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먼저 … 서로 … (골 3:12-17)

첨부 1


먼저 … 서로 … (골 3:12-17)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2)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3)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4)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5)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6)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17)
<골로새서 3장 12~17절>

할렐루야!
복된 자리에서 만나서 감사합니다.

지난 금요일에 원로목사님, 사모님들 220여명이 
우리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아주 흐뭇해하시며 가셨습니다.
교통비를 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한 분 한분 이름을 봉투에 적어 전달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제게 
“은퇴한지 8년 됐는데 많은 교회에서 초청받아 가봤지만
기둥교회가 최고”라고 하시면서 “또 불러달라”하셨습니다.
기분 좋게 가셔서 감사하고, 
또 오실 수 있으면 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우리 교회가 다시 오고 싶은 교회라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오늘 살았으니 감사요, 만났으니 감사입니다.

내일은 현충일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신 분들, 목숨을 바치고 
부상을 당한 분들을 기억하며 엄숙하게 지내는 날입니다. 
사실 현충일은 놀러가는 날이 아닙니다.
오늘 강단에 꽂혀 있는 무궁화를 보면서 …
무궁화가 이렇게 예쁜 꽃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주보 겉면에도 보시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정말 좋은 나라입니다. 
여의도에 있는 분들만 싸우지 않으면 참 좋을텐데 …
우리가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옆의 분과 인사합니다.
“잘 듣고, 잘 믿고, 잘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옷

오늘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예배자 답게 / 단정하게 / 깨끗하게 입으셨습니까?

사람은 직업에 따라 … 역할에 따라 …
입어야 하는 옷이 달라집니다.
운동 선수라면 운동복을 입어야 합니다.
경찰관은 경찰 제복을 입어야 경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어야 군인답고 전투를 할 수 있습니다.
의사, 간호사, 약사는 가운을 입어야
환자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잠자리에 들 때 입는 옷, 
직장에 출근할 때, 수영장에 갈 때, 등산하러 갈 때,
장례식에 갈 때 입는 옷이 달라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교회에 오면서 
예배자 다운 마음으로 옷을 입고 오셨습니까?
날이 더워지면 꼭 목욕탕이나 수영장에 가는 사람처럼
아무렇게나 하고 교회에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 무례하면 안됩니다.

예배란 “예를 갖추어 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이라면 
예를 갖추어야 합니다.

저는 거의 매일 양복을 입고 삽니다.
옷도, 머리도 단정히 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리고 저는 부목사, 전도사, 신학생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자기의 신분에 혹은 맡은 직분에 맞게
단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일을 하는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굳게 하고
상대방에게 신뢰를 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너희는 …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옷이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은 특별한 신분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12절 말씀처럼, 우리는 
“…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골 3:12)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녀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값지고 귀한 신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13절에 보면 
“…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골 3:13)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고백하면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시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자녀 삼아 주십니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 『에베소서, 골로새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 2008), p. 390. 참조.>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는
-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이며
- 특별히 용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택함 받고 용서 받았기에 
그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그 옷이 12절에 보면
긍휼, 자비, 겸손, 온유와 오래 참음이라고 했습니다.

‘긍휼’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는 마음입니다.
‘자비’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온유’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과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구분이 명확하지도 않고 실천하며 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13절에 구체적인 지침이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 (골 3:13)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는 것 …
하나님께 용서 받고 택함 받은 우리가
늘 입고 있어야 하는 옷입니다.

‘서로’용납하여 …

사도 바울은 용납하라고 하면서‘서로’용납하라고 했습니다.

처음 사람 아담이 혼자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피조물이기에
하나님과 동행하고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라는 개념은 
인간의 창조 때 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 아담을 살게 하신 하나님은
그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창 2:18)

사실 ‘홀로’의 기독교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통하고
사람과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함께 머무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출생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고, 생각도 … 
모든 기준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모이면 어디에서든지 다툼이 있고 마찰이 생깁니다. 
다른데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기 때문에 다툼이 생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 사이에도 많은 문제가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의 모임이 완벽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 13절에 보면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골 3:13)이라는 
단서가 붙어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거기에는 꼭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음을
바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조차 / 피를 나눈 가족조차 …
함께 지내면 상대에게 불만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기둥교회 좋지요? 교회가 하는 일이 다 좋지요?
그런데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자고 하면 
꼭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체육대회 하자, 찬양제하자고 하면 그건 왜 하느냐고 투덜대고, 
선교회 나눈다고 하면 교회안온다고 협박하기까지 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불만이 생기는 것이 불편해서 …
분쟁과 마찰이 두려워서 … 관계를 거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불만과 마찰이 있어도 
예수 이름으로 극복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혼 생활을 통해 … 또 사회생활을 통해 
사람의 인격과 성격이 바뀌기가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 직장에서 … 교회에서 …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고 다투고,
함께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이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 입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 서로가 서로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기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기 다르게 만드신 것을 인정하고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받아들여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젊은 한국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부부는 5살이 된 아이를
독일 어린이들이 모이는 유치원에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한국말만 배워왔던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면서 독일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맨 처음 배워온 독일어는
‘Dish geht(디쉬 게트)’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은 ‘넌 빠져’라는 뜻의 단어였습니다.
유치원에서 유일한 이방인이었던 아이는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때마다 듣던 말을
의미도 모른 채 반복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 후 부부는 아이를 독일인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부부는 자녀와 함께 이웃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인들이 주로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간 첫 날 어린이 예배를 드리고 온 아이가 
두 번째 독일 말을 배웠습니다.
‘Kam hereint(캄 히레인트)’…
‘이리와’라는 의미의 단어였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이방인인 친구를 향해
‘이리와’라고 말하며 받아주었던 것입니다.
<산소마을 홈페이지 (www.o2vill.co.kr) 참조>

용납하는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고 용서받은 우리는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해 주신 것이 감사하기 때문에, 
감사를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소수민족의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가
(김인희 박사, 전북대 쌀,삶,문명 연구소)
중국 광시성(廣西省)의 소수민족 
‘힌바지야오 족(族)’을 찾아갔습니다.
숙소를 제공해 줄 주인을 만나서
한국에서 가져간 선물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받은 선물을 챙겼습니다.

그 분이 몇 주 동안 마을에 머물면서 
집주인 뿐 아니라 마을의 어느 누구한테서도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후에 중국인 학자를 통해 알게 된 바에 따르면
힌바지야오 족은 언어 체계 자체에 
‘고맙다’는 표현이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도움을 받은 만큼 자신도 언젠가는 상대방에게 도움을 줄 것이기에 
그들은 굳이‘고맙다’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선일보 2011. 2. 1. A19면 참조>

그런데 우리 주변에도 
‘힌바지야오 족’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맙다는 의식이 없고, 고마움을 표현할 줄을 모릅니다.
자신이 고맙다는 의식이 없고, 감사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감사하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합니다.
기둥교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검정바지야’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우리는 예수 믿어 새로운 신분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천국 백성의 지위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예배하며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용납되고 용서받은 우리는
세상에서도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이해를 세상에 나누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둥교회 성도의 삶의 수칙 네 번째를
“먼저 이해하고 서로 용납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이해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

그런데 먼저 용납하고 서로 이해한다고 끝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골 3:17) 라고 가르칩니다.
내 이름을 걸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위해 하는 것처럼(쉬운 성경)
그렇게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옳은가 그른가를 살핍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세상에는 예수는 믿지만 옳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지 않지만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빠져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옳은 일, 옳은 생각 속에도
예수님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최근에 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 15페이지의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If the heart is occupied with Christ, Jesus will pour forth 
from the lips and the pen. 
He will ooze out of every pore.”
“예수 그리스도가 가슴에 가득한 사람(예수로 꽉 찬 사람)의 
말과 글에는 예수님이 넘치고 끝없이 예수님이 흘러나온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슴에 가득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꽉 찬 사람은 말을 하든지, 글을 쓰든지 …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제 설교를 돌아보았습니다.
‘내가 하는 설교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 있는가?
내가 하는 말에/행동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 있는가?’

여러분, 세상에 나가 친구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행동할 때
여러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야
하나님의 자녀요, 진정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살아야 합니다.(골3:17)

잘 비벼지는 성도

사람들은 다 천차만별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개성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맛있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맛없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거기에 가보고 ‘멋있다고 그런 곳이 있었느냐’고
감동하는데 어떤 사람은 뭘 멋있냐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면서 흐뭇해하며 기분좋아서
교회에 왔는데 ‘뭘 그렇게 칙칙한 옷을 입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고, 하나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 일터도 … 교회도 …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개성이 다른 사람이 모여 있지만
서로 이해하면서 용납하고 인정하면 하나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인터넷 카페에
한 여자 권사님이 자신의 경험을 글로 적어 올렸습니다.

<아들의 결혼을 위해 며느리의 가족들과 상견례를 갖는 날이었습니다. 
양가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호텔 레스토랑에서 모여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상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회사를 경영하는 권사님 가정과는 달리
사돈이 될 분들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분들이었는데
레스토랑에서의 식사가 익숙하지 않았던 사돈 부부가
식탁위에 삼각형으로 멋있게 접혀있던 냅킨을 
모자처럼 머리에 썼던 것입니다. 
냅킨이 고깔 모자정도 되는 줄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사돈 부부가 얼마나 진지하게 모자를 쓰고 계셨는지 
상황을 웃음으로 넘길 수도 없었고
용도를 제대로 설명하자니 사돈이 무안해 할 것 같아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덩달아 긴장한 자녀들까지 아무도 말을 못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권사님의 남편이 똑같이 냅킨을 머리에 쓰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잠시 긴장했던 다른 식구들도
다들 접혀있던 냅킨을 멋있게 머리에 쓰고 
정말 맛있고 사랑이 가득한 식사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용납입니다. 이런 것이 받아들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은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 도와주고 참아주는 것입니다.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다 보면
사랑하고 신뢰하는 관계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날이 더워지면서 
매콤새콤한 비빔밥, 비빔국수를 찾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 토요일에 여의도에 갔었습니다. 
주변에 비빔국수를 아주 맛있게 하는 식당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찾아갔습니다. 얼마나 맛있던지요 ….

여러 가지 재료를 한 데 섞어 비벼놓고 보면
여러 음식들이 어우러져 내는 나름의 맛이 있습니다.
‘서경희’라는 시인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제목은 ‘비빔밥을 먹으며’입니다. 

나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싶다.
서로 다른 성깔들이
살 부벼 빚어낸 감칠맛 도는 세계여

잘 비벼진 비빔밥을 먹으며
나 또한 비벼지고 싶다.
내 가진 독단과
온갖 이기심을 비비고 비벼
허기진 세상 구석구석 달래고 싶다.

각각의 표정들도
아주 둥글게 비비다 보면
참기름 같은 고소함으로 하나되는 법
그 기막힌 화합으로 뭉친
비빔밥을 먹으며 나 또한 비벼지고 싶다. - 서경희 -

먼저 이해하고 서로 용납하며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피차 용서하면서
여러분이 속한 가정과 일터에서 교회에서 
잘 비벼지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우리 가족을 … 내 동료들 …
또 선교회원, 속회원, 찬양대원, 교사들을 … 
나와 다르더라도 먼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먼저 이해」하고 「서로 용납」하는 사람 …
주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어디에 속해있든지 잘 비벼지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비벼지는 사람, 
하나 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용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맛을 내면서 
하나되어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들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사는 복된 성도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들의 가정에서도 사랑으로 비벼지게 하시고
교회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비벼져 하나의 맛을 내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그리스도의 맛을 내는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에 우리가 있음으로 살맛나게 하시고
우리가 있음으로 환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믿는 우리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자녀로 
부끄러움 당하지 않는 복된 성도라 칭함 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주장하여 주시고
우리들의 일터를 주장하여 주시며 
가정이 화목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