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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굿모닝 데이트 (시 143:8, 막 1:35-39) - 묵상, 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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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데이트 (시 143:8, 막 1:35-39)

달라스 윌라드 박사는 그가 쓴 <하나님의 음성>이란 책에서 한 코미디언의 말을 인용해서 매우 중요한 신앙의 질문을 제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면 기도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면 정신분열이라고 하니 어찌된 일인가?” 과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이 가능한 일일까요? 우리가 어떤 분에게 마음을 열어 내 의견을 말하고 또 이어서 그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듣는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대화 혹은 교제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대화가 잘 통하고 교제가 잘 되는 상대와는 깊은 우정을 쌓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기도를 정의하여 “하나님과의 우정 쌓기”라고 말한 분도 있습니다. 연인들의 애정도 이런 대화를 통해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연인들의 데이트가 의미 있게 발전하려면 이런 대화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데이트가 가장 의미 있게 발생하는 시간은 아마도 황혼 녁일 것입니다. 대지에 서서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연인들은 어둠속에서 마음을 열고 은밀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퀴즈가 있습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는? <동해>이지요. 서쪽에서 떠오르는 해는? <서해>이지요. 마음에서 떠오르는 해는 무엇일까요? “마음해”가 아니라, <사랑해>입니다. 연인들마다 사랑을 나누기 좋은 시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녁을, 어떤 사람은 아예 해가 진 밤을 선호하는 암행 족/올빼미 족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 사랑의 대화를 나누기 가장 좋은 시각은 언제 일까요? 물론 이것도 개인에 따라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기자는 그 시각이 저녁이 아닌 아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이 시편기자의 말을 동의하시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한국 교회의 더 많은 성도가 철야기도보다 새벽기도를 좋아하는 이유,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굿 모닝 데이트를 즐거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편에서 하나님과의 아침의 데이트가 필요한 이유, 무엇 때문일까요? 

1.인생의 주인에게 하루를 의뢰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기자는 오늘의 본문 시 143:8에서 무엇이라 고백하고 있습니까?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주를 의뢰함(trust)이니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라면 그분을 의뢰하고 살아감이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최선의 미덕은 누구도 의지하지 않는 독립심 곧 'independence' 라고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독립이야 말로 인간 타락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고백을 요5:30에서 들어보십시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함으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그는 철저한 아버지 의존의 삶 곧 ‘dependence'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오대원 선교사님은 그의 저서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에서 기독교 묵상의 본질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면, 이방 종교의 묵상은 자신을 찾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이런 설명을 하십니다. 날이 밝을 때는 창문을 통해 밖을 볼 수 있지만, 방안에 불을 켜면 우리는 창유리로 자신들의 모습밖에 볼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빛을 잃은 이방 성자들은 아무리 뛰어난 성찰을 가진 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자신의 등불을 방안에 켜고 창 유리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그들은 창문 밖에 태양 빛과 같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묵상은 마음의 창을 열어 창 밖에 계신 참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새벽 미명에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신 이유, 무엇 때문이셨습니까? 막1:35을 읽어 보십시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무엇을 하셨습니까? 기도하셨지요. 왜 기도하셨을까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날 예수님에게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실 일정이 계셨습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만나기 전 먼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영적인 데이트를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만남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만나서 에너지를 소모하는 소비형 만남이 있고, 만나서 에너지를 공급받는 충만한 생산적만남이 있습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에너지가 충만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런 만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벽부터 일어나 그분 아버지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시16:11에 보면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 보다 더 큰 기쁨도 즐거움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남이 그렇게도 즐거운 이유는 그분이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또한 만나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묵상한 시16편의 3절을 읽어보십시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그래서 우리를 이렇게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또한 말할 수 없는 사모함으로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지상의 어떤 즐거움과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인 것입니다. 

브라더 로렌스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사는 삶보다 더 달콤하고 기쁜 삶의 양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탁월한 침례교 신학자요 설교가인 존 파이퍼는 기독교 신앙의 특성을 “기독교 희락주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만남, 굿 모닝 데이트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보다 더 좋은 시작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2.인생의 주인에게 하루를 인도받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 시143:8절을 보십시오. 이 구절에 등장하는 두 번째 기도가 무엇입니까?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1번 기도)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2번 기도)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그는 아침에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과 교제함으로써 그날 하루 다닐 길의 인도를 받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큐티를 오후나 저녁에도 할수 있지만 아침 큐티의 유익이 무엇일까요? 말씀으로 하루의 계획을 세우고 하루 길의 인도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의 본문은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새벽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신 후 제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어제처럼 오늘도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막1:38입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무슨 말씀입니까? 가버나움에 계속 머물러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왜 입니까? 그날의 분명한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복음이 골고루 널리 전해지기 위해서는 오늘은 다른 마을에 가서 사역을 해야 하겠다는 계획이 계셨던 것입니다. 그 계획이 어떻게 세워졌을까요? 바로 방금 전의 새벽 기도, 새벽 큐티의 결과가 아니었을까요? 하나님과의 만남의 결과로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신 것입니다.

달라스 윌라드 박사는 그의 책 <하나님의 음성>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두가지 유형으로 구별합니다. 하나가 기계적인 인도라면 또 하나는 인격적인 인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비인간 혹은 비인격적인 피조물을 대하실 때에는 대부분 피조세계에 심어 놓으신 원리를 따라 기계적으로 인도하시지만, 인간과 같은 인격적인 피조물을 인도하실 때에는 우리의 지성과 감성, 의지를 사용하셔서 말씀과 초자연적인 방편들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인도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는 인도의 유명한 성자적 선교사였던 스탠리 존스의 말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은 인도하실까? 인도하지 않으신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시편기자는 묻는다.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나는 덧붙여 묻고 싶다. 혀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서로 대화 할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이 우리와 말씀하며 대화하지 않으시랴? 나는 하나님 아버지가 말도 없고 대화하지 않으시는 비인격적 실체라고는 믿지 않는다.”

달라스 윌라드는 우리가 주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메시지가 하루 종일 우리의 몸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고 있지만 우리는 그 메시지를 대부분 듣지 못하고 하루를 지나칩니다. 

왜 그럴까요? 주파수가 맞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기대하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주파수만 맞추어져 있다면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도를 경험하며 하루하루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20세기 중반 미국 상원 원목으로 존경을 받던 피터 마샬이란 목사님의 전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영국에서 군목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아침 큐티를 통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는 말씀을 읽고 오늘 하루 주의 음성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 노섬벌랜드의 칠흑같이 어두운 황무지를 지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지역에는 석회암 채석장이 있어서 조심스럽게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피터!”하는 급박한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걸음을 멈추고 “네 누구십니까?”라고 대답했는데 반응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또 다시 더 다급한 음성으로 “피터!”해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다가 넘어졌다고 합니다. 넘어진 채로 어둠속에서 손을 앞으로 내밀어 더듬어보니까, 그는 채석장의 벼랑 끝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때에야 자기를 부르신 주의 음성을 알아채고 감사를 드리고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 걸음만 더 갔더라면 그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기적은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닐지 모르지만, 피터 마샬은 이때를 기점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평생을 사는 자가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즐거워하는 자로 평생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 평생을 하나님과의 굿 모닝 데이트를 즐기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묵상의 최고 최선의 축복은 묵상의 대상을 닮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폭력적인 비디오를 묵상하는 젊은이들은 그것을 묵상하지 않는 젊은이들보다 자살과 폭력에 더 많이 노출될 것입니다. 돈을 묵상하는 자는 돈의 노예가 되고, 성을 묵상하는 자는 성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묵상을 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다른 우상을 묵상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묵상의 대상을 바꾸십시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시고 하나님을 즐거워하십시오.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고 그분과의 사랑에 빠져 사십시오. 시냇가의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복된 인생이 되십시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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