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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과 온량한 혀 (마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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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과 온량한 혀 (마 7:1-6) 

(마7:1-6)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잠15:4) 온량한 혀는 곧 생명 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1. 오늘 본문에서 ‘비판’(κρ?νετε,krinete,judge)은 ‘정죄’, ‘심판’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흠을 들추어내거나, 실패를 꼬집거나, 잘못을 비난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는 말씀은 “사람들의 흠을 들추어내거나, 실패를 꼬집거나, 잘못을 비난하지 마라. 너희도 똑같은 대우를 받고 싶지 않거든 말이다. 비판하는 마음은 부메랑이 되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누구든 사람을 ‘비판’하거나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범하는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죽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심판’은 죄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운신(運身)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 때 한 중풍병 환자를 네 사람이 데리고 왔는데 무리 때문에 예수께로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지붕을 걷어 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 환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아들아, 네 병이 고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곳에 누구라도 기대하고 있었던 한 마디 말씀은  ‘아들아, 네 병이 고침을 받았느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수께서는 그 환자에게 “아들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침 그곳에 있던 서기관(율법학자)들이 마음속으로 ‘저렇게 말하면 안되지! 저것은 신성모독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 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곧바로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걸어 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노라.” 그리고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이내 일어나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막2:1-8)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중풍병 환자를 깨끗하게 치유하심으로 그가 바로 죄 사함받은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말씀, 즉 인간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세상을 구원하려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아니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께서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많은 백성을 가르치실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합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일을 놓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보고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돌아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여자가 대답합니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심판하려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를 사하여 구원하려 오신 것입니다.(요 8:1-11)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도 죄인을 두고 심판하시지 아니하고 용서하셨는데, 다 같은 사람이 남을 정죄, 심판한다는 것은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웃이 어떠하든 그를 향해 돌을 던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을 심판하면 그 심판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요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끌려온 여인이 예수께 끌려오지 않았더라면 분명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 앞에 끌려왔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게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것으로 심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말씀처럼 자신이 마치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은 심판하게 되면 남을 심판한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사람을 얼마든지 심판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께서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을 두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것처럼 이웃을 정죄하지 아니하는 말, 비판하지 아니하는 말, 용서하는 말로 가정과 이웃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본문 3-5절을 보겠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오래 전 인도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네 상인이 공동으로 목화 사업에 투자하게 되었습니다. 값이 오르면 내다 팔 생각으로 대량으로 목화를 구입하여 창고에 보관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창고에 쥐가 너무 많아 솜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쥐 잡을 고양이 한 마리를 창고에 풀게 되었습니다. 네 사람은 모두가 돈에 짠 사람들이었기에 고양이 구입비를 네 등분을 하게 되었고 관리비도 각각 다리 하나씩을 맡도록 조치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않는 문제가 터졌습니다. 고양이 오른쪽 앞다리가 다친 것입니다. 그 다리 주인이 치료하면서 기름 묻은 붕대를 감아 주었는데 고양이가 난로 가에 앉아 있다가 기름 묻은 붕대에 불이 붙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놀란 고양이는 불이 붙은 채로 이러 저리 뛰다가 솜 더미에 불을 붙이게 되었고 결국은 창고에 있는 솜은 모두 불 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이 터진 후 건강한 고양이 다리의 주인들은 다친 다리에 기름 붕대를 감아준 주인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양이의 다친 다리의 주인이 기름 붕대를 감아 준 것이 원인이 되어 화재가 났고 그 때문에 모든 솜이 다 탔으므로 당연히 그 다친 다리를 치료한 주인이 나머지 세 사람에게 변상을 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드디어 판결 날짜가 되어 네 사람이 모두 재판관 앞에 섰습니다. 고소를 한 세 사람은 당연히 승소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아니했기에 의기양양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재판 결과는 정 반대로 나왔습니다. 재판관은 거꾸로 건강한 세 다리의 주인이 다친 다리를 치료하여준 한 사람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는 예상 밖의 판결을 했습니다. 

이유인즉, “고양이 다리에 불이 붙었을 때 만약 고양이가 가만히 제 자리에 있었더라면 화재가 솜에게까지 옮겨 붙지를 않았을 텐데 고양이가 불붙은 다리 하나를 끌고 목화 솜 쪽으로 간 것이 문제였고, 이렇게 놓고 본다면 목화 솜 쪽으로 간 것은 다친 다리가 아니라 건강한 세 다리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재판관의 판결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자기중심적 비판의식으로 상대방의 문제를 예리하게 헤아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상대방의 티를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들보를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에게서 티까지 찾아내려는 사람들 중에는 대부분이 스스로가 들보를 가지고 있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단점과 약점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단점이나 약점을 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는 먼저 자신의 단점이나 약점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단점을 보기 전에 남의 티를 헤아리는 행위, 즉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행위는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 즉 ‘위선자’라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깨끗하고 거룩한 채 하지만 속에는 무덤처럼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3:25-28)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자신의 단점과 약점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경된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남을 보게 되면 눈먼 소경과 같습니다.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려면,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이웃을 대할 때 항상 그 사람의 위치와 입장에서 생각하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설사 그 사람의 약점과 단점이 보일지라도 사랑으로 덮어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지혜서인 잠언17:9을 보겠습니다.

(잠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3. 예수 믿는 성도들은 남을 비방하거나 비판하기에 앞서 그 사람의 약점을 자신이 담당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여 덕을 세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신 것을 본받아 남을 기쁘게 하되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15:1-3을 보겠습니다. 

(롬15:1-3)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덕’이라는 말은 인간과의 윤리적인 관계에 보다 더 비중을 둔 것으로 성도가 자신보다 이웃을 기쁘게 하되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함을 뜻합니다. 인생의 행복이나 기쁨은 자신의 행복 추구나 자신의 기쁨 추구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남을 행복하게 해 주고 남을 기쁘게 해줄 때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B.C.1100년경, 이스라엘에 길르앗 사람으로 ‘입다’라는 큰 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길르앗이 창녀에게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길르앗은 본처가 자식을 낳지 못해 아내의 묵인 하에 창녀에게서 아들 ‘입다’를 낳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길르앗의 본처도 여러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자라서 ‘입다’를 쫓아냅니다. 이유는 첩보다 못한 창녀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아버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길르앗 사람들 역시 ‘입다’가 창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그를 쫓아내는 데 동조합니다. 그래서 ‘입다’는 이복 형제들을 피해 도망가서, 돕이라는 땅에서 살았는데, 힘깨나 쓰는 건달패들이 다 ‘입다’에게 모여들었습니다. 

얼마 뒤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오자, 길르앗의 장로들이 전쟁에 나설 장군을 택하기 위해 회의를 하는데 마땅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돕 땅으로 쫓겨난 ‘입다’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결국 ‘입다’를 찾아가 간청합니다. “와서 우리의 지휘관이 되어 주시오. 그래야 우리가 암몬 자손을 칠 수 있겠소.” 

그러나 ‘입다’는 길르앗의 장로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미워하여, 우리 아버지 집에서 나를 쫓아낼 때는 언제이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해서 나에게 올 때는 또 언제요?”라며 반박합니다. 그러자 길르앗의 장로들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대를 찾아온 것이오.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운다면, 그대는 모든 길르앗 사람의 통치자가 될 것이오.” 라며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입다’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암몬과의 전쟁에 나가 싸웠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삿11:32-33)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그런데 ‘입다’의 승리에 시비를 걸고 들어온 족속이 있었습니다. 바로 에브라임 지파 자손들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 ‘입다’와 싸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요단강을 건너 와서, 입다에게 모욕적인 말로 협박합니다. 

“너는 왜 암몬 자손을 치러 건너갈 때에, 우리를 불러 같이 가지 않았느냐? 우리가 너와 네 집을 같이 불태워 버리겠다.” 

사실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들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자하는 욕망에서 ‘입다’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입다가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힘겹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불렀으나, 너희는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하여 주려고 하지 않았다. 너희가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을 보고, 내가 목숨을 걸고 암몬 자손에게 쳐들어가니, 주께서는 그들을 나의 손에 넘겨주셨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 너희가 이렇게 올라와서 나를 대항하여 싸우려고 하느냐?” 고 합니다. ‘내가 암몬과의 싸움이 위급하여 도와 달라. 함께 싸우자고 할 때는 구경만 한 놈들이 무슨 귀신 씬나락 까먹는 소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것입니다. 입다와 길르앗이 암몬과 목숨 건 싸움을 할 때는 웅크리고 구경만 하고 있다가 뒤늦게 나타나 불평하고 비난하고 이제 와서 헤게모니를 자신들이 차지하겠다고 덤비는 에브라임의 태도가 어처구니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에서 죄짓고 버림받아 도망간 사람들이었다.’는 비아냥으로 과거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습니다. ‘입다’는 버림받고 도망가 살던 쓰라린 상처를 기억하며 “한판 붙어 보자” 며 아무리 동족일지라도 전쟁을 결단합니다. 

상처는 소금을 뿌려서도 안되지만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국 싸움이 붙었지만 ‘입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입다’는 요단 나루터를 장악하고 숨어서 도망가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이잡듯 하나씩 잡아 죽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암몬과 싸울 때는 생긴 것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복장도 다르니 아군과 적군을 쉽게 구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 사람들은 생긴 것도 꼭 같고 언어도 꼭 같습니다. 복장만 조금 위장하면 요단강을 오고가는 다른 지파 백성들과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때 참모 병사 중 한 사람이 기가 막힌 구분법을 찾아냅니다. 같은 민족이지만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가까운 이방인들과 섞여 살고 동족끼리 교류가 부족하다 보니 사투리가 생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표준말 ‘의’가 어떤 지방에서는 ‘어’로, 또 어떤 지방에서는 ‘으이’로 발음되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거 전라도 출신 대통령이 “국민 여러분, 행동하는 양심, 이건 나으 인생철학입니다. 이번에 확실하게 거시기 해 버립시다.” 고 연설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경상도 출신 대통령이 “국민 여러분, 나의 목표는 배나와 개혁 그리고 갱제를 학실히 살리는 것입니다.”며 연설했습니다. 

경상도 사람들 상당수가 ‘쌀’, ‘싸움’ 이런 경음이 잘 안됩니다. 이처럼 에브라임 사람들이 이런 경음이 안되어 “쌀” 해봐, “싸움” 해봐, 하는데 그들이 “살” “사움” 그럽니다.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쉬(sh)” 발음이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침 요단강 나루터에서 ‘작은 시냇물’이란 말 “쉽볼렛”을 에브라임 사람들은 “십볼렛”이라고 발음하는 것을 이용해 에브라임 사람을 찾아내 죽였습니다. “쉽볼렛” 해 보라! 에브라임 사람은 멋모르고 “십볼렛” 이라고 합니다.

이놈을 죽여라! 그래서 잡혀 죽은 에브라임 사람이 자그마치 4만 2천명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그 누구라도 가리지 아니하고 시비를 일삼고 비아냥거리다 지파 족속이 전멸하다시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이아이’(於異阿異), ‘어 다르고 아 다르다.’라는 뜻으로,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말하기에 따라 사뭇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사소한 한 두 마디일지라도 듣기에 따라 이해를 자아내기도 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을 할 때는 듣는 이의 입장이나 상황을 잘 파악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생기지 않게 잘 가려서 하라는 의미의 속담입니다. 

옛날에 박판돌이라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푸줏간을 열었습니다. 어느 날, 양반 두 사람이 같이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최 선비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습니다. “흐흠, 판돌아, 여기 고기 한 근 주거라.” 김 선비도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시게나.”라고 말했습니다. 푸줏간 아저씨, 박판돌은 주문대로 고기를 썰어서 두 양반에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받은 고기를 살펴보니 주문은 똑같이 했는데 김 선비 쪽은 양이 많고 고기도 좋은 반면, 최 선비 쪽은 양도 적고 고기의 질도 나빴습니다. 그래서 먼저 고기를 산 최 선비가 “아니, 고기 한 근의 크기가 다르잖아?!” 하면서 따졌습니다. 

그 때 푸줏간 주인 박판돌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고기를 베어 낸 사람이 달라서 그런 것 같네요. 처음 고기는 <판돌이>란 자가 베어서 작고, 다음은 <박서방>이라는 사람이 베어서 큰가 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속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말 그대로입니다. 

이스라엘은 12지파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 한 가족 한배를 탄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 위기에 부딪히면 함께 가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멋진 승리를 이룬 지파가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지파의 약점을 감싸 주어야 할 부분이지 그것이 다른 지파를 구분하고 죽이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누구의 약점도 악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서로의 다른 점은 축복받아야 할 부분이지 비난받아야 할 부분이 아닙니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는 남을 모함하고 멸시하고 깔보다가 스스로 화를 초래하며 부끄러운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헐뜯어 말하기를 좋아하는 심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남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아름다워질 때가지 혹은 아름답게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마음가짐으로 상대방을 내가 아름답게 보려고 애쓰고 상대방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과 조화(harmony), 화목을 이룰까 하고 내가 먼저 힘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4. 마지막으로, 잠언15:4을 보겠습니다.

(잠15:4)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은 생명나무와 같아도 가시돋힌 잔인한 말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도 요한이 본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데 그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는’(계22:1-2) 나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 라는 말씀은 “상대의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다시금 건강한 마음의 생기를 얻게 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패려한 혀”(a deceitful tongue crushes the spirit)는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그 몸과 마음, 영혼까지도 파멸시키는 말”을 뜻합니다. 캐빗 로버츠라는 분은 “지구상에서 매일 밤 배고픈 채로 잠드는 사람이 30억이다. 그러나 40억의 인구가 칭찬과 인정과 부드러운 말을 갈망하며 잠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자식이 밤에 밥 안 먹고 자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를 못 듣고 자는 아이가 더 많음을 걱정해야 합니다. 

이런 외로움과 단절이 점차 쌓여 가면서 이것이 내재적 분노로 마음속에 쌓이는 것입니다. 이 쌓인 분노가 언젠가 동기가 주어지면 폭발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육학자 벤자민 블룸은 사람들의 환경을 크게 둘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물질 환경, 다른 하나는 언어 환경입니다. 그는 “물질 환경이란 그가 어떤 집에서 무얼 먹고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고 언어 환경이란 그가 어떠한 말을 듣고 어떠한 말을 말하며 살아가느냐이다. 

이 두 환경 중에서 훨씬 중요한 것은 언어 환경이다. 이것은 아이들의 지능에도 절대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 훌륭한 환경이 아닙니다. 제일 좋은 환경이란 언어 환경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언제든지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미련한 자를 들어 지혜롭게, 가난한 자를 부유한 자로, 천한 자를 존귀한 자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온량한 혀”, 온유하고 선량한 말,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 용기를 북돋아 주고 소망을 불어넣어 주는 말 등으로 “생명나무”가 되는 지혜로운 성도, 지혜로운 언어 환경의 가정과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말에는 형제를 살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죽이는 말이 있고,(렘9:8) 이웃을 흥하게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망하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잠11:9)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불행하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잠15:2316:13) 상처를 치료하는 온량한 혀, 사람의 몸과 마음, 영혼의 상처와 병든 것, 그리고 인간관계의 상처를 치료하는 온량한 말이 있는가 하면(잠12:18,15:4) 병들게 하는 말도 있습니다.(롬3:13-14) 그리고 선한 말, 이웃을 즐겁게 하고 은혜를 끼치는 말 등이 있습니다.(잠12:25, 엡4:29) 또한 의로운 입술, 정직한 말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잠16:13)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사람의 입술에는 덕망이 있습니다.(잠22:11) 

그러므로 말하기 전에 인간관계에 유익한 말인지, 함께 하는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말, 화목하게 하는 말인지, 창조적이고 건강한 말인지, 경우에 합당한 말(잠25:11), 때에 맞는 말인지(잠15:23), 서로의 관계에 좋은 약이 되는 말인지, 상처받은 마음과 관계를 치유하는 말인지를 깊이 생각하는 언어생활과 환경을 만들어가는 지혜로운 성도, ‘생명나무’같은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의 입술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이 상처받은 모든 것을 치유하는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하시기 바랍니다. “(잠20:15)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고 했습니다. ‘비판’보다는 ‘온량한 혀’로 더욱 귀한 보배같은 성도들이 되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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