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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 (창 49: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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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 (창 49:22-26)


지난 수요일 밤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대한민국이 얼마나 멋진 나라인가를 새삼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지금 보셨지만,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동계올림픽 최종 확정지를 ‘평창’으로 발표하는 순간 가슴이 멎는 것 같지 않았습니까? 로게 IOC 위원장이 2018년 동계올림픽의 강원도 평창 개최가 확정된 직후 "1차 투표에서 결정된 것도 놀랍지만 압도적인 표차를 보고 더욱 놀랐다"고 할만큼 이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전 세계의 다섯 나라만이 그랜드 슬램을 이룩했는데 이 조그마한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 지금도 북한의 위협을 그대로 안고 있는 세계 마지막 분단의 아픔을 갖고 있는 이 나라가 동, 하계 올림픽 월드컵을 치루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정말 지난 60년의 세월을 되돌아볼 때 어떻게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숨을 돌리기도 전에 전쟁으로 전국이 폐허와가 되었고, 나라는 두 동강이 났습니다. 다시는 일어 설것 같지 않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젠 당당히 세계와 어깨를 겨누는 나라의 위상을 우리는 실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젠 우리나라는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바뀌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요즘 지진과 자연재해,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는 나라에 가보면 우리의 도움이 안 미치는 현장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영향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외교관보다 선교사가 먼저 가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는지 모릅니다. 현재 미국 다음으로 전 세계에 선교사가 나가 있습니다. 자그마치 200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전 세계에 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우리 교회가 이대로 머물러 있는 교회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올해 말씀과 기도로 세상을 섬기는 교회의 사명을 가지고 전반기를 보냈습니다만, 교회의 생명은 세상과 다름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르냐에 달려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 그를 고향에서 불러내셨을까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된 우리를 예수 믿도록 불러내셨습니까? 왜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적으로 흐르는 모든 사상의 주제를 보면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데 있습니다. '거룩하라'는 말을 바꾸면 '다른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빛과 어두움이 다르듯, 소금과 썩은 고기가 다르듯,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철저하게 다릅니다. 만일 교회가 세상과 비슷하거나 세상과 같으면 그날로부터 교회는 죽음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성도의 삶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에 잘 간직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요, 선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전하신 유언적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행1: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라,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명령을 받고도 흩어지지 않고 예루살렘에 모여있자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를 일으켜서 그들을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흩어 놓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복음의 축복이 이 땅 모든 곳에 나누어지기를 원하시는 열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세상과 분명 다름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선교하는 교회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사명으로 여기까지 달려 왔습니다. 특히 해마다 여름이 오면 우리교회는 7-8월에 교회학교의 여름 사역과 청년들의 단기 선교를 위해 힘을 쓰고 있습니다. 특히 청년들은 작년에 북한 접경지역 땅 밟기를 위해 2000km가 넘는 압록강과 두만강 접경지역을 다녀왔습니다. 

올해는 2년 전에 다녀왔던 제주도를 다시 갑니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전도가 안되는 영적 불모지입니다. 50만 인구 가운데 불과 3-4%만이 신앙생활을 하는 정말 우리가 눈물로 품어야 할 땅입니다. 이 단기 선교는 이제 우리 청년의 몫만이 아닌 목장이 움직이고 전도기관이 움직이는 점진적인 교회 사역으로 움직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은혜를 세상에 펼쳐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이 포함된 창49장은 야곱이 죽기 전 자기 자손들을 불러 모아 그들이 장차 열두 지파 공동체로서 누리게 될 예언적 축복을 유언의 형식으로 들려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본문은 특히 요셉에 대한 축복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요셉과 요셉의 후손들에 대한 예언이면서도 성경학자들은 이 예언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포괄적인 축복을 보여주는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그 첫째 축복은 “요셉은 무성한 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기 ‘무성한 가지’란 다른 말로 열매 맺는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한 가지에 대한 강조만이 아니라 무성한 가지에서 맺어질 무성한 열매에 대한 증언입니다. 요셉은 청년기가 되기까지 문자그대로 고난의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옥살이를 하고 나와 바로의 꿈을 풀어주고 국무총리가 되면서 그의 인생은 반전을 경험합니다. 그는 결혼을 하게 되고 아들이 태어납니다. 첫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짓습니다. ‘하나님이 다 잊어버리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다 잊어버리시게 한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서도 지난 날의 과거에 대한 기억, 좋은 것이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기억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누가 기억하고 싶습니까? 
  
정태기 박사님이 외국 학자의 말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이 상처와 아픔을 받으면 하루에 600회 정도 우리 자율신경 계통을 계속해서 자극 한다고 합니다. 또 계속해서 우리 생각 속에 그 일을 떠오르게 한다고 합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상처와 아픔을 준 그 사람과 사건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해석을 하고 증오와 원망을 계속해서 쌓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모든 관계를 파괴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다 병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왜곡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뭐든지 오해하게 합니다. 병든 가치관 그리고 잘못된 삶의 습관과 자세로 살다가 결국은 불행한 인생의 종말을 맞게 됩니다. 자신만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족들 그리고 그가 속한 공동체도 함께 죽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의 살아옴에 모든 상처를 다 잊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아이를 낳는데 에브라임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하나님이 열매 맺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 ‘에브라임’과 본문에서 ‘무성하다’는 단어가 어근이 같습니다. 곧 파라(para),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저는 이 말씀이 다산의 풍요 곧 많은 육신의 자손을 둘 것이라는 의미이지만 저는 이 약속이 육신의 자손에게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요셉의 후손을 통하여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 곧 영적 자손들이 일어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흩어져 감으로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무성한 가지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고난을 극복하고 얻어진 값진 축복입니다. 23-24절을 보십시요.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활 쏘는 자는 대적을 의미합니다. 요셉을 핍박하는 자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형제들은 그를 미워하여 노예상인에게 팔아버렸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살이,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살이, 그러나 요셉은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냈습니다. 더 나아가 그 고난을 이기고 나니까, 그런 고난들 때문에 오히려 잘 됐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끌려갔던 것도 감옥에 들어갔던 것도 나중에 보니까 그가 대제국 애굽의 총리가 되는 지름길이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그의 축복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중단시키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요셉은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와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살펴보면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속한 공동체마다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는 무성한 가지가 되어 자기만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고, 담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을 살렸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2. 그럼 과연 요셉과 그 후손들이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임재’ 때문이었습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 그 비결입니다.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마르지 않는 샘은 나무가 자라는데 제일 필요한 필수조건입니다. 물이 항상 있다는 것은 나무가 자라기 위한 최상의 여건을 말합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샘 곁에 심겨진 것이 축복입니다. 시편 1편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라는 말이 있습니다. 에스겔 19:10에는 “네 피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겨진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라고 합니다. 나무가 시냇가에 심겨지고 싶다고 심겨집니까? 나무의 의지가 있습니까? 어쩌다보니 심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시냇가의 나무는 축복받은 나무입니다. 샘 곁에 무성한 가지는 그래서 축복받은 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축복의 원천이신 하나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복은 인간이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 비로소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24절(하)-25절 보세요!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요셉이 받은 축복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의 인생 가운데 임재하시면서 도와주시며 복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기록을 잘 살펴보면, 요셉의 생애 기록가운데 계속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더라.” 마치 음악에서 교향곡에 테마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잘 아시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운명 교향곡(運命交響曲) 있죠. 그 테마가 뭔가요? “딴-딴-딴- 딴~ 딴-딴-딴- 딴~” 이 테마가 중간 중간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요셉의 인생 테마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하나님의 임재)입니다. 본문 22절에서 ‘무성한 가지’라는 표현을 다시 생각해 보세요! 

나무가 아무리 크고 좋아 보여도 샘물 곁에서 멀리 떨어져 보세요! 어떻게 됩니까? 점차 시들어 죽고 마침내 말라 죽습니다. 결코 무성한 가지가 뻗어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까? 죄 문제를 해결해야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과 소통함으로 모든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저절로 이뤄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소통을 더욱 더 원활히 하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신령한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럴 때 인간관계도 회복되고, 물질관계도 회복됩니다. 이게 바로 형통의 원리, 일명 3통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신통(神通)이 이뤄지면, 사람과 소통하는 인통(人通)이 이뤄지고, 마침내 물질과 소통하는 물통(物通)이 이뤄집니다. 이 원리를 잘 담고 있는 성경구절이 바로 요삼2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신경 써야 될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 유지 발전시킴으로 영혼이 먼저 풍성해 지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혹시 고난이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축복의 역사가 중단되지 않습니다. 거꾸로 매달아놓아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결국은 축복이 됩니다. 요셉을 보세요! 노예가 되어도 죄수가 되어도 오히려 더 잘 됐잖아요. 이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롬8:28)의 뜻입니다. 

3. 우리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는 ‘담을 넘는’ 영향력 있는 나눔의 삶이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요셉에 대한 야곱의 예언을 주목해 보십시오. “요셉은-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담을 넘었도다-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축복의 나눔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선한 영향력을 자기 울타리를 뛰어넘어 미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담을 넘은 가지가 이웃들에게 그늘이 되고 열매를 나누는 축복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두 가지 유형의 인생이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는 주로 받는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숙해 가면서 우리는 조금씩 주는 것, 나누는 것의 중요성을 배워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사도도 친히 그가 전도하고 양육한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는 마지막 말씀에서 행전20:35절에서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경험한 최대의 사건은 요한3:16에서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의 사건일 것입니다. 이 소중한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그들이 바로 여러분과 제가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3:16을 경험하고 이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얼마나 요일3:16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라는 신학자는 요한3:16을 체험한 모든 성도들이 요일 3:16에 순종하고 있지 않는 한 아직 그의 믿음의 삶은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일3:16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어지는 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구원의 복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들끼리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과 세상을 향해 복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의 목적이 바로 복의 근원(=복의 통로)이 되게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축복의 웅덩이가 아닙니다. 흘려보내는 축복의 시냇물입니다. 
  
이렇게 사명을 감당할 때 그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이 더욱 풍성하게 축복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복을 나누는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고갈시키는 게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더욱 축복을 확대시켜 줍니다. 
잠11:24-25절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구제하고 나누는데 신기하게 더욱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평생 자기 집 담을 넘지 못하는 인생을 살다가 끝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 한 몸둥아리 붙들고 씨름하다가 인생 다 보내고, 조금 나아보았자 자기 자식들 붙들고 그들 뒷바라지 하다가 인생 다 보내고 담을 넘지 못하는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언제 담을 넘어 보시겠습니까? 내 가정의 담을 넘고 우리 민족의 담을 넘고, 우리 교회의 담을 넘고, 한국 교회의 담을 넘어 열방을 끌어안은 인생, 이것이 은혜받은 인생들이 살아야 할 삶의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성장되었으면 지역 사회와 민족 앞에 나누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빛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소금이 될 수는 없습니다. 빛의 인자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밝아지게끔 되어있습니다. 소금의 인자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썩은 세상은 부패로부터 방지되게끔 되어 있습니다. 역사는 담을 넘는 가지들 - 지도자들에 의해 움직여 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지도력을 가진 사람들, 영적인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 자신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흔쾌히 나눌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성장되고 부흥되고 신령한 빛을 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한 교회, 건강한 교회를 꿈꾸는 우리교회의 비젼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살려내고 사람을 키우고자 하는 동성교회 환상입니다. 여러분들 주님 앞에 쓰임 받는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줄 아십니까? 내게 주신 건강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죽을병에서 나를 살려내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가난 가운데서 나를 부하게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비젼과 환상을 나누어 가진 제자로써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는 이제 이 무더운 여름철에 이 땅에 복음의 열매를 꽃피우기 위해 여름 성경학교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학생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강도 높은 신앙 훈련을 합니다. 특히 청년들은 영적인 불모지에 들어가서 내 물질, 내 건강, 나에게 주신 모든 시간을 쏟아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이 일을 하는 이유가 아닙니까? 저는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인생의 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숀 인생인 것입니다. 
  
요즈음 바로 이런 바람직한 존재의 모습을 시도하는 교회를 가르쳐 ‘미쇼날 쳐치’(missional church)라고 부릅니다. 미쇼날 쳐치는 단순히 선교사를 많이 보내는 교회일 뿐 아니라, 선교가 교회의 존재의 목적이 되어있는 ‘선교적 교회’인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진정한 미쇼날 쳐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진정한 미숀 인생을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진정한 미숀 인생, 아웃리치 인생을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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