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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감옥에서 벗어나기 (요 15: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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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감옥에서 벗어나기 (요 15:11-15)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 포도나무와 열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제 24 절후 가운데 소서가 눈앞입니다. 농촌 분들의 일손이 분주한 때가 되었습니다. 논밭은 물론이고 집 터 울밑의 잡풀을 뽑아내는 일만 해도 여간 고된 게 아닙니다. 때 없이 사는 우리야 계절을 ‘덥다, 춥다’라는 기준만 가지고 가늠하지만, 땅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이들은 이 시간을 전혀 다르게 경험합니다. 농가월령가는 이때의 힘겨움과 즐거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날 새면 호미 들고 긴긴 해 쉴 때 없이 땀 흘러 흙이 젖고 숨 막혀 기진할 듯. 때마침 점심밥이 반갑고 신기하다. 정자나무 그늘 밑에 좌차坐次를 정한 후에, 점심 그릇 열어 놓고 보리 단술 먼저 먹세. 반찬이야 있고 없고 주린 창자 메운 후에, 청풍에 취포醉飽(취하고 배부름)하니 잠시간 낙이로다.”

저절로 어떤 광경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맑은 바람에 취하고 배부르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들려옵니다. 계절은 이렇듯 어김이 없습니다. 교회 마당가에 있는 포도나무에 달린 열매가 제법 탐스럽습니다. 작년에도 몇 송이 열려 날마다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었는데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들어와 따먹고 말았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올해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이고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원 농부로서의 하나님’ 이미지는 이미 예언자들이 자주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기름진 언덕에서 포도원을 가꾸는 한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그는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 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한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포도주 짜는 곳도 파 놓고, 좋은 포도가 맺히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 나무에는 들포도만 맺혔습니다. 농부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예언자의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포도나무가 이스라엘 백성임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돌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하고 올바르게 살기보다는 제 좋을 대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땅에는 폭력이 넘치고, 희생당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요? 예수님은 주님의 포도원이 황폐하게 되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가파른 생존의 조건 속에서 자맥질하느라 마음에 여유가 사라지면 성정은 절로 거칠어집니다. 우리가 정 깊은 사람, 눈빛 맑은 사람, 가슴 따뜻한 사람 하나 만나가 어려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가슴 깊이 아파하셨습니다. 어찌 하든지 사람들에게 생존 조건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으셨습니다. 부평초처럼 떠도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의 닻이었습니다.

제자란 스승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힘겹다고, 상황이 달라졌다 하여 스승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든든히 뿌리를 박아 어떤 바람에도 쉬 넘어지지 않게 된 예수님은 사람들을 당신과의 깊은 사귐으로 인도하고 싶으셨습니다. 주님이 그들 속에 있고, 그들이 주님 안에 있을 때 그들도 아름다운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열매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열매를 맺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의 내면에 스며드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기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11)

주님은 바로 이 기쁨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 이 기쁨이 어디에 갔을까?

참 고마운 초대입니다. 우리는 기쁨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어떠십니까? 항상 기뻐하는 사람입니까? 언제 기뻐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거울을 통해 자기 얼굴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 속에 있는 그 사람이 젊은 날 우리가 꿈꾸었던 그 사람이 분명합니까? 세월과 함께 눈빛은 흐려지고, 미소조차 어색한 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은 아닙니까? 거울 속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연민을 느낍니다. 맑고 경쾌한 표정은 사라지고, 피곤하고 지친 사람의 모습이 거기에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 참 미안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나를 공들여 빚어주신 하나님께 참 죄송합니다.

연일 계속되는 비로 마음조차 우중충해지는 계절, 반짝 햇빛이 나던 날 집에 가면서 효창공원을 걸었습니다. 모처럼의 햇살 아래 비둘기들은 젖은 날개를 말리는지 날개를 펼치고 있고, 조는 놈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참새 몇 마리가 먹이를 찾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는 콩콩 뛰어 다른 곳으로 옮기곤 했습니다. 그 가벼움, 그 발랄함에 저는 깊이 감동했습니다. 혼잣소리처럼 말했습니다. ‘야, 넌 참 가볍구나.’ 그 가벼움에 감동한 까닭은 내 마음이 무겁기 때문일 겁니다. 살다보면 마음의 무게가 시시때때로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을 날듯이 가벼울 때도 있지만, 천근만근의 무게로 우리를 짓누를 때도 있습니다. 대체 이 무거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내적 충만함을 느낄 수 없을 때 우리 마음은 천근의 무게가 되어 우리를 짓누릅니다. 우리 속에 기쁨이 있을 때, 감사가 있을 때 마음은 가볍습니다. 기쁨과 감사의 심정이 잦아들면 마음은 무거워집니다. 날씨 탓이 아닙니다. 다른 누구 탓이 아닙니다. 세상 탓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문제입니다. 몸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살지만 얼 사람은 보람을 먹어야 삽니다.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보람이 있다고 느낄 때, 우리 속에는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스며듭니다. 

여러분은 언제 보람을 느끼십니까?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때, 이기심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때, 오랫동안 공들여왔던 일의 결실이 보일 때 아닌가요?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 삶이 무겁고 좀처럼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보람을 잃었기 때문이고, 보람을 잃은 까닭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거나 정성으로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처방전

기쁨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에게 내리는 주님의 처방은 단순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 하도 자주 듣던 말이라 심드렁하게 듣기 쉽습니다. 하지만 삶의 우울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랑은 상대에 대한 호오의 감정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상대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필요한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고, 그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낯선 세계에 초대받은 사람입니다. 남을 위한 여백이 많은 사람일수록 눈빛이 해맑고 얼굴빛도 환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에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님이야말로 사랑의 챔피언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돌아봅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을까요? 남을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리는 일에도 인색한 우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소외된 이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라고 고백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 신음소리에 귀를 막고 삽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왜? 우리 눈과 귀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일컫는 ‘자비’라는 단어는 ‘함께 아파하는 사랑’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아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랑을 배울 기회조차 잃어버릴 것입니다. 최소한의 생존의 길을 열어달라고 부르짖는 노동자들, 가녀린 꿈조차 저당 잡힌 채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화재로 살 집을 잃고 거리로 나앉은 도시 빈민, 청년 실업자들을 모른 체 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타워 크레인 올라가 6개월을 버티고 있는 해고 노동자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함께 가슴 아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왠지 불순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번만이라도 그의 심정이 되어 보아야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에서 인간다움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바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무정한 세상에 핏기가 돌도록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경쟁과 효율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세상에 돌봄과 섬김의 가치를 끌어들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기존질서와 맞서야 합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앞에서 망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바로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기쁨과 보람이라는 생의 열매를 예비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가끔 삭막하고 메마른 현실에 지칠 때면 리브가를 떠올리곤 합니다. 나이가 많이 든 아브라함은 이삭의 신붓감을 구해오라면서 자기 고향 마을로 종을 보냅니다. 종은 주인이 준 좋은 선물들을 낙타에 싣고 길을 떠나 마침내 나홀이 사는 성에 이르렀습니다. 우물가에서 종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물을 길러 나오는 소녀들에게 ‘물동이를 기울여서, 물을 한 모금 마실 수 있게 하여 달라’고 할 텐데, 물을 대접할 뿐만 아니라 낙타들에게도 물을 대접하겠다고 말하는 소녀가 있다면 바로 그가 하나님이 정하신 이삭의 신붓감으로 알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리브가는 종이 기도한 그대로 행동했습니다. 요청받은 것 이상으로 해주는 그 활수滑手(물건을 아끼지 않고 넉넉하게 잘 쓰는 솜씨)한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 주님의 벗으로서의 삶

무슨 일을 하든 흔쾌히 하지 못하고, 늘 마지못해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자기 분수를 모르고 너무 설치는 것은 보기 좋지 않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갔을 때 가까이 지내던 교우 한 분은 그 동네에서 꽤 유명한 왈짜였습니다. 그는 나를 퍽 좋아했는데, 가끔 우리 집에 놀러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느 곳에 가든 궂은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서 일을 하곤 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을 해도 께지럭거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더러운 것도 덥석 만졌습니다. 그 서슴없음이 사람들 사이의 벽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저는 그 때 배웠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이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감동하곤 합니다. 예수님은 열병 걸린 사람의 손을 잡아주셨고, 나환자의 몸에도 손을 대셨고, 죽은 소녀도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유대교의 정결법에 의하면 그것은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었지만, 주님은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이 사랑이라 가르치신 주님은 삶으로 사랑의 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일을 함께 하자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일을 함께 할 때 주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값없는 사랑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초대 앞에 서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시116:12)

이런 질문이 없기에 우리 삶이 막막하고 무겁습니다. 늘 부족한 것만을 헤아리며 사니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늘 자각하며 그 사랑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살 때 우리 삶은 맑아지고 가벼워질 것입니다. 힘들지만 주님의 일을 위해 우리 자신을 봉헌할 때 우리는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놀라운 해방감을 맛보게 됩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Abraham Maslow, 1908-1970)는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이 절정 체험(peak experience)이라고 말합니다. 

절정 체험이란 ‘중요하고 가치 있는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을 수반하는 황홀감 혹은 경외감’을 동반합니다. 애인과 함께 있을 때, 광대한 바다를 바라볼 때, 석양 속으로 들어갈 때, 좋은 음악을 감상할 때, 누군가를 돕기 위해 흠뻑 땀 흘릴 때 우리는 인욕으로부터 해방된 느낌을 맛보곤 합니다. 그 순간은 의미로 충만한 시간입니다. 내적 분열과 상처가 치유되는 시간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 일행이 맛본 것도 이런 체험입니다. 성령에 충만했던 초대 교회 신자들이 맛본 것도 이런 것입니다.

일단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우리는 어느 정도 세상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한번 ‘다른 세계’의 진미를 맛본 사람은 옛 삶의 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나로부터 해방된 사람만이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 초월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일 년의 절반을 보내면서 후회되는 일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친구답게 살지 못한 것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제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가벼워지려면, 그래서 명랑하게 살려면, 감사하며 살려면 자기 감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감옥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힘과 의지로는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구합니다. 한 해의 또 다른 절반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도우심으로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나, 은총 안에서 기뻐하며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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