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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사함과 치유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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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사함과 치유 (막 2:1-12)
 
중풍병자는 스스로를 포기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난 병자들은 중증 환자들이었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나병환자의 치유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나병환자는 질병의 지독한 증세 때문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자신이 낫고자 하는 열망을 예수님 앞에 나와서 표현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중풍병자는 한마디의 말도 기록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몸이 마비되었고 걸을 수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는 질병에 걸렸습니다. 어쩌면 본문의 긴 구절 속에 나타난 중풍병자의 침묵은 그의 마음속에 또 다른 좌절과 실망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상실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 왔을까요? 어쩌면 어릴 때부터 이런 병에 걸려서 꼼짝달싹 못하고 지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어릴 때에는 여기저기 잘 뛰어다니다가 성인이 되어서 이런 질병에 걸려 더 아픈 추억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질병에 걸려 보셨습니까? 질병이란 우리의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까지 아프게 만듭니다. 우리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아마 중풍 병자는 매일매일 수없이 되뇌었을 것입니다. ‘나는 버려진 존재야. 내 인생은 끝이야. 나는 누구에게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어.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가 없어.’ 이렇게 자기를 비하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학대하고 자기 연민 속에서 빠진 적도 참으로 많았을 것입니다. 

이 중풍 병자가 가진 질병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한 모습이었습니다. 질병 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마음의 병입니다. 스스로 더 이상의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고 자신을 닫아놓는 것입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 나를 데려가지 말라, 나 혼자 그대로 내버려 둬라, 그냥 이 모습 이대로 인생을 끝내게 해달라고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중풍병자에게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한 시인이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조정희라는 시인의 “소아마비에 관한 명상”입니다. 

절룩이는 것도 때론
아름다울 수 있지
음악 속에선
당김 음(音)주법으로 절룩이는 음표가 있어
쇼팽도, 라흐마니노프도.
베토벤도 싱코페이션(당김음)으로 아름다운 곡들을 작곡하여
가쁨과 슬픔을 노래하게 하였지

버림받은 것이 아니고
상처도 아니고
상처 안에 숨어 있는 골목도 결코 아닌

내 삶과 육체 속에 살아
죽을 때 까지 함께 할
지독한 아름다움이지

그는 자기의 육체의 약점을 아름다운 강점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지독한 아름다움.” 두 말은 서로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합해놓고 있습니다. 수많은 고뇌의 밤, 눈물의 밤을 지세면서 자기 속에 있는 그 지독한 아름다움에 대해 위로를 하고 있는 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질병의 문제, 마음에 탄식하는 아픔의 문제들을 매일매일 극복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중풍환자는 나병환자와는 달리 복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복이 있었을까요? 나병환자는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는 네 명의 믿음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네 명은 누구일까요? 하인일까요? 가족일까요? 친구일까요? 

누구여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 중풍병자에게는 그에게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는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다가와서 얘기했습니다. “너 가능성 있어. 너도 고침 받을 수 있어. 그분의 이름이 예수님이래. 그분 앞에 나아갔더니 나병환자도 고침을 받았대. 우리 한번 예수님께 나가보지 않을래?” 하고 중풍병자에게 권면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친구가 필요합니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나를 위로해주는 친구가 있어야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한사람의 친구가 주는 참된 위로는 주위의 백 명의 사람이 퍼붓는 비난과 조롱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중세 궁정시인이었던 에센 바흐라는 사람이 이렇게 멋있는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벗은 천명의 적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힘 이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한사람의 멋진 친구가 있으면 백 명의 사람, 천 명의 사람이 나를 향해서 조롱하고 나를 불행에 빠트린다고 해도 훨씬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풍병자에게는 바로 이렇게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자신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옆의 사람이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간절함을 보십니다

그런데 두 번째 장애물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방 안에는 벌써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바깥에도 사람들이 가득 둘러서있습니다. 아무리 들어가려고 해도 비켜주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그들에게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이 중풍병자에 대한 사랑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인생에는 간절함과 절박함과 사랑의 헌신이 있으면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납니다. 창조적인 틀이 생겨납니다. 그들은 1층이 막히자 2층으로 올라갈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2층에서 예수님이 계시는 자리로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집안의 사람들은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쳤을 것입니다. 먼지를 뒤집어썼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 지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한마디씩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야, 그만하자. 이렇게까지 해야 되겠니? 정말 창피하다. 저들이 우리를 욕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남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지 말고 조용히 떠나자.”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이 모든 사실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그 대신 이 중풍병자를 보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를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의 치유의 열망을 보셨습니다. 아니,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간절한 열정을 보셨습니다. 고통 받는 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오기만 하면 고침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그들의 마음을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 앞에 나아가는 그런 열정이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 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5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다음과 같이 보셨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2:5)

여기 보면 “믿음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네 명의 믿음, 아니 중풍병자까지 합친 총제적인 믿음을 보셨습니다. 믿음이 보이는 것입니까? 믿음은 추상 명상입니다. 그런데 보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보셨을까요? 그들의 간절함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사랑을 보셨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랑의 헌신을 보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중풍병자에게 “네가 치유 받았다.”라고 선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책감과 열등감으로부터 벗어나십시오

아파서 왔는데 왜 뜬금없이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계실까요? 우리는 육체적인 질병에 걸리면 마음속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합니다. ‘내속에 무슨 죄가 있나? 내가 무슨 나쁜 일을 했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틀린 것이 있나?’ 이 중풍병자는 자기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중풍병 치료를 받기 전에 네 마음의 병이 먼저 치료되어야 되겠구나. 네 마음속 깊숙이 뻗어있는 쓴 뿌리를 이제를 잘라버려야겠다. 그 쓴 뿌리와 이제는 작별인사를 해야겠다. 죄의 얽매인 자신의 감옥에서부터 이제는 탈출해야겠다.” 

여러분, 중풍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중풍병자의 가슴을 억누르고 그 마음을 답답하게 하고 그 영혼을 짓누르고 있는 죄책감과 가슴에 맺혀진 열등감과 분노입니다. 혹 육체가 아프다면 먼저 내 마음속에 분노가 있지는 않는지, 마음속의 죄책감이 나를 사로잡고 있지는 않은지,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 나를 매일 뒤흔들어 놓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열등감을 가지고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혼의 병이 치료되지 않으면, 우리의 정신적인 질병이 치료되지 아니하면, 마음속에 맺혀진 것들을 풀어나가지 아니하면 육체적인 자유를 제대로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중풍병자에게는 그런 고통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하고, 자기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래서 스스로를 모멸하는 마음이 그를 붙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죄가 다 용서받았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오십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폼을 잡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존심을 너무 뻣뻣하게 세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 아빠 하고 달려가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이가 마흔이 되고 쉰이 되어도, 구십이 되도 백세가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어린아이입니다. 벌거벗은 채로 나아가야 합니다. 중풍병자는 스스로 벗어나기에는 쓴 뿌리가 너무 깊이 박혀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강요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예수님의 권위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하십니다.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너 스스로를 용서해라.”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데 우리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꾸시겠다고 선포하셨는데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얽어매고 있습니다.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고 죄책감과 괴로움 속에 자기를 묶어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에서부터 탈출하라는 것입니다. 해방되라는 것입니다. 

죄책감으로 인해 오랫동안 자기 우울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서 용서하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셨음도 거부합니다. 그래서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보통 때는 다 멀쩡합니다. 아주 근사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속에서 분노와 미움이 치솟아서 자기 자신을 가누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 자신을 풀어라. 너를 조여오고 있는 생각에서 너를 풀어라. 그것이 죄책감이냐? 그러면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 그것이 열등감이냐? 내가 너에게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라는 자존감을 주겠다. 네가 남을 향해서 분노하느냐? 하나님께서 너 같은 사람에게 분노하시면 우리는 먼지밖에 안 되는 존재인데 왜 그렇게 남을 향한 분노를 오래도록 가슴에 품고 있느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먼저 질병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세계와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질병의 치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일어나 들 것을 들고 가십시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마가복음 2:11)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상에 누워있지 말고 이제는 네가 상을 들고 가라는 것입니다. 들것을 들고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행동을 부르는 말씀을 선언하십니다. 들것이 무엇입니까? 그동안 자기를 보호했던 것입니다. 그는 들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들 것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네가 들것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붙잡혀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자기를 보호했습니다. 때로는 우울증으로 다른 사람에게 연민을 얻으려고도 했습니다. 때로는 죄책감을 통해서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깨트리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그것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웃의 한 맺힘을 갖고 살지를 말라, 더 이상 변명하면서 네 인생을 살아가지 말라, 더 이상 죄의식에 집착하면서 인생을 살아가지 말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죄 용서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주님과 함께 기뻐 뛰게 됩니다. 그때에 내 육체도 영혼과 함께 생기를 얻고 일어나서 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소리치십시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절망하느냐? 어찌하여 우울해하느냐? 어찌하여 열등감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셨다.” 

그리고 또 이렇게 선포하셔야 합니다. “나도 너를 용서하겠다.” 그래야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죄책감이 나를 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열등감이 나를 몰아내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육체적인 질병과 어둠의 세력들이 나를 마음대로 흔들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지배당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것을 다스림으로 주님과 함께 인생을 새롭게 걸어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께 토해내십시오. 내 속에 나를 얽어매고 나를 어둡고 침침한 골짜기로 몰아가고 있는 이 세력들을 향해서 외치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죄가 사함을 입었다! 모든 어둠의 세력들아 물러가라!” 

그리고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우리에게 맡겨진 인생을 주님과 함께 힘 있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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