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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의 눈을 들어라 (창 1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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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눈을 들어라 (창 13:14-18)


영어에서 ‘보다’라는 말은 ‘See’와 ‘Look’이 있습니다. See는 그냥 보는 것, 눈에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Look은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의미를 생각하며 보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기르는 가축이 많아졌습니다. 목자들은 서로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이제는 분가를 하자고 제안을 하며 ‘네가 오른쪽을 선택하면 내가 왼쪽을 선택하고, 네게 왼쪽을 선택하면 내가 오른쪽을 선택하겠다’ 고 말했습니다. 그때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 있는 곳을 선택하는데 그의 선택의 기준은 ‘See’였습니다. 단지 눈에 보기에 풍부하고 아름다운 것을 중심으로 선택했습니다. 그 곳이 하나님을 떠난 악한 곳이라는 것은 보지 않았습니다. 

롯이 See를 중심으로 소돔과 고모라로 떠난 후에 홀로 남아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보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는 단어가 ‘Look’입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보지 말고 믿음의 눈을 가지고 동서남북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눈에 보이는 See는 별 볼일이 없고 황폐한 곳이지만 내가 너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면서 약속한 말씀을 믿고 믿음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읽어보면 이 말씀이 더 강력하게 다가옵니다. 히브리어의 어순으로 읽으면 ‘들어 올려라, 제발, 눈을!’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우리 말 성경에 생략된 ‘제발’이라는 히브리어 ‘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롯이 떠난 뒤 상심하여 고개를 숙이고 눈을 아래로 깔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자! 제발 눈을 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말씀과 함께 우리들이 눈 여겨 보아야 할 단어는 ‘너 있는 곳에서’입니다. ‘너 있는 곳에서’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서 있는 공간적인 위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놓여 있는 삶의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상황을 보면 참으로 외롭고, 고독한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여전히 자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더군다나 자식처럼 키운 조카 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떠난 뒤였습니다. 가축은 많다고 하지만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곳인 소돔과 고모라 땅은 롯이 선택해서 눈에 보이는 땅은 사방을 둘러 봐도 황무지에 불과했습니다. 외롭고,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삶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밀려와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는 자리에 서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아브라함아, 제발 너의 눈을 들어 올려라.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재의 현상만을 보지 말아라. 내가 네게 준 약속의 말씀을 믿고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사방을 둘러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해 ‘네가 서 있는 자리에서 믿음의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도 ‘000야, 힘들고 어려운 삶의 자리지만 낙담하지 말고 제발, 믿음의 눈을 들고 바라 보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열심을 다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아십니다. 정말로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고통스러워하는 우리의 상황을 아십니다. 손에 잡힐 듯했던 기회를 잃어버리고 낙심해 있는 우리의 허탈함을 아십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무엇 하나 제대로 손에 잡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한숨짓는 우리의 모습을 알고 계십니다. 부부 문제로, 자녀 문제로 아파하며, 힘들어 하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실패와 절망, 그리고 원망과 실의에 젖어 땅을 향해 눈을 떨구는 우리를 향해 ‘000야, 제발 눈에 보이는 지금의 아픔에 눈을 떨구지 말고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눈을 드는 훈련을 하는 사람입니다. 실패와 아픔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선한 뜻이 있음을 믿고 믿음의 눈을 드는 훈련을 하는 사람이 진정 믿음의 사람입니다. 

호주의 상징 동물인 캥거루의 새끼는 몸길이가 약 2cm, 몸무게가 약 2g 쯤 된다고 합니다. 숟가락 위에 올라갈 정도입니다. 작아도 보통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미 캥거루는 몸길이가 약 2.5m, 몸무게가 약 100Kg이나 된다니 새끼 캥거루는 약 500배나 성장합니다. 어찌 그 작은 새끼에게서 커다란 어미 캥거루를 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실입니다. 작은 것에서 미래의 큰 것을 보는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꿈을 이룹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라고 명령하시면서 눈에 보이는 땅은 황폐한 곳이지만 그 곳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축복의 땅으로 변화되는 꿈을 꾸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뤄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개인을 통해, 우리 가정을 통해, 우리 회사를 통해, 우리 교회를 통해, 우리나라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세계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자리가 힘들고 고되지만 믿음이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면서 두 번째로 명령하는 것이 있습니다. 17절입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어나라, 행하라는 동사입니다. 바라만 보지 말고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꿈만 꾸지 말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일어나서 그 꿈을 향해 움직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꿈을 가진 사람은 작은 행동에서부터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거룩한 꿈을 가지고 눈을 들어 보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꿈을 이루기 위해 작은 일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은 구체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단어입니다.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이 단어들은 추상명사입니다. 관념적인 언어들입니다. 단어를 문법적으로 구분하면 그렇지만 단어의 내용을 보면 그 단어들의 진정한 의미는 동사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단어가 삶으로 행해지지 않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맙니다. 감동이 없다는 말입니다.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사색적인 것도 있지만 결국은 삶에서 하나님의 정신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실천되지 않는 영성은 진정한 기독교의 영성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야고보서 2장 여러 곳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해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번 찾아 읽어봅시다. 17절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0절입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6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많은 사람들이 꿈속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꿈을 이루는 위해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려워합니다. 작은 일 하나가 큰 꿈을 이루는데 어떻게 역사하게 되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 안에서 꾼 꿈을 이루는 과정을 보면 그가 꾼 꿈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형제들에 의해 미디안 상인에게 노예로 팔립니다. 애굽 보디발 장군 집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꾸었던 큰 꿈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아니 그 꿈과는 아주 멀어진듯 한 삶의 자리지만 그는 푸념하고 불평하지 않고 성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합니다.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음란한 음모로 인해 억울하게 감옥에 갇힙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다른 죄수들을 섬기는 신실한 삶을 삽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하나하나 연결되어지면 요셉이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서게 됩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을 기근에서 살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근에서 살리게 됩니다. 요셉을 통해 결국 출애굽 사건으로 이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섭리를 전하는 사건의 복판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꿈은 갑작스럽게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순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에 충성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려운 현실 앞에 서 있는 아브라함이 ‘너 있는 곳에서 일어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두루 다녀 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헤브론에 도착해 그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18절입니다.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니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믿음의 눈을 가지고 일어서는 아브라함의 작을 일의 시작은 예배를 드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제단을 쌓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제사를 통해 꿈과 약속을 주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소중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꿈을 간직하게 된 사람은 그 꿈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소중하게 여깁니다. 하나님 안에서 축복 받기를 원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꿈을 품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행위는 믿음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석유재벌 록펠러는 젊었을 때 일찍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 목표가 ‘나를 위하여 돈을 위하여’였습니다. 그의 인생계획에 돈만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재벌이 된 록펠로가 50대 초반에 살이 썩는 무서운 병에 걸립니다. 돈은 많이 벌어 놓았는데 죽음이 눈앞에 있습니다. 모든 자신을 위해 즐기고자 하는 꿈이 순식간에 날아갈 상황입니다. 그때 록펠러는 하나님앞에서 몸부림을 치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건강이 회복되자 그는 자신의 꿈의 목적을 수정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돈을 위하여’ 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로 수정했습니다. 그의 꿈은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갔습니다. 그 변화에서부터 록펠러의 평가가 사람들에 의해 달라졌습니다. 돈만을 아는 수전노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품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봉사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록펠러를 꿈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의 삶의 자리가 힘들고 고된 자리지만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약속하신 세계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 안에서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납시다. 믿음 안에서 배에 힘을 주고 허리와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일어나 하나님과 함께 앞에 놓인 작은 일에 성실하게 임함으로서 그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축복이 우리 모두 가운데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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