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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마음을 품으라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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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을 품으라 (빌 2:5-11)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것과 다시 재림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복된 삶을 누리게 될 것을 믿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 사람의 모델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갈 때, 이 세상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며,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말씀하시기를“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예수님의 어떤 마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까? 

一. 낮아지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신 모습에 대해 본문 6절~7절에 말씀하시기를“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만큼 낮아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높고 높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추한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한없이 낮아지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분을 우리가 섬기고 있습니다. 한없이 낮아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은 줄로 여기면 후회할일이 생깁니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잠언 18장 12절 말씀에“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하셨습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신비스러운 미소를 띤 아름다운 여인이 도시에서 꽤 이름난 화가를 어렵게 만났습니다.“그림 값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제 초상화를 그려 주시겠습니까?”하자, 여인을 쳐다본 화가는 거만한 태도로 말했습니다.“나는 너무 바빠 당신 초상화를 그릴 수 없습니다. 저기 길 건너편 초라한 곳에 가면 일거리가 필요한 화가가 있소. 그 사람에게 가보시오.”라고 했습니다. 그‘일거리가 필요한 화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였고, 여인은 모나리자였습니다.

잠언 16장 18절 말씀에도“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을 때 은혜를 주시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손을 들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겸손은 가장 소중한 삶의 요소이며 지혜입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어거스틴은 말하기를“모든 덕은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인데 겸손이 그 첫째 계단이다. 이 첫째 계단에 오르면 그 다음에는 위로 올라가기가 훨씬 쉬워진다.”라고 했습니다.

감리교 창설자인 존 웨슬리는“겸손은 하나님의 나라에 풍부한 창고를 발견하는 눈이요 그것을 받는 손이다.”라고 했습니다. 

안토니 라는 성자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마귀가 온 하늘에 그물을 펴놓고 그물에 걸린 사람을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안토니가“어떻게 하면 그물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하고 탄식을 하고 있는데 천사가 그 곁에 와서 말하기를“저 그물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오직 겸손한 사람뿐이다.”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말하기를“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겸손이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교만이다.”라고 말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교훈하시기를“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립보서 2:5~7)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 8절~11절에는 잔칫집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상좌에 앉지 말라. 만일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오면 말석으로 내려앉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무슨 망신이냐. 발석에 앉았다가 강권해서 올라앉으면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11절에 말씀하시기를“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낮추는 것은 곧 주님이 가르쳐주신 삶의 지혜입니다. 

몇 년 전 어느 가을에 목회계획을 세우고자 자주 가는 수양관에서 며칠간 기도하며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뒷산에 있는 등산로를 따라 산길을 가다보니까 태풍에 스러진 큰 나무 한 그루가 등산로를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만 나무 밑으로 지나 갈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러진 나무에, 코팅한 종이에 글씨를 써서 매달아 놓았습니다.“겸손 연습, 머리를 숙이면 부딪치지 않습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세를 조금만 낮추면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습니다.

二.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죄인 취급을 받아 억울한 재판을 비롯하여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침을 뱉고, 뺨을 치며, 옷을 벗기는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모습은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 양과 같았다고 했습니다(이사야 53:7). 격한 감정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밝히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대항할 만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54절에 말씀하시기를“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라고 하셨습니다. 그 억울한 순간에 그들을 당장 멸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감정을 억제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감정대로 살아가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상한다하여 끌어 오르는 대로 할 말을 다 하고 나면 후회할 일이 생기게 됩니다.

오래전 어느 부대 사단장이 연대를 순시하면서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흥분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발로 연대장의 무릎을 차고 지휘봉으로 어깨를 내리 쳤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서 나갔습니다. 이때 연대장이 사단장 등을 향해 총을 쏴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연대장도 훌륭한 대령이어서 그 후 지인들이 아무리 진정서를 제출해도 하극상의 큰 죄를 범했기 때문에 결국 사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 다 흥분된 감정을 이기지 못해 빚어진 비극입니다. 

공중전화를 걸기 위해 기다리면서 앞에 있는 사람의 통화가 길어지자 그만 그 사람을 죽인 경우가 있었습니다. 순간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것이 평생 동안 지울 수 없는 후회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의 성격이 급하다고 합니다. 도로정지선에서 신호가 바뀌었을 때 조금만 늦으면 여지없이 빵빵하고 경적을 울립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시키자마자 빨리 빨리를 외칩니다. 원인은 고추를 먹기 때문에 그렇다고도 하고, 라면이 나온 후부터 성격이 급해졌다고도 합니다. 옛 우리의 조상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여유가 있었습니다. 

잠언 12장 16절에 말씀하시기를“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사람은 수욕을 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잠언 16장 32절에도“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낮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감정을 다스리면 후환이 없습니다. 평화롭습니다. 후회를 남기지 않습니다. 끌어 오르는 격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다짐으로 되겠습니까? 노력으로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닳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 안에 계셔야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영 즉 성령의 열매는“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갈라디아서 5:20)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되 내 육신의 필요한 것만 구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내안에 임재 해 계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내 마음을 주관하셔야 합니다. 그리하면 순한 양처럼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5장 18절에는“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고 하셨습니다. 

三. 탐심을 버리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2장 15절에 말씀하시기를“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를 버리시고 이 추하고 더러운 세상에 오신 것은 자신의 욕심을 다 버리신 증거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명예욕도, 권세욕도, 물욕도, 끝이 없습니다. 탐심을 절제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루시퍼는 수많은 천사를 거느리며 하나님께 수종드는 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보좌까지 찬탈하려하다가 저주를 받고 쫓겨나서 사탄이 되었습니다. 사탄의 본성은 탐욕과 교만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다 욕심이 있습니다. 이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안 됩니다.

누가복음 12장에는 두 형제가 재산 분배 문제로 다투다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처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말씀하시기를“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누가복음 12:11)라고 책망하듯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해결 방법을 말씀하시기를“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 15) 하셨습니다. 소유를 늘리려 하지 말고 욕심을 줄이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이 많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더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누가복음 12:16~21) 고 하셨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나눠 줘야할 때 나눠주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베풀어야 할 때 베푸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바쳐야할 때 바치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은 영원히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누가복음 16:9) 하셨습니다. 잠언 28장 16절에는“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북한에서 같이 의학을 공부한 두 사람이 남한으로 내려와서 한분은 목사가 되었고, 한분은 의사로 서울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집사의 직분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집사인 친구 의사가 바쁘니까 교회를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친구 목사가 교회에 열심히 나오기를 권면했습니다. 친구 의사는 말하기를“나 박사 학위 받고 열심히 나갈게”라고 했습니다. 학위를 받은 뒤에도 역시 교회에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친구 목사가 신앙생활 잘하기를 다시 권면했습니다. 

친구 의사가 이번에는“병원 빌딩 하나 사고 나갈게”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에 만나니까 얼굴이 핼쑥해졌기에“왜 얼굴이 안 좋으냐?”라고 물었더니“소화가 좀 안 돼서 그래. 괜찮아.”라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후“간암 말기가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그 후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장례식 때 가서 보니까 관위에 의사면허증, 박사학위증과 무슨 표창장들이 즐비하게 올려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부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삶의 순서에 대해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 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고 하셨습니다. 

四. 타인을 비판하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대게 남의 험담이나 비판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37절에 말씀하시기를“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7장 1절~5절 말씀에는“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하셨습니다. 

나와 너의 차이는 너무 큽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아주 냉정합니다. 내 자식이 집안에서 뛰놀면 씩씩하게 보이고, 남의 자식이 뛰놀면 버릇없어 보입니다. 자기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필요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고, 남이 말을 많이 하면 수다스럽다고 합니다. 자기가 약속시간에 늦은 것은 바빠서 그렇고, 다른 사람이 늦으면 게을러서 그렇다고 합니다. 자기가 값비싼 물건을 사면 필요해서라고 하고, 남이 고급 물건을 사면 사치스럽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후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속에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4절에 말씀하시기를“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면 안 됩니다. 마귀는“참소자”라고 했습니다. 잘못하면 마귀의 꾀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25장 9절 말씀에“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을 누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혹시 싸울 때가 있어도 남의 깊은 비밀이나. 치명적인 약점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거짓말로 터무니없는 비판을 합니다. 그러다가 마귀의 도구가 됩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할 말을 줄이고 입술을 지켜야 합니다. 다 쏟아 놓으면 그 당시에는 통쾌할지 모르나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생깁니다. 야고보서 1장 26절에“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입조심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모든 신앙생활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입조심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모든 신앙생활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이 입술은 분명 내 것인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도무지 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이 내 입술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은 시편 141편 3절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했습니다. 입술의 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사람의 힘이나 노력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스스로 낮아진다고 해서 멸시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높아짐의 방법입니다. 고차원의 지혜 즉 하늘의 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낮아지셔서 망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장 9절~11절 말씀에 낮아지신 예수님의 삶의 결과에 대해 말씀하시기를“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낮아지면 부딪힐 일이 없습니다. 
낮아지면 언제나 어디서나 평안합니다. 
낮아지면 존경을 받습니다.

미국 존슨 대통령이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갈 때에 마지막으로 전용 비행기를 타고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차를 타고 간다면 비서를 시켜서 표를 사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직접 나가서 긴 줄을 서서 기다리며 표를 사는 모습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어제까지 세계를 움직이던 사람이 기차표를 사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낮아짐이 귀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낮아진 자에게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 말씀에“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낮아진 삶은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낮아진 삶은 이 세상에 빛이 됩니다.
낮아진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다.

낮아진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히 임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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