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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4) (마 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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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4) (마 5:38-42)

옛 고사성어 중에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엎드릴 와(臥)’, ‘섶나무 신(薪)’, ‘맛볼 상(嘗)’, ‘쓸개 담(膽)’ 자를 씁니다. 이 말에 전해지는 고사가 있습니다. 

옛 중국 춘추시대 오 나라 왕 ‘합려’가 월 나라 왕 ‘구천’과의 전쟁에서 패하였습니다. 그때 오 나라의 ‘합려’는 화살을 맞고 심각한 부상을 당해 죽게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아들 ‘부차’를 불러 놓고 이 원수를 갚을 것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 나라의 왕이 된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와신’, 즉 가시가 많은 땔나무 위에 엎드려 잠을 자며 복수심을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전쟁에서 이겨 월 왕 ‘구천’에게 모욕을 줌으로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월 왕 ‘구천’이 오 왕 ‘부차’에게 복수하기 위해 ‘상담’, 즉 항상 곁에 쓸개를 두고 쓸개의 쓴맛을 보며 복수심을 불태우다가 결국 복수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와신’이나 ‘상담’, 즉 인간에게는 이러한 복수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인간에게는 복수심이 있습니다.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앙갚음의 마음이 있습니다. 복수심이란 자기가 상대방에게 받은 피해를 상대방에게 그대로 갚으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당한 불이익을 상대방에게도 동일하게 불이익으로 되돌려주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일전에 필리핀에 갔을 때, 십 수 년을 필리핀 빈민 선교에 앞장서서 지금은 많은 것을 이루어 놓은, 신학대 동기, 홍성욱 선교사님과 만나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필리핀 빈민들에게 자극을 주고, 본인들이 일어날 의지를 불러일으키려고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된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필리핀 사람들은 밸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밸’이란, ‘배알’의 준말인데, 이 뜻은 ‘속마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배알이 뒤틀리다’, 또는 ‘배알이 꼴리다’라는 말로 가면 ‘속이 뒤집혔다’는 것입니다. 홍 선교사님의 말로는 그 나라 사람들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배알’이 있다는 것인데, 그 말 속에는 배알이 뒤틀렸을 때, 앙갚음하려는 복수심도 우리 한국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산상설교 가운데의 한 말씀입니다. 

(38~39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1.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라는 구약의 율법입니다. 

구약 성경에 ‘피의 보복법’이 있습니다. (창9: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다른 사람을 피 흘리게 하면 그도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부분은 구약 성경에서 3군데(출21:23~25, 레24:19~20, 신19:21)에 나오는 율법으로 ‘동해보복법’이라고 합니다. 

(출21:23~25)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 ‘동해보복법’이라는 용어는 로마의 성문법인 ‘십이동판법(十二銅版法)’에 있는 한 조항에서도 발견되리 만치 고대 사회의 역사 깊은 법규이자 형집행 방법이었습니다. 고대 근동법 중, 구약성서 이외에 ‘동해보복법’이 언급되어 있는 법전은 ‘함무라비(Hammurabi)\' 법전입니다. 고대 법에 나타나는 ‘보복률(Lex Talionis)\' 사상은 남에게 치유될 수 없는 영구한 상해를 입힌 자는 그 대가를 반드시 되돌려 받아야만 한다는 고대 사회의 단순한 보복 논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법은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눈에는 눈‘이라는 동해보복법은 복수의 지나침과 과도함을 억제하기 위한 법입니다. 

피해자에게 피해를 입힌 만큼만 가해자는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공평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복수심이 있으며, 이런 복수심은 한계를 넘어서서 받은 피해보다 더 많은 형벌을 가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불공평한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는 눈‘이어야만 합니다. 

2) ‘눈에는 눈’의 동해보복법은 개인이 아니라 재판관에게 주어진 법입니다. 

개인이 사적으로 ‘눈에는 눈’의 심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판관이 공정하게 재판해서 ‘눈에는 눈’의 형벌을 주어야 합니다. 즉 ‘눈에는 눈’의 원리는 죄에 대한 사적 복수의 원리가 아니라 공적 복수의 원리로 주어진 것입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이 동해보복법을 규정해 놓으셨지만, 실수로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게 되는 경우를 생각하셔서, ‘도피성’제도를 만들어 놓으셨는데, 이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2.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 구약의 ‘동해보복법’을 말씀하시면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먼저, 그 배경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이러한 동해보복법을 오용했습니다. ‘눈에는 눈’을 복수를 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수를 장려하는 근거로 사용했습니다. 

또한 ‘이에는 이’를 공적 심판이 아니라 개인적인 복수의 법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눈에는 눈’이라는 율법의 목적을 오해하고 남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악한 자(악)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악을 대적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악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그냥 무한정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악에 대한 대항을 성도 개인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 맡깁니까? 국가와 사회에 맡긴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군대, 경찰, 재판소를 운영하며, 범인에게 형벌을 주어 이 세상이 무법천지가 되지 않고, 세상이 악의 소굴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범죄 천지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이것이 국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회적 범죄나 악은 국가의 기능에 맡기고 우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복하거나 대적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수하며 사는 사회는 무섭고 잔인한 사회입니다. 또 우리가 우리의 특권과 권리만을 주장하며 산다면 이 사회는 살벌하고 무자비한 사회로 변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두 가지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보복과 복수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자기의 권리를 바로 찾아야 한다고 민주화의 이름으로 외치는 무질서와 폭력입니다. 물론 우리의 권리는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는 그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사악성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이기적인 동기와 잘못된 욕심을 멋진 이름으로 합리화하려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억울하게 누구에게 한 대 맞았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복도 무서운 보복이 있습니다. 내가 한 대 맞았을 때, 나도 한 대 때리겠다는 것은 순진함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보복과 복수는 무섭습니다. 나를 때린 사람에게 직접적으로는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뒤로는 그 사람의 인간 관계를 끊어놓고, 사업이 잘 되지 않도록 하며, 내가 갖고 있는 힘과 능력을 다 동원해서 그 사람이 잘 되지 않도록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 똑똑한 사람일수록 더 무서운 복수를 하며 삽니다. 여러분, 복수는 죄인된 인간의 본능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인은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예수님은 성도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복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공의의 원리를 넘어서서 은혜의 원리에 입각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의해 움직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 은총에 의해 움직이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는 공의의 원리에 입각한 복수보다 은혜의 원리에 의한 용서를 원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개인적으로 이웃과의 삶 속에서 공의를 넘어서는 은혜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도들이 실천할 수 있는 개인적인 은혜의 원리를 세 가지의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1) (39절)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뺨을 때린다는 것은 모욕을 주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상대방이 나에게 준 모욕에 대해 동일한 모욕을 상대방에게 주겠다는 식으로 복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40절)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최소한의 법적 권리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재산이 바로 겉옷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집에서는 이불이요, 집 밖에서는 외투인 동시에 여행용 침낭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겉옷까지는 차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겉옷은 법적 권리를 말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법적 권리라고 해서 다 주장하지 말고 필요하면 상대방을 위해 포기할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41절)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 백성이었습니다. 오 리를 가자는 것은 식민지 백성에게 부여된 강제 노동의 한계선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아무 때나 유대인들에게 오 리(천 걸음)까지 짐을 운반하도록 명할 수 있었습니다. 오 리는 국민이 국가에 행하는 최소한의 의무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오 리가 아니라 십 리까지를 동행해 주라는 것은 최소한의 상태로만 의무를 수행하지 말고, 최대한 의무를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옳고 그름의 원리’보다 더 위대한 원리인 ‘은혜의 원리’에 의해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을 더욱 높은 차원으로 완성시키며 성숙시킨다는 사실을 주께서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중국의 성자인 ‘워치만 리’의 간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해 여름에 심한 가뭄이 찾아왔음. 다행스럽게 한 그리스도인 농부의 논에는 물이 풍성하게 고여 잇었음. 그런데 한 밤이 지나고 나면 그 물이 이웃집의 논으로 다 빠져 나가고 마는 것임. 그 밤에 이웃 논 주인이 몰래 빼가는 것이었음. 그래서 그 사람은 이웃 사람에게 따짐. “왜 나의 논에 고여 있는 물을 당신이 다 빼내어 가는 거요?”, 그리고는 당연히 자기 권리를 주장해서 다시 물을 빼 왔음. 그런데 이튿날에도 또 다시 물은 빠져 나가고 없었음. 그러면 또 가서 다시 빼오고, 이러기를 몇 번 거듭하다가 결국 그는 평안을 잃어버리고 말았음. 그래서 기도를 시작했음. “주님, 제가 정당한 일을 하는데 왜 저의 마음 속에 평안이 없습니까?”,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셨음. “너는 정당한 일만 하려고 하느냐?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겠니?”, “하나님,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 준 것처럼 그 사람에게 대하라”, 이제 그의 마음 속에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음. 그는 그날 밤, 위대한 일을 실행했음. 이웃집 농부가 자기 논의 물을 빼내어 가기 전에, 자기 논의 물을 빼어 이웃집 논에 대어 주었음. 그제서야 그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샘솟기 시작했음.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더 위대한 일을 구하며 사는 것임.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이면서 설교가인 미국의 아이언사이드(Ironside) 박사가 교회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을 때였음. 갑자기 청년 하나가 손을 들더니 큰 소리로 외쳤음. “법대로 합시다!”, 이 말을 들은 아이언사이드 박사는 이야기했음. 

“여보게 젊은이, 법대로 하기를 원하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법대로 자네를 다루셨다면 자네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자네는 지옥에 가야 마땅한 것일세” 우리는 법보다 더 위대한 원리에 의해서 사는 사람들임. 그것은 은혜의 원리임. “주께서 나를 다루신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대하겠다”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인간 관계를 지배하는 은혜의 원리인 것임. (롬12:17~18)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여러분은 세상의 법보다도, 구약의 율법보다도, 더 위대한 예수님의 은혜의 원리로 인생을 살아가시므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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