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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과 바리새파들의 전통 (막 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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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바리새파들의 전통(마가복음 7장 1~23절) 

오늘 말씀은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실망을 하고 떠납니다. 왜 그럴까요. 단순히 교회에 대한 오해이거나 교회를 잘 모르기 때문일까요.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교회의 본질 예수님과 복음

교회에 처음 나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위선과 이중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목마른 사람이 마실 물을 구하는데 교회는 그 사람에게 마실 물은 주지 않고 그릇만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본질보다는 본질이 아닌 것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형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형식보다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이와 더불어 역사와 전통도 중요하지만 교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이 더 중요합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는 너무나 많은 형식과 전통에 따라 행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예수님을 잘못 믿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역사와 전통에 얽매인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처음부터 교파를 구분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시대의 정신에 따라 교파가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의 교파가 너무 많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교파가 많은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다양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지상에 있는 모든 교파가 주장하는 것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모든 교파의 시작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전통에 익숙해져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이 익숙한 전통과 방법으로 얽매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핵심에서 벗어난 문제제기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몇몇 율법학자들이 예수 곁에 모여 있다가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모든 유대 사람들은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손 씻는 정결의식을 치르지 않고는 먹지 않았고 시장에 다녀와서도 손을 씻지 않고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지키는 규례는 이것 말고도 잔과 단지와 놋그릇을 씻는 등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1~4절).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전통과 형식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형식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문제를 삼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시장에 다녀와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종교지도자들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도 중요한 문제로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건드리지 않고,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문제를 따지다가 어려움이 생기곤 합니다. 문제는 형식과 전통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파 간의 분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 교리만 옳다고 주장하고, 그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면 결국 헤어지게 됩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에 큰 실망을 하고 교회를 떠납니다.


행위가 아닌 은혜로 받는 구원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교파의 주장이 옳다고 다투는 모습이 어떻게 감동을 주겠습니까. 그런 투쟁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죄인에게 감동이 되고 눈물을 쏟게 해서, 우리 같은 죄인이 용서를 받고 구원받은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교리 때문에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살리신 예수님의 은혜가 놀라와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십자가 보혈이 주는 감동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정결의식이 핵심적인 것이 아닌데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 것처럼 그것만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과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붙들고 지나치게 신경을 쓰면 그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믿게 됩니다. 결국 그러한 이유로 인해 허무함을 느끼고 인생을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친 형식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해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위선자들에 대해 이사야가 예언한 말이 옳았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됐다. ‘이 백성들은 입술로만 나를 공경하고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 사람의 훈계를 교리인 양 가르치고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사29:13).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만 붙들고 있구나’”(5~8절).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형식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과 논쟁을 시작했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교회의 시작은 은혜입니다. 선교사들은 땀과 눈물로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교회가 커지면서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사람의 집이 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주보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세례를 주는 것 등에도 자기 나름대로의 형식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구약의 할례와 같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못을 박은 것처럼 “이런 식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단이다, 신앙생활을 잘못 하는 것이다”라고 지나치게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준이 필요하지만 기준이 지나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이 느껴져야 합니다

왜 한국 교회가 정체 현상이 생기는 줄 아십니까. 역사와 전통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교파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교파가 예수님이나 복음은 아닙니다. 교회를 가도 예수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나중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방에 있는 교회일수록 더욱 심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문제를 제기한 전통과 형식대한 논쟁에 대해 세 가지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첫째, “너희는 입술로만 나를 공경하고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 둘째, “사람의 훈계를 교리인 양 가르치고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자칫하면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가 헛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만 붙들고 있구나.”입니다.


은혜는 날마다 기쁨을 줍니다

결국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사람의 전통만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교회에 출석했다.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고 말하면서 자화자찬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내면에는 신앙이 없습니다. 이렇게 영적 능력이 없으면 무력해 집니다. 기쁨이 없기 때문에 조금만 봉사를 해도 지치고 신경질이 납니다. 마치 자기 혼자서만 일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여러분, 봉사는 샘물이 솟아나듯이 기쁨이 계속해서 샘솟아야 합니다. 밥 먹는 것이 힘들어 지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루 세 끼씩 식사를 매일 먹지만 밥 먹는 일이 힘들어서 지치지지 않습니다. 사역은 밥과 같습니다. 사역을 하면 힘이 납니다. 그 힘은 하면 할수록 더욱 세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조금의 봉사를 하고 ‘이제는 좀 쉬고 싶다’고 말합니다. 잘못된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하면 할수록 힘이 세지는 것처럼 사역은 하면 할수록,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영적으로 맑아지고 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으시는 예수님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만의 전통을 지킨다는 구실로 그럴듯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제쳐 두고 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고 ‘누구든지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출20:12; 출21:17; 레20:9). 그러나 너희는 ‘내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드리려던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됐다’라고 하면 그만이라면서 너희 부모를 더 이상 봉양하지 않으니 너희는 전통을 핑계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 또 너희가 많은 일들을 이런 식으로 행하고 있다”(9~13절).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과의 논쟁에서 본질적인 문제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실 너희들의 내면의 세계는 이런 위선이 숨겨져 있지 않느냐. 신앙과 종교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유명무실하게 만든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시자 종교 지도자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화를 내는 줄 아십니까. 화를 내는 모습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니면 화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불편해 하는 모습이 사실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것이 불편해서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드리는 예물되어야

‘고르반’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만 그렇게 하고 실제로는 예물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부모를 실제로 모시지 않고, ‘고르반’이라는 말만 하면서 종교적인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전통을 핑계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유명무실하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계속해서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또 다른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다시 사람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잘 듣고 깨달으라. 몸 밖에 있는 것이 사람 속으로 들어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오히려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을 떠나 집안으로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이 비유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몸 밖에서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것은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몸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14~19절).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음식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음식을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더러운 음식을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깨끗해 보이는 것도 농약이 있을까 씻고 또 씻어 먹습니다. 사람의 뱃속에 들어가는 음식은 깨끗합니다. 더러운 것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사람의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깨끗하지만 반대로 뱃속에서 나오는 것은 어떻습니까? 더럽습니다.


내면에 숨어있는 악한 마음

“예수께서 이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사람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거짓말, 방탕, 질투, 비방, 교만,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오고 사람을 ‘더럽게’ 한다”(20~23절).

사람의 뱃속에서 나오는 것은 배설물입니다. 배설물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거짓말, 방탕, 질투, 비방, 교만, 어리석음 등과 같은 의미입니다.

칼빈은 “인간의 마음은 악의 제조공장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건드리면 악이 나옵니다. 산에 들어가 가만히 도를 닦으면 좋은 생각을 할까요.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분노, 배신, 보복, 질투, 음란 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성령님의 칼로 하나씩 도려내면 굉장한 것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겉으로 예쁘게 화장을 하고 점잖은 옷을 입고 있어서 모를 뿐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유일한 하나님은 영입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종교적인 위선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을까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얼마나 많은 신들이 존재합니까. 그렇게 많은 신들이 모두 진짜일까요. 일본에 존재하는 신이 800만 개라고 합니다. 동남아시아에도 살고 있는 인구만큼이나 신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신들은 모두 가짜입니다. 그리스에서는 신들의 이름을 짓다가 한계에 부딪혀 ‘알 수 없는 신’이라고 이름 지은 신도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이듯이, 나를 낳아주신 분이 한 분이듯이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육이나 물질이 아닙니다. 그분은 영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은 인격적인 분입니다. 그분은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위선의 가면을 벗어 버리십시오

여러분, 이제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알게 모르게 존재하고 있는 종교적인 위선과 가면을 벗을 때가 됐습니다. 위선과 가면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얼굴 표정이 사나우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꽃 같은 향기가 나고, 부드러운 미소가 있고, 사랑스러움과 생동감이 가득해야합니다. 또한 매사에 의욕이 넘치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위선에는 생명력도 없고, 감동도 없습니다. 당연히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열심히 살다가 하나님 곁으로 갈 때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만을 믿으십시오. 이제 더 이상 우리를 감싸고 있는 종교적인 가면과 위선을 벗어 버리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품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하용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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