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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10) (욘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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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10) (욘 4:12)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며 살기를 축복합니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다 결혼한 신혼부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시골에 있는 시아버지가 아들네 집에 잠깐 들를 겨를이 있어 사전에 알려 주기 위해 전화를 했습니다. 며느리가 전화를 받자 시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나다, 애비다.”

시아버지와 신랑 목소리가 워낙 같았고 신랑이 가끔 장난 전화를 했기에 새댁은 신랑인 줄 알고 “웃기지마!”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당황한 시아버지는 그래도 “애비라니깐!”하였습니다. 하지만 시아버지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며느리는 다시 “장난치지 말라니까!”하였습니다. 답답한 시아버지가 또 하시는 말씀 “하~ 그 참, 애비래도~.”였습니다. 그러자 며느리가 하는 말은 “네가 애비라면 난 네 누님이다!”였습니다.

그날 저녁, 아들네 집에 들어서면서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하는 말, “누님, 저 왔습니다.”였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끝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라면 이것은 끝이지만 무엇인가 목적이 있다면 끝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하다못해 말조심해야 한다는 정도라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어디입니까? 오늘 주보에 나와 있는 본문은 요나서 4장 12절 이하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서 요나서는 4장 11절로 끝납니다. 12절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어떤 성경에 12절이 나온다는 말도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어떤 성경도 요나서는 4장 11절로 끝이 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도 없는 본문으로 설교하겠다는 저의 생각은 무엇일까요? 드디어 ‘내가복음’(?)을 쓰겠다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좀 하겠다는 것입니까? 이것도 역시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이 시간에는 그동안 요나서를 통하여 나눈 말씀을 짧게 정리하려고 합니다. 요나서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요나서는

I. 아직 끝맺지 않은 책입니다.  

요나서 4장 12절 이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분명히 없습니다. 그렇다고 떨어져 나간 부분이라고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분명히 요나서는 4장 11절로 끝납니다. 
그런데 12절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욱이 요나서를 아직 끝맺지 않은 책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4장 10절 말씀부터 다시 읽으면 이렇습니다.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는 질문으로 글을 마칩니다. 무엇인가 더 할 이야기가 있는 듯 하며 끝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미진하여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최소한 대답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전서는 창세기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21의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으로 끝납니다. 확실한 시작과 끝맺음이 있습니다.

성경의 각 책도 끝맺음이 있습니다. 창세기는 요셉이 죽는 것으로 끝맺습니다(창50:26). 출애굽기는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출40:33)는 말씀으로 본론을 끝맺습니다. 레위기는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레 27:34)는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민수기는 “이는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규례니라.”(민 36:13)는 말씀으로 그동안의 말씀을 정리하고 끝맺습니다. 그리고 모세 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는 모세가 죽는 것으로(신34장) 끝맺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으로 마칩니다.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서신서들은 그 끝맺음이 분명합니다. 로마서를 비롯하여 서신서들은 대부분 마지막 인사와 아멘으로 분명한 끝맺음이 있습니다.

사실, 요나서가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는 질문으로 끝을 맺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나서와 함께 니느웨에 하시는 말씀인 나훔서 역시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나훔 3:19)는 질문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청중들에게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 끝을 맺었다고 해서 문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말의 끝맺음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시키거나 행동을 요구하는 명령법으로 끝맺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같이 행동할 것을 요청하는 청유법으로 끝맺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요나서처럼 말하는 사람이 말을 듣는 사람에게 질문을 하여 그 해답을 요구하는 의문법으로 끝맺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단순히 의문법으로 끝났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요나서를 ‘아직 끝맺지 않는 책’이라고 하는 것은 끝맺음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요나서는 의문법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끝맺지 않는 책이라고 하는 이유는 다음에 말씀을 드리는 이유 때문입니다.  

질문법으로 끝맺은 요나서를 끝맺지 않은 책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질문으로 끝맺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나서는


II. 우리의 대답이 필요한 책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물으셨습니다. 요나는 대답하여야 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요나의 대답이 있어야 했습니다. 요나서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지 않고 4장의 뒷부분만을 살펴보아도 요나의 대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요나서 4장 6절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일이 되지 않았다고 화를 내며 앉아 있는 요나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거기에 박넝쿨이 있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한 요나의 반응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에 요나는 크게 기뻐하는 것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벌레를 예비하셔서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고 동풍을 예비하셔서 요나를 혼미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한 요나의 반응은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8b)는 것입니다. 이번에 보인 요나의 반응은 죽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매우 부정적이지만 여하튼 하나님의 행동에 응답하였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4:11)

그런데 여기에 요나의 대답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요나는 분명하게 대답하여야 했습니다. 가장 정확한 대답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의 생명을 아끼시는 것이 당연하지요!”라고 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는 박넝쿨을 아끼면서도 수 많은 생명이 얼마나 귀중하다고 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대답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할 말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요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요나서를 읽는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나의 대답은 우리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바로 ‘요- 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답을 하여야 합니다. 요나서는 우리의 대답이 필요한 책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사람이 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대답하되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데로 대답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왕이 된 솔로몬은 기브온이라는 곳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의 예배는 소와 양을 잡아 태워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이 그곳에서 천 마리가 넘는 제물을 바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느냐? 나에게 구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솔로몬이 구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1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솔로몬이 달라고 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도 모두 그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것까지 풍성하게 그에게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듣고 읽고 연구하여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대답입니다.

요나는 그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대답하여야 할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니느웨로 가서 설교하여 그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실 것까지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여야 할지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답을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었습니다.  

요나서처럼 끝나는 것 같지 않게 끝나는 책이 신약성경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인 28장 30-31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로마에 간 바울은 그곳에서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기록은 끝입니다. 그 이후 로마에서의 다른 활동이나 바울이 죽을 때까지의 다른 이야기가 있을 법한데 그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뒷부분이 전해져 내려오는 중에 없어진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뒷부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이 땅 끝을 향하여 전파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의 요절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사도행전 1:8 말씀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처럼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다로, 사마리아로, 그리고 소아시아, 마침내 로마까지 전파된 이야기가 사도행전의 기록입니다. 

하지만 로마가 땅 끝이 아니기 때문에 땅 끝을 향한 복음 전파는 사도행전 28장 31절 이후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로마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은 마쳐지지 않은 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까지도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기록되고 있는 책입니다. 사도행전은 믿음의 사람들의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책입니다. 마찬가지로 요나서는 우리가 대답함으로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제가 오늘 요나서 4장 12절을 이야기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요나서는 사도행전과 마찬가지로 전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이 땅 끝을 향하여 가는 것을 기록한 신약의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선택된 유대인들에게서 시작하여 니느웨와 같은 다른 나라 사람에게 구원을 말씀하시는 구약의 책이 요나서입니다. 따라서 요나서 4장 12절 이하의 말은 우리가 기록해야 합니다. 10절과 11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물으시는 질문에 우리가 대답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기록을 이어가야 합니다.

요나는 자신이 대답하여야 말을 알면서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몫으로 대답을 남겨두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대답하여야 합니다.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요나는 의문법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대답이 필요한 책입니다. 요나가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대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여야 합니까? 우리의 대답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행동이어야 합니다. 요나서는


III. 우리가 행동하여야 할 책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세상에 죄악이 넘치면 하늘이 노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임할 화를 걱정하며 나름대로 준비하였습니다. 우리는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하시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회개하여야 합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려다가 물고기에게 삼켜 버린 요나였습니다. 그는 물고기의 뱃속을 기도실로 삼아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기도하여야 합니다. 요나의 선포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하였던 니느웨의 백성들처럼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사랑을 받은 자들인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잊고 있었던 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요나와 같이 불순종하는 사람이요,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가지고 나가서 다 허비하였던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큰사랑을 받고도 쉽게 그 첫사랑의 감격을 잊고 살아 온 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의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여야 하는데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재능을 주셨는데 그 재능을 한 달란트 받은 불의한 청지기 같이 사용하지 않고 감추어 두었던 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메여서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악한 일은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먼저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아주 단순하게 행동하여야 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 니느웨에 들어가 하룻길을 외쳤을 때 회개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요나는 말씀대로 외쳤고, 백성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오히려 요나가 시기가 날 정도로 왕까지 나서서 온 백성이 회개하였습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더 가볍게! 더 순순하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라고 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대한 어떤 해석보다 있는 그대로를 실천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주시기를 기도하며 행동하려고 하여야 합니다. 아주 단순하고 순수하게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영혼을 사랑하고 전도하는 일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어떤 핑계도 대지 맙시다. 전도에 순종합시다.  

우리는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요나처럼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 화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면 비록 우리의 실수가 있더라도 그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도록 더욱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우리가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데 순종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여 단순하게 행동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행동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요나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물으셨지만 요나서에 요나의 대답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답을 하여야 합니다. 요나가 대답하지 않은 대답을 우리는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 하는 대답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대답을 하여야 합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 가서 그분 앞에서 대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영혼을 사랑하고 그들을 인도했느냐’고. 그리고 그 때 우리는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여야 할 일은 영혼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재능과 형편을 따라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다하지 못한 이야기, 그리고 지금 하여 할 이야기는, 그리고 앞으로 두고두고 하여야 할 이야기는 바로 영혼을 사랑하고 그들을 인도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기도하며 실천해야 할 일들입니다. 

저의 요나서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칩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답해야 할 말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답을 자신의 삶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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