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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에 (대하 7: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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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에 (대하 7:11-18)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는 주님의 몸이며 동시에 우리의 삶의 중심이며 터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내가 교회에 나옴으로 예수 믿는 자가 되고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이 성장하며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다가 마지막은 교회의 품안에서 그 생애를 마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는다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의 생애 한 가운데 놓여있는 교회란 과연 어떠한 곳이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가장 중심이며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에밀 부르너’ 라는 신학자는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모든 신앙생활은 결정된다’ 고 말했습니다. 

다시말해 교회를 귀히 여기는 사람은 신앙생활도 하나님 제일주의가 되겠지만 교회를 별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신앙생활 역시 그와 같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교회란 사람의 손으로 지었다고 해서 사람이 만들어 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후에 그 율법을 어겼을 때에 용서받게 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지켜갈 수 있는 힘을 공급하기 위하여 그 백성에게 교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후에 성막이 성전이 되었는데 오늘날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작품이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성막을 만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에 대한 세가지의 원칙을 정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첫째가 바로 장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당시 ‘너희는 성소를 짓되 이스라엘 진 한 가운데 지으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소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에 세 지파씩 열두 지파가 빙 둘러싼 모양을 가지고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가 백성들이 거하는 한 가운데 놓여져야 한다는 것은 ‘항상 백성들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의 집이 있어야 된다’ 는 것으로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주하는 곳도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우리 마음 한 가운데 항상 성전이 있어서 순간 순간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하나님을 기억하고 달려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를 축으로 하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교회 중심적 삶의 필요성을 말씀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진 한 가운데에 내 집을 지으라’ 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원칙입니다. 
 

두 번째로는 모양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전을 지으라 하시면서 ‘너희들이 사는 집과 똑같이 지으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더 아름다운 공간을 짓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성전은 은혜의 상징적 공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거한다고 하는 그 낮아짐의 표시로써 사람들이 사는 것과 똑같은 모양의 집을 지으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원칙이었습니다. 
 

세 번째 원칙은 재료의 문제입니다.

어떤 재료를 사용해서 지으라 했는가 하면 ‘질적으로 가장 귀한 것을 가지고 지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막을 덮는 천막은 수달피 가죽으로 당시에도 대단히 귀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막을 지지하는 받침대도 일반적으로는 목재를 사용하지만 하나님의 성막을 받치는 지주대들은 금으로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최고의 재료를 요구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정성이 그 속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 한 가운데 그들이 사는 집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러나 아주 정성을 다하여 지은 하나님의 전이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 한 가운데 서게 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윗 왕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셔서 백향목 궁전을 지었는데 하나님의 성전을 보니 너무도 초라한 텐트로구나.’ 

백성들의 문화와 삶과 주택의 모양이 바뀌면서 이제 하나님의 전의 모습도 바뀔 때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즐거워하셨지만 성전을 짓는 영광은 그 아들 솔로몬에게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왕위를 이어받아서 하나님의 전을 손수 짓는 영광을 얻게 되어 7년의 대역사 후에 마침내 성전을 완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인 다윗이 그토록 짓기 원했던 하나님의 성전을 완공하자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솔로몬의 성전봉헌 기도’ 라고 합니다. 

이렇게 기도드린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인 것입니다. 

12절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주신 응답을 통하여 성전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시는지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라고 하였듯이 성전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일은 제사입니다. 

제사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난다는 것은 영적인 존재와 육적인 존재 서로 질적으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남에 있어 그 매개체가 바로 제사라는 형식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 속에는 인간의 자기 죄에 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내 죄 대신 이 짐승의 피를 바칩니다’ 하는 자기겸손과 죄의 고백이 있고 동시에 하나님이 죄인을 만나시는 희생적 은총이 들어있습니다. 

바로 이 제사의 결과 죄 사함을 받게 되며 희생의 피로 죄 씻음을 받는 곳, 죄 사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곳, 그곳이 바로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에 나와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할 때 사죄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며 죄 씻음을 받는 것이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기초적인 일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게 만드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사람들의 말을 듣고 세상의 가치관에 노출되어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도 세상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는 문제의 진정한 원인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은 시73편에서 ‘내가 이 세상의 많은 모순들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오면서 내가 깨닫게 되었다’ 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시말해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문제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는 안목이 성전에서 생겨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무슨 문제가 발생하게 될 때에 원인을 추론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이성을 가진 인간에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 병원을 가면 많은 환자들이 있는데 환자들 가운데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병명을 아는 환자가 있고 또 하나는 도무지 병명을 알 수 없는 환자가 있습니다.
누가 더 불안하겠습니까?

몸이 아픈 사람도 여러 가지의 검사를 통해 정확한 병명이 나오면 일단은 안심이 됩니다. 그러나 일단 알고 나면 질문이 바뀌어서 ‘내가 왜 이 병에 걸렸는가?’ 하는 원인을 묻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원인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가 뭐 잘못 먹었나, 내가 너무 과로했나, 잠을 못 잤나? 어떤 문제 때문에 너무너무 고민해서 이러한 병에 걸리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병의 원인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처음에는 대개 환경이나 외부적인 원인에서 찾다가 나중에는 도덕적인 원인에 까지 이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사의 이야기가 한 사람이 팔이 부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아무리 치료를 받고 약을 먹어도 팔이 붙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하도 이상해서 환자에게 찾아가서 “선생님, 아무리 의학적으로 조치를 해도 팔이 붙질 않습니다. 선생님은 왜 이 팔이 안 붙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이 환자가 흐느끼면서 대답하기를 “제가 이 팔로 제 아내를 너무나 많이 구타를 했습니다. 그러니 이 죄 지은 팔이 나을리가 있겠습니까? 아내가 용서해야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는 그 사람의 아내를 불러서 남편 앞에서 용서한다는 말을 듣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후에 남편의 팔이 호전되어 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많은 임상 경험을 통해서 ‘폴 투니이’ 라는 학자는 ‘병의 치료에도 도덕성이 있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므로 병의 원인을 도덕적으로 묻게 되어 있으며 이것이 인간이라는 설명입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든 것들이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 가운데는 한분도 이러한 분이 없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까지 질문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인은 그보다 훨씬 깊은 원인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13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가뭄과 병충해와 염병’ 이런 것이 왜 생기는가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런 천재지변에 대해 믿지 않은 사람들은 과학적인 원인을 가지고 대답할 것입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원인이 ‘엘리뇨 현상’ 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측불허의 기상이변의 원인에 대하여 그 단어 하나로 대답을 합니다.
인간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보다 더 높은 원인이 있다’ 하시고 그 원인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14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라는 말씀처럼 악한 길로부터 그 백성들이 떠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와 경고가 이와 같은 천재지변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서로 신앙이 잘 맞지 않아 갈등이 있었는데 하루는 남편이 주일날 아침에 골프채를 싣더니 교회를 가지 않고 골프장을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화가나서 그럼 마음대로 하라면서 화를 내고 교회에 왔는데 얼마 후 병원에서 전화가 온 것입니다. 남편이 천둥번개가 치는 와중에도 골프를 치다가 벼락을 맞아 손에 화상을 입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병원에 실려 온 남편에게 놀란 아내가 가서 맨 처음 보고 한 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거 보세요 주일날 교회 안가고 골프장 가더니 벼락 맞았잖아요” 그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혹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믿음 없는 남편에게 아내가 “여보 얼마나 놀랐어요?” 하고 위로만 하였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 스스로가 ‘내가 교회 안 가고 골프 치러 갔다가 벌 받았지’ 이렇게 나왔을텐데…. 

아내의 말은 오히려 남편의 반발심만 더 만든 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 주변에도 그런분들 혹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아내의 말이 내용적으로 과연 틀린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과학적으로 원인을 찾는다면 천둥 번개가 치는 날 들판에서 골프채를 휘둘렀으니 맞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분석입니다. 

그러나 왜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그 사람일까요? 
여기에 대하여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돌이키게 하기 위한 뜻이다.’

성경 속의 가장 큰 재해는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성경은 이 일의 원인에 대해 이것은 단순히 기상이변이 아니라 이 땅에 사람들의 죄악이 관영함으로 말미암아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이며 인재라고 밝히고 있지만 이런 분석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솔로몬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대가에 나라가 나뉠 것이라고 하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은 국제정세와 정치적인 힘의 논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모든일의 원인은 반드시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실 ‘천재지변’ 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는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계속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진정한 저주란 잘못된 길로 가는 동안에 형통케 되는 것입니다. 
돌이킬 기회가 없습니다. 회개와 반성의 기회가 없습니다.
잘못된 길을 갈 때에 중단되고 사건으로 막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늘이 그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다시 말해 아직도 그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만 접근하려 하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14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그렇습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서 스스로 겸비해져야 합니다. 
내 힘으로 안 된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은총을 구하는 인격으로 겸손히 낮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하면 그 죄를 사하고 그 다음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14절 끝에 ‘그 땅을 고칠찌라’ 하나님은 땅을 고치십니다. 말라버린 대지를 적십니다. 땅으로 열매 맺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나라만 그렇겠습니까? 가정도 그러합니다. 
어떤 가정을 보면 너무너무 답답합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질병으로 인하여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고, 가족관계 속에 갈등이 끊이지 않는 가정도 많고, 우환이 계속되고 꼬여만 가는 가정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많을까? 너무도 힘든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데 이 문제가 도대체 어디에 있고 해결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이 문제를 아주 단순하게 말씀합니다.
잠26:2 ‘저주란 까닭 없이 임하지 아니 하느니라’ 하였듯이 저주란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주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있습니다. 
이것을 끊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통하여 이 저주는 끊겨 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의 능력입니다. 예수의 피를 의지하고 죄를 고백하며 회개할 때 죄악의 사슬과 저주는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다시말해 ‘성전에 와서 제사드림으로 죄를 용서받고 죄의 무거운 사슬을 끊어라. 그리하면 그 땅을 고칠지라’ 이것은 땅만 고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문제와 육체의 질고까지도 하나님께서 친히 고쳐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왜 성전에 와서 기도해야 합니까?
16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다시말해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에서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근거로 한다면 세상에 왜 이렇게 복잡한 일이 많습니까? 
죄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 전에 와서 기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답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에 당신의 귀와 눈과 마음을 두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은 겉으로는 다른 건물과 같을 수 있지만 그러나 이곳은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된 곳으로 이곳에 나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란 하나님의 집이요, 죄사함 받는 곳이요, 문제의 원인을 바르게 파악하는 곳이요, 그리고 또한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며 저주를 그치게 하는 곳이며 축복의 문을 여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겸손히 엎드리는 사람의 미래는 분명히 밝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 죄를 사하시고 치료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성전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고 용서받고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곳입니다. 
더 나아가 힘을 얻어 충성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는 항상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는 곳입니다
원하기는 이러한 성전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충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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