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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쉼의 날, 치유의 날 (막 3:1-6) -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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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의 날, 치유의 날 (막 3:1-6)

주일은 생명을 주는 쉼의 날입니다

종종 성도님들이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안식일과 주일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안식일은 우리가 아는 대로 구약전통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날은 쉼의 날이기도 합니다. 주일은 신약전통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날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날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주일”, 즉 주님의 날이라 부르고, 예수님의 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에 온 하늘과 땅을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이르러 당신께서 만드신 하늘과 땅을 보시면서 “참으로 보기가 좋구나!” 찬탄을 하시며 쉼의 기쁨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면서 인간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하나님인 나도 쉬었으니 너희들도 쉬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 일중독에 빠지지 말고 쉼을 누리라고, 아니 쉼이 곧 일의 목표라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또 구약전통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종이었지만 내가 너희를 자유자로 만들어주었으니 이제 안식일을 지키라.” 무슨 뜻일까요? 안식일에 내가 자유자임을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얽매였던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안식일의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주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오전부터 오후까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토요일과 안식일에는 무덤에 머무르셨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에 무덤에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생명의 날입니다. 부활의 날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긴 날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용서받았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증거를 세우신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의 안식일이 초대교회를 통해서 주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신도들은 주일은 안식의 완성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쉼의 날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진정한 쉼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된 것은 바로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선물을 주신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유를 주신다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억압해서 해방되는 축복을 주신다니! 하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생명을 주신다니! 세상에 이것보다 더 좋은 축복의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구약의 출애굽기를 읽을 때마다 제 마음에는 엄청난 즐거움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삶을 추적하다보면 가슴이 막 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자유가 있구나. 죄가 용서되는구나. 병이 치유 받는구나!’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저 당당함이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분은 자유였습니다. 사람을 억압하는 것에 대하여 참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 하나님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을 훼방하는 것을 물리치셨습니다. 그것이 질병이든, 귀신이든, 종교적인 사상이든 상관없었습니다. 이 어둠의 세력들에 대해서 “아니다!” 라고 선포하시면서 생명의 사건을 만드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주님 앞에 드러냅니다. 육체의 연약함을 주님 앞에 드러냅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의 쉼과 하늘로부터의 치유를 우리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주일로 지키는 이 날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복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의 날에 예배를 놓치는 것은 하나님을 놓치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배를 상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쉼과 은총을 상실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은 쉼을 얻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영혼의 치유, 육체의 치유를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것저것으로 쉼과 평화를 얻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잠깐 뿐입니다. 진정한 평화와 진정한 쉼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만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손 마른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한편 구석에는 한쪽손이 말라비틀어진 사람이 앉아있었습니다. 스스로 온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을 넘어트리려고 작정했던 바리새인들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불러들인 것일까요? 성경에 정확히 기록되어있지는 않습니다만 후자에 가까운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2절을 읽어보면 어느 정도 그 사실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마가복음 3:2)

여기에 “주시한다”라는 말을 옛 번역으로 보면 “엿본다”라고 하였습니다. 몰래 감시한다는 뜻입니다. 덫을 쳐놓고 예수가 과연 이 손 마른 자를 치유하는가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손 마른 자를 치유하는 것을 보면 안식일법 위반으로 고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음모를 꾸몄습니다. 악을 도모했습니다. 6절 말씀은 그런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마가복음 3:6)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손 마른 사람을 보는 관점은 현격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 받는 사람이 불쌍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치유받기를 원했습니다. 어떻게든 그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받고 쉼을 누리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중 속에서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세워주시고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이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보시면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마가복음 3:3)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에게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구석에서 감추고 앉아 있느냐? 이 가운데로 나와라. 모든 사람들 앞으로 나와라. 내가 너를 고쳐주겠다.” 그러면서 초청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내밀게 하시면서 고쳐주십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마치 예수님이 성형의사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성형수술을 받는 사람들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과거에 저는 성형수술을 받는 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 아니하여 반대했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제일 먼저 배우는 한자어가 이것입니다. 내 몸, 내 머리털, 내 살갗은 부모님으로부터 내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신체 어디도 손상시키지 않고 잘 보존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의미로 이 몸에다 칼을 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성형수술을 하고 나서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참 많이 봤습니다. 그러니 몸만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망가집니다.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왜 저렇게 생활을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세 번째 이유입니다. 이 시대가 외모지상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거기에 아첨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본모습을 너무도 쉽게 바꾸는 것, 아니 내면적인 세계를 무시하고 외면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외모지상주의를 추구하는 이 시대가 못마땅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형수술을 받은 사람의 고백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외모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마음속에 지병처럼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형수술을 받고 나서 자기 마음속에 있었던 콤플렉스가 해결되는 기쁨을 맛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게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고생했겠구나. 얼마나 마음속에 시달렸겠는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겠는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그가 얼마나 힘들어 했겠는가?’ 그러면서 성형 수술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어졌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속에 확인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외모 콤플렉스는 성형 수술을 했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 얼마나 멋진 사람들이 많습니까? 키가 크고 몸매 좋고 얼굴 잘생긴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언제나 브래드 피트 같은 남자가 옆에 있습니다. 언제나 안젤리나 졸리 같은 여자가 옆에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열등감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내 마음에 “나는 나”라는 자의식이 있은 후에야 정말 힘들 때 성형수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형수술을 위한 수술은 중독에 빠지게 되어있습니다. 영원히 내 마음에 흡족함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마치 순식간에 공개적으로 성형수술을 하시는 분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육체의 병을 고치시기 전에 먼저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한 가운데에 서라는 것입니다.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구석에 더 이상 있지 말고, 숨고 도망가지 말고, 네 인생에 너를 주인공처럼 삼았으니 이 사람 많은데 중심에 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모든 사람들 앞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삶의 중심에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선다는 것은 하나님이 너를 소중한 존재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조롱받지 않은 위엄이 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앞에 나서도 부끄럽지 않을 영예와 명예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기고, 내가 나를 존중히 여기고, 내가 이 세상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오직 하나뿐인 존재임을 깨닫고 나서야 육체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중앙에 서라. 한 가운데 서라.” 그리고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십시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마가복음 3:5)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게 했습니다. 이것은 손 마른 사람이 모두 주저했던 것들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서기 싫었습니다. 누가 자신의 손을 볼까봐 그 동안 감추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면서도 싫어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혐오스러웠습니다. 마른 손은 보이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내밀 수 없었던 그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에는 조금 내밀어도 봤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게 뭐냐고 질문했습니다. 사람들이 웃었습니다.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그래서 손 내미는 것을 멈췄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손이 완전히 오그라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마른 손을 내밀라고 말씀합니다. 네 약점을 내밀어보라고 말씀합니다. 네가 끙끙 앓았던 문제가 있으면 한번 토해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이 손 마른 사람이 자신의 손을 주님 앞에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성경에 의하면 그 손이 정상으로 바뀌어졌다, 회복되었다, 고쳐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남이 보면 싫은 것, 나를 스스로 봐도 감추고 싶은 것, 그것을 주님께 내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가운데 서라. 부끄러워하지 마라. 너는 하나님의 소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다 그러니 네 모습을 그대로 내게 보여라. 움츠러들고 오그라들었던 그 손을 내게 펴서 보이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너무나 많이 감추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감추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꾸만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 내려놓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50%도 내려놓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98%를 내려놓는데 마지막 2%를 내려놓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 2%는 안 돼요. 만지지마세요. 이것만은 내놓지 않을 거예요. 이것은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에요. 이것을 건드리지 마세요.” 하는 부분들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육체가 곤고합니까? 그것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우리에게 지혜가 모자랍니까? 하늘의 지혜를 달라고 하십시오. 분별력이 모자랍니까? 인간관계가 좋지 않습니까? 성품이 좋지 않습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내 성품이 이렇습니다. 나는 화를 잘 냅니다. 나는 근심걱정이 너무 많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해보려고 하지만 용기가 부족합니다. 담대함이 없습니다. 모험심이 없습니다. 도전의식도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연약한 부분, 내가 아파하는 부분을 그냥 하나님께 아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중심에 서라는 것입니다. 제발 도망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정쩡하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움츠러들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왜 축복일까요? 저라고 하는 사람도 굉장히 소심한 사람입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입니다. 사람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사람입니다. 내 속에 있는 조그마한 잘못 가지고도 나를 자책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것을 즐김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순진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옹호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스스로 얽어맸던 것들을 풀어주셨습니다.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담대함도 주셨습니다. 용기도 주셨습니다. 네 가슴을 펴고 살라는 하나님의 은총도 허락해주셨습니다. 저도 화가 나면 열불이 나고 자주 화를 내는 사람 중에 한 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게 참는 법도 가르쳐주셨습니다.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참된 안식과 회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에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문제점도 있습니다. 연약한 점도 많습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주시는 것을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내가 쉬길 원합니다. 참된 안식을 주십시오. 참된 휴식을 주십시오. 내 마음에 평안을 주십시오. 하나님, 근심과 걱정으로 내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이 스트레스를 풀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세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 중앙에 서라. 네가 주인공이다. 네 인생을 당당하게 살아라.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러니 네 속에 묻어둔 것, 너의 마른 손을 내밀라.” 

이성복이 쓴 「그리워할 줄 모르는 병」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병이란 그리워 할 줄 모르는 것.
사람들은 그리워해서 병이 나는 줄 알지.
그러나 병은 참말로 어떻게 그리워 할 줄을 모르는 것.

바리새인들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습니다. 눈물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습니다. 눈물이 있었습니다. 감동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고통 받는 사람이 건강하게 회복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만지시고 고치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날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은 우리가 이 자유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나를 죄악에서 자유하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를 억압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배드릴 때에 이 억압에서 나를 자유하게 하옵소서. 이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리고 내게 주신 축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달려가게 하옵소서.”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자꾸만 도망가지 말고, 구석구석 도망가서 움츠러들지 말고, 이제 한 가운데 서라. 그리고 네 오그라들었던 손, 너를 답답하게 하고 너를 고통스럽게 했던 그 손을 내밀라!” 

우리가 이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것이 주일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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