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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 같은 평화 (사 66:11-12, 눅 19: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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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같은 평화 (사 66:11-12, 눅 19:38-39)

강은 인류의 역사와 문화의 발상지입니다. 중국의 황하, 이집트의 나일, 인도의 간지스가 문명을 태동한 강들입니다. 강은 인간의 젖줄입니다. 모든 대륙에는 강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해 있습니다. 강이 없이는 도시가 발달하지 못하는 것은 강이 없이는 사람이 살기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은 ‘두 강 사이에 있는 땅’이란 뜻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끼고 있는 땅입니다. 이 지역에서 세계 최초의 농업이 발달했습니다. 이곳에서 수메르인, 바빌로니아인, 아시리아인이 살던 곳입니다. 수메르인은 설형문자인 쐐기문자를 사용하였는데 훗날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바빌론인은 함무라비법전을 만든 문화의 선구자입니다. 강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생명선이며 인간의 삶의 자리입니다. 
  
세계의 대도시들이 강을 끼고 발전하였습니다. 강을 끼고 있다는 것은 도시의 생명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며 동시에 강을 끼고 있는 도시가 풍광이 좋기 때문이다. 독일의 라인강을 끼고 본이나 다른 도시들이 발달했습니다. 프랑스의 세느강을 끼고 파리가 발달했습니다. 미국의 포토맥강을 끼고 워싱턴 DC가 발달했습니다. 영국의 템즈강을 끼고 런던이 발달했습니다. 한국의 한강을 끼고 서울이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제 눈으로 아무리 봐도 어딜 가도 한강만큼 크고 예쁜 강은 없습니다. 강이 없는 대도시가 베이징인데 어떻게 그렇게 큰 도시가 강도 없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에덴동산은 강을 중심으로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10에는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라고 합니다. 첫째 강은 비혼, 둘째 강은 기혼, 셋째 강은 힛데겔, 넷째 강은 유브라데입니다. 강들 때문에 에덴은 비옥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동산이었습니다. 
  
성경의 강은 은혜의 상징입니다. 시편 46:4에는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고 합니다. 고요히 하나님의 성, 하나님의 성소를 기쁘게 하는 강입니다. 성경의 강은 은혜와 평강의 상징입니다.  
  
옛날에는 ‘치산치수’가 임금의 덕목이며 능력이었습니다. 산에 나무가 자라지 않고, 강이 범람하고 홍수가 나면 제왕으로서의 덕목이 불합격이라는 말입니다. 산을 잘 다르시고 물을 잘 다스려 강이 속을 섞이지 말아야 좋은 임금이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48:18에는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라고 합니다. 범람하고 홍수를 일으키는 강이 아니라 고요한 강입니다. 유유히 흐르는 강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잔잔한 강 같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강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요단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단강은 갈릴리와 사해를 잇는 강입니다. 요단강은 팔레스타인에 풍요를 가져다 줍니다. 요단강은 축복의 강입니다. 야곱의 천사가 씨름하여 하나님의 복을 얻어낸 곳이 요단강입니다.요단강은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은 곳이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곳입니다. 

요단강은 영원을 향하여 건너는 곳입니다. 요단강 건너편은 가나안입니다. 요단강을 건너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단이 가지고 있는 요건들은 강의 모든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단이 나의 강이 되게 하세요. 하나님의 은혜, 평강이 요단강 같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66:1에는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라고 합니다. 강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는 이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평강을 강같이 주십니다. 

이사야 66:12 상반절에는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라고 합니다. ‘강 같이’가 어떤 상태를 의미합니까? 강은 원래 위에서 아래로,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은 물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강은 항상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강은 절대로 낮은 데서 높은 데로 흐르지 않습니다. 
  
간혹 청계천을 나가서 걸을 떼가 있습니다. 갈 때마다 서울 도심에 이런 물이 흐른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청계천의 바닥 경사도는 평균 363분의 1이리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상류에서 하류까지 363미터 가야 바닥이 1미터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경사지만 약간의 경사가 물을 흐르게 만듭니다. 경사가 전혀 없다면 물은 가만히 갖혀 있을 것입니다. 경사도가 2만분의 1인 한강도 하류로 바다로 흐릅니다. 육안으로 전혀 구분이 안 되는 약간의 경사에도 물은 흐릅니다. 하나님과 1미터 떨어진 사람도 평강하고, 363미터 떨어진 사람도 평강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평강은 강처럼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경에 약간 다르게 번역한 평강, 평화, 평안, 화평은 모두 같은 말이고 같은 뜻입니다. 이 모두는 하늘의 것입니다. 이 땅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늘의 평강을 상실하고 죄의 산물인 시기와 질투와 싸움과 전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누가복음 19:38에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합니다. 하늘에는 평화가 가득합니다. 평화는 하늘의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평화를 땅에 내려주십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평화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성경적 평강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우리 평강의 근원입니다. 로마서 5:1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우리가 화평을 누리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4:27에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예수님만이 평화를 주실 수 있고 예수님의 그 평안은 세상의 평화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갈릴리에 나가셨는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인데 예수님은 깊이 잠드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예수님의 평안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걱정과 근심과 염려가 밀려와도 깊이 잠들 수 있는 평안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강은 예수님의 평안과 같습니다. 세상의 폭풍 중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입니다. 세상의 평안은 참 평안이 아닙니다. 세상의 샬롬은 샬롬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샬롬이 없습니다. 평화라는 히브리어 ‘샬롬’의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단테는 “그분의 뜻 안에 우리의 평화가 있다”(In la sua voluntade e nostra pace)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강같이, 시내같이 주리니”라는 말에 “주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노테’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주먹이나 텐트 등을 펼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평안을 펼쳐보여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강의 범람으로 전에 강이 없던 곳에 새 지류가 생기듯이 하나님의 평강이 힘 있게 전파되고 뻗어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강의 범람은 고통스런 일입니다. 애급의 바로는 나일강의 범람을 막으려고 애섰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일강의 범람은 강 유역 전체를 비옥하게 한다고 합니다. 고통스런 일이지만 유익한 것이 강의 범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백성에게 흐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평강이 넘쳐흘러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평강이 넘치게 합니다. 강의 본류에서 시작하여 지류까지 풍성하게 하듯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 세상이 더불어 미소를 짓습니다. 나의 울음은 내내 나 혼자 울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미소 지으면 다른 사람이 미소 짓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면 “왜 웃느냐”고 얻어맞습니다. 어쨌든 미소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안도 전염성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은 좋은 직장 다 버리고 신앙을 지키려고 다짐했습니다. 직장을 잃고 나니 매일 돈 걱정입니다. 딸이 중병에 걸렸는데 치료비가 없어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루하루 끼니걱정을 해야 합니다. 여러 자녀들 학비걱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염려를 다 맡기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직장을 잃은 것이 아니라 버린 것인데 당시에 사람들은 그 좋은 직장 버렸다고 어리석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장로님은 걱정도 염려도 하지 않습니다. 늘 마음이 평안합니다. 장로님의 그 평안은 자신뿐만 아니라 온 가족을 평안하게 하고, 주위사람들까지 평안하게 하였습니다. 한 분의 평안이 온 주위를 평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계평화지수’(WPI)가 있습니다. 평화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네덜란드이고, 그 뒤가 스웨덴, 덴마크, 스위스입니다. 한국은 조사대상 국가 76개국 가운데 47위이고, 미국이 52위였습니다. 평화지수는 경제지수나 지식지수와는 별개입니다. 평화지수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지수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결코 평화지수가 높을 수가 없습니다. 민수기 6:26에는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아론이 축복합니다. 우리에게도 여호와의 그 평강이 위로부터 항상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시내같이 주십니다. 

이사야 66:12 하반절에는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라고 합니다. 샬롬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샬롬을 강같이 주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신다고 합니다. 히브리인의 관념에는 강이나 시내의 구분이 별로 없습니다. 바다와 호수도 구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흘러야 영광도 넘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평안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같이 흐르면 나라가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평안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하나님의 영광이 넘치면 대한민국이 평안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영광이 넘치면 교회가 평안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광야 공동체는 교회이고, 이스라엘 백성이고,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광야는 성막의 영광과 더불어 산 곳입니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끊임없이 머물렀습니다. 성막 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잠시도 떠나지 않고 머물렀습니다. 60만 백성 모두가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따라갔습니다. 그 나라의 영광은 그 백성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시내 같게 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에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환상이 있습니다. 성전의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와 처음에는 발목에 찼습니다. 조금 후에는 무릎에 찼습니다. 또 얼마 후에는 허리에 찬 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물이 넘쳐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평강, 하나님의 영광의 강이 하나님의 전에서부터 흘러나와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의 강은 쉬지 않고 흐르는 강입니다. 쉬지 않고 흘러나아서 넘치게 하는 강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생명수 강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에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찬란한 영광의 나라입니다. 빛의 나라입니다. 기쁨의 나라입니다. 생명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영광의 강이 끝없이 흐르는 나라입니다. 
  
독일의 나치가 독일을 지배하던 시대, 유대인을 수용하던 홀로센버그 수용소를 담당하던 독일의 늙은 군의관 베스게씨가 있었습니다. 그의 1945년 4월 9일 일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 때는 히틀러에 의해서 많은 독일 장성들도 사형 당하고 외국인들이 사형을 당했다. 오늘 새벽 5시와 6시 사이에 카나리 제독과 오스트 장군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그 중에 나의 영혼을 사로잡은 것은 본회퍼목사였다. 

본회퍼목사는 히틀러 암살에 가담하여 잡혀 사형선고를 받고 그날 처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처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교수대에 올라가서도 잠시 동안 기도했다. 그는 평화롭게 보였다. 그의 얼굴에 너무나 평안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오랫동안 사형수를 돌보는 의사였지만 그런 사람은 처음 보았다. 나는 50년 동안 의사의 일을 했지만 저런 죽음을 본 적이 없다. 저렇게 평안하고 저렇게 기쁘고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본회퍼목사님이 사형을 당할 때 그의 나이 39세였습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근대의 신학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였습니다. 그의 안에 있었던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평안은 주님이 주신 주님의 평안이었고, 그의 기쁨은 성령이 주신 기쁨이었습니다. 
  
요한복음 7:38에는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합니다. 본회퍼목사님 안에는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쉼 없이 흐르는 생수의 강, 은혜의 시내가 배에서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평강의 강이 우리 내면에서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에 의해 이 세계가 운행되면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질서대로 운행되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궁창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냅니다. 우리 사람이 하나님의 질서대로 살면 하나님의 평안, 하나님의 샬롬이 넘칩니다. 강물이 흐르듯 살면 평안합니다. 

우리 인간은 생체리듬대로 강물 흐르듯 살면 건강합니다. 졸리면 잠자고, 어두워지면 자고, 훤하면 깨는 것이 물흐르듯 사는 삶입니다. 사람이 닭 보다 늦잠자면 되겠습니까? 사람이 새보다 늦잠자서 새소리에 깨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안 되지요. 사람이 강물 흐르듯 사는 것이 평안하게 사는 길이며 건강하게 사는 법입니다. 

  
결론 

20세기의 욥이라 불이는 스파포드(H. G. Spafford)목사님은 아내와 세 딸 모두를 바다에서 하루아침에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삼켜 버린 그 바다 위에서 찬송가 413장의 가사를 만들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목사님은 인생의 큰 풍파가 와도 잔잔한 강과 같은 평화를 잃지 않았습니다. 거센 풍랑 가운데서 잠든 예수님의 평화가 그에게 있었고 지금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주님의 그 평화가 우리 배에서 흘러나와 늘 강 같은 평화를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에 넘쳐흐르는 평화가 우리의 삶이 되어 우리의 평강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강 같은 주님의 평강으로 물 흐르듯 이 세상의 삶이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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