서하는 것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지 않든가요? 어쩌면 베드로는 그 당시 용서하기 힘든 어떤 사람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도대체 얼마나 참아 주어야 합니까?’라고 물은 것이겠지요. 

여러분, 베드로 뿐 아니라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용서의 문제는 시원하게 답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도 이 용서의 문제는 정말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지요. 잘 아는 사람이나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여러분을 무시하는 경우, 여러분을 속이는 경우, 여러분을 고의적으로 못살게 구는 경우, 더구나 여러분은 바르고 선하게 행동했는데 도리어 그것을 악으로 갚거나, 혹은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가 배반으로 갚는 경우 등, “용서”의 문제가 심각하게 고려되는 경우들은 우리의 삶에도 많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아주 인상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죄를 범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벤시라. 외경집회서 19:13-17), 혹은 “3회까지 용서해주라”(랍비, 암 1:3;2:1;Jome86b)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였습니다(22).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고 하는 것은 ‘490번까지 용서해 주라’는 말씀이 아니라, ‘무한정으로 용서해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은 이 말씀을 보다 분명하게 가르치기 위해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용서하지 않은 종의 비유>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이 비유를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은 질문과 연결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용서의 문제는 천국과도 관계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유의 결론인 35절을 통해 이 비유는 제자들에게 직접 적용되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도 보여 주십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용서는 천국 백성의 삶의 방식이자, 현재의 용서는 장차의 천국과도 연관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죠. 

그리고 성도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대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즉 용서는 하나님의 방식이자 천국 백성의 삶의 방식이므로 성도는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해 본문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실까요? 

2. 우리가 받은 용서의 가치는?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종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가 임금에게 빚을 진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종이기보다는 임금의 신하로 보이며, 그가 임금에게 진 빚은 모두 일만 달란트였습니다. 유대 歷史家 요세푸스(Josephus)의 證言에 따르면,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한 금이 3천 달란트였으며, 시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바친 금액이 120 달란트, 앗수르 왕이 히스기야 왕에게 은 300 달란트와 금 30 달란트를 부과했으며, 예수님 당시 유대 전역에서 갹출된 1년 세금이 800 달란트였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일만 달란트는 한 개인이 진 빚으로서는 엄청난, 과히 天文學的인 액수의 빚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엄청나다’, ‘천문학적이다’라고 해도 별 느낌이 없으시죠? 구체적으로 한 번 따져 보겠습니다. 

“달란트”는 예수님 당시 유대와 로마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노동자 한 사람의 一日 품삯인 1 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해당하는 액수였습니다. 따라서 일 만 달란트는 6000일을 一萬 번 일해야 모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이것을 시간으로 환산해 보면 6천 만 일, 즉 한 사람이 16만 5천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벌어야 하는 액수가 1 만 달란트입니다. 이게 가능이나 한 말입니까? 이것을 품삯으로 換算해 보면, 현재 일용직 평균 일당이 약 7만원이라고 하는데요. 7만원 곱하기 6000하면, 4억 2천만 원이고, 그것을 일 만으로 곱하면 4조 2천 억 원입니다. 이 역시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본문에 붙은 관주를 보시면, 본문이 말하는 달란트는 하루 품삯과 관련된 금액이 아니라 ‘순금의 무게 단위’로서의 달란트입니다. 당시 1 달란트는 약 34kg의 純金으로서, 이것을 요즘 시제로 환산하면, 순금 1kg이 약 5천 2백만 원이고, 거기에 34를 곱하면 17억 6천 8백 만 원입니다. 거기에 다시 1만을 곱하면, 약 17조 6천억 원입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금액이지요?

도대체 이 신하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 엄청난 빚을 졌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임금에게 이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고, 약속한 기한이 되어 임금은 그 신하에게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하에게는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일만 달란트”는 사람이 쉽게 갚을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신하는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애원을 하면서 ‘좀 더 시간을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애원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전 재산을 다 팔고, 자신과 아내와 자식들까지 노예로 팔아서 돈을 만들고, 또 친척의 재산을 담보로 금융권에서 돈을 빌리고, 카드를 긁어서 보태도 갚을 수 없는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신하는 생애 최대의 위기를 만난 것이죠.

그런데 그때 임금은 엄청난 선언, 그야말로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그것은 그 신하에게 ‘모든 빚을 탕감해 주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신하는 다만 부채상환 기간만 연장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임금은 아예 빚 자체를 모두 탕감해 주겠다고 한 것이죠. “탕감”이라는 말은 ‘포기한다’는 뜻으로 임금이 그 신하로부터 받을 돈과 그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즉 그 신하와 임금 사이에는 서로 주고받을 돈이 없다는 것이며, 앞으로 이에 대한 어떤 언급이나 再論조차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신하는 자신이 갚아야 할 엄청난 금액의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 액수가 단순히 돈이나 빚의 문제가 아님을 말씀하시려고, 본문의 “빚”이라는 단어를 특별한 단어로 사용하셨습니다. 빚을 뜻하는 이 ‘오페이레테스’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 ‘죄’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를 관주에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시옵고”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빚이란 곧 죄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임금에게 이 엄청난 액수의 빚을 진 사람은 저와 여러분이며, 이 엄청난 금액의 빚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진 죄의 빚이고, 죄 사함 받은 은혜의 가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한 신하가 천문학적인 빚,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것처럼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처리할 방법이 없는 크고 무거운 죄를 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는 돈으로 셀 수 없는 엄청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크고 중한 죄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갚아야 할 빚이 적게는 4조원에서 많게는 17조원이라는 巨額과도 같다는 말이고, 사실 이 말은 ‘변제 불가능’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이라고 진심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죗값을 이보다 훨씬 더 많게 여길 것입니다. 아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구제불능의 죄인이었음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용서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이 시간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가치는?

임금으로부터 “일만 달란트”의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그 신하가 어느 날 자기에게 “일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28). 그가 자기 동료에게 받으려고 한 “일 백 데나리온”은 자신이 임금에게 갚아야했던 빚의 60만 분의 1 정도 되는 금액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그 계산에 따르면, 만약 1만 달란트가 4조원일 경우 7백만 원이고, 만약 17조 원일 경우는 3천만 원의 빚을 진 셈입니다. 동료가 그 사람에게 진 빚은 자신이 왕으로부터 탕감 받은 것에 비하면 정말 비교도 안 되는 적은 액수였습니다. 그런데 그 신하는 동료를 만나자 말자 그의 멱살을 붙들고 “당장 빚을 갚아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그 동료는 그 사람 앞에 엎드려 간청했습니다(29). “나에게 참아 주소서.” 비록 자신이 졌던 빚보다 비교도 안 되는 적은 액수였으나, 그 사람 역시 너무나 가난하여 그 적은 액수의 돈도 갚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그 동료는 이 신하보다 더 가난했을 것입니다. 그런 동료가 마치 자신이 임금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자세로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제발 좀 참아 주게. 곧 갚겠네”라고 하면서 자비를 요청했으나, 그 신하는 친구의 애원을 묵살하고, 자기에게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임금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아무 조건 없이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빚의 60만 분의 1에 지나지 않는 빚을 진 자신의 동료, 그것도 탕감이 아니라 기간 연장을 요청했지만 그마저 허락하지 않고 감옥에 가둔 일을 지켜 본 다른 동료들이 이 모든 일을 임금에게 낱낱이 보고했습니다(31). 이 보고를 들은 임금은 대단히 화를 내면서 즉시 그 신하를 다시 소환했습니다. 그러고는 그에게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32~33).” ‘이 악한 사람아, 자네가 그렇게 빌기에 내가 자네를 불쌍히 여겨 그 엄청난 빚을 다 탕감하여 주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자네도 당연히 자네 동료를 불쌍히 여겨야 하지 않나? 그런데 자네는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는 못하고 옥에 가두었으니, 나도 자네에게 빚을 요구할 수밖에 없네.’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번에는 처음의 경우와는 다르게 임금의 일방적인 선언과 처벌만 있었을 뿐, 그 신하가 변명을 하거나 용서를 청원할 수 있는 기회는 일절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35). 즉 예수님은 비유가 단순히 임금과 어떤 신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제자들 사이의 용서 문제이고, 그리고 제자들끼리의 용서 문제임을 알라고 하신 것이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은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 

첫째는 자신들이 하나님께 지은 죄가 일만 달란트라는 금액에 맞먹는 엄청난 것이며, 그에 비해 제자들 서로 간의 빚, 또는 서로가 서로에게 입힌 손실이나 상처와 아픔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일 백 데나리온에 지나지 않는 작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엄청난 죄를 무조건적으로 다 용서해 주셨다는 것과, 따라서 그들 역시 동료 제자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놀라움과 충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만일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임금이 그 신하를 다시 소환하여 이미 탕감해 준 사실 자체를 취소하고 빚을 원상 회복시켜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신들에 대한 용서를 모두 취소하고, 그 죄에 대한 값을 엄히 물으신다는 내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자신의 행동과 판단에 대하여 결코 후회하지 않는 분이지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미루어 볼 때, 자신들이 서로를 용서하지 않는 경우 한번 결정한 일, 즉 한번 용서해 주신 일을 취소하신다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법도 一事不再理의 원칙에 따라 한번 결정된 일은 다시 취소하지 않는데,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한번 용서해 주신 일을 다시 취소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정말 변덕이 심하신 분일까요?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라 사람의 행위에 따라 좌우되는 조건적인 용서일까요? 바로 이런 생각 때문에 제자들은 놀라움과 충격을 금치 못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한 학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친구의 빚을 탕감해주지 못하고 그를 감옥에 넣은 악한 종을 임금이 용서하지 못하고 다시 그에게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고 감옥에 넣은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실제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부모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실제로는 아이들을 때릴 의사가 전혀 없으면서도, ‘이런 저런 일을 하면 때리겠다’고 아이들에게 잔뜩 겁을 주어, 아이들이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하는 가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은 교육적이고 경고적인 의미만을 가진 본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용서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던 것을 취소하신다. 이것이 본문의 가르침이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학자의 주장이 옳다면,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을 취소하셔서 그 죗값을 우리에게 다시 물으시고 지우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제가 지은 죄를, 그 죗값을 제가 어떻게 감당합니까? 죄를 지을 때는 몰랐지만 사후에 돌아보면 그 죄의 무게가 얼마나 엄청난지…! 또 죄는 어찌 그리 자주 저지르는지 …! 비록 이 학자의 해석이 정확한 것은 아닐지라도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받는 자는 용서해야 합니다. 

4. 용서 받은 것과 용서하는 것은 둘이 아니다!

나아가 오늘 본문은 보다 근본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로 볼 때, 내가 누구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과 내가 누구를 용서해 주는 것은 별개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용서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겠다고 하는 우리의 삶의 변화, 적극적인 용서의 삶을 포함하는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하가 빚을 탕감 받은 것은 누군가 그에게 빚을 진 사람이 있다면 그 빚을 받지 말라는 것을 포함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신하가 친구의 빚을 탕감해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그는 탕감 받은 것을 취소당하고 감옥에 갇혀야했습니까? 일만 달란트 빚진 신하는 임금에게 진 자신의 빚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것임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즉 탕감 받은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實感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임금에게 처음부터 ‘빚 탕감’보다 ‘시간 연장’만을 요청했습니다. 처자식을 팔거나 사돈의 팔촌의 재산까지 다 끌어 와도 갚을 수 없는 것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용서가 무엇이며, 신앙의 법칙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는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용서임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다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보실까요? 마태복음 6장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누가복음 11장 4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여기 보면 순서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그 다음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즉 우리가 용서했으니 그것을 보시고 우리의 죄도 사해 달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구원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먼저 용서하신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삶은 우리가 먼저 용서하는 것으로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용서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만약 여러분이 삶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즉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두 가지 문제를 던집니다. 첫째는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만한 죄인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여러분은 아직도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받아드리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자신의 죄 문제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잣대와 여러분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잣대가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는 무한한 용서를 기대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에는 아주 인색한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상대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부모일 수도 있고, 형제일 수도 있고, 부부일 수도 있고, 이웃과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나는 나에게 상처 준 자를 결코 용서 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잘못이 없고 억울하기 때문이다. 

만약 용서가 필요하다면 내게 상처를 준 자가 먼저 와서 사과해야한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히고 해를 가한 사람을 저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저주한다고 여러분의 상처가 치료될까요? 그리고 그가 벌을 받는 것으로 여러분의 상처가 치료될까요? 어떤 여자 분이 병원을 찾아와서 가슴의 통증을 호소했습니다. 아무리 남편이 잘 해주고 아이들이 극진히 효를 다 해도 그 여인은 늘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고 항상 불안했으며, 그러면서 삶은 점점 파괴되어 갔습니다. 아무리 진찰을 하고 종합검진을 해도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여인은 성경적으로 상담하는 분을 찾아갔습니다. 상담하는 과정에서 여인은 그 동안 자신을 그렇게 힘들게 만든 것이 바로 친정아버지에 대한 분노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술고래였던 아버지는 걸핏하면 어머니를 때렸고, 자신과 형제들까지 때렸습니다. 동네 사람들 보기도 부끄러웠습니다. 아이는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 결심했었습니다. “죽어도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겠다!” 이 증오가 독버섯처럼 자리 잡아 그 여인의 삶을 파괴시키고 있었던 것이죠. 

상처를 치유 받는 특효약은 여러분에게 상처 준 자를 여러분이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예, 인간의 감정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용서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십시오. 용서하며 사는 것이 여러분이 용서받은 이유입니다.

5. 용서받음에 감사, 용서함에 감사!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여러분에게 주는 메시지는  첫째,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받은 용서는 정말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할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크고 엄청난 것입니다.  둘째, 여러분이 주님에게 용서받은 것에는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은 조건 없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만약 용서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주님의 용서를 모르거나 주님의 용서를 받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개척교회를 시무하시던 어느 목사님이 중고 소형차를 타고 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심방을 가고 있었습니다. 사거리에서 적색 신호가 들어온 것을 보았는데 기도에 집중하느라 그대로 직진하다가 그만 맞은편에서 좌회전 하던 벤츠 승용차를 박고 말았습니다. 벤츠는 조수석 문짝이 부서지고 목사님의 차는 폐차할 정도였습니다. 상대 차에서 신사 한 분이 나오는 것을 본 목사님은 “몸은 안 다쳤느냐?”고 물은 뒤, “죄송합니다. 저는 목사인데 붉은 신호가 들어온 것을 보고도 속으로 기도하느라 지나쳐 그만 사고를 냈습니다. 모든 잘못은 제게 있으니 어떤 요구도 수용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목사님이 잘못을 인정하시니 감사합니다. 제 차 문 부서진 것만 보험으로 처리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말이 너무 고마워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보험 청구서가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형 새 자동차 한 대가 교회로 배달됐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가 들어있었습니다. “저는 지난번 사고 때 만난 사람입니다. 저는 큰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모 교회 집사입니다. 

가난한 목사님을 보고 제 마음이 아팠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자동차를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제 차는 제가 고쳤습니다.” 여러분, 이 집사야말로 주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보니 자신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너무 작은 것임을 아는 성도,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나 엄청난 것임을 알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을 것을 탕감해 주는 성도, 바로 여러분이 그렇게 되시기 바랍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용서받은 그 엄청난 일에 대해 감사하는 기도, 여러분이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여러분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그 누군가를 위한 기도를 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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