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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 그 능력과 기쁨 (롬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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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그 능력과 기쁨 (롬 1:8-17)

383년 어느 날, 나이 삼십 세의 젊은이가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우리가 흔히 <어거스틴>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로마에 간 것은 수사학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수사학이란 <언어를 매개로 사상이나 감정을 주고받는 의사소통의 정도를 높일 수 있도록 말이나 글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이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이라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아프리카의 칼타고에서 수사학을 공부했고, 이미 학생들을 가르쳤고,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공을 자신하면서 로마에 갔습니다. 

본문에도 로마로 가려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바울 사도입니다. 그가 얼마나 로마에 가고자 하는가를 보여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즉 어떤 방법 쓰든지, 어떤 기회를 통해서든지 로마에 가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또 11절에서는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했습니다. 

13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합니다. 마음으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고, 로마에 가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많이 기울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를 쓸 때까지도 로마에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의 활동 때문에 로마로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가려는 열망은 식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5장 28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에 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그렇게 간절히 로마에 가려고 하는 것일까요? 본문에는 그 이유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11절에서는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기 위해서 로마에 가고자 한 것입니다. 또 12절에서는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했고, 13절에서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행복한 인생, 열매가 풍성한 인생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행복과 열매가 가득한 인생을 만들어주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무슨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돈을 나눠줌으로써 할 수 있습니까? 돈으로 하는 것이라면 매년 국민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는 이미 천국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쾌락으로 할 수 있다면 밤낮없이 술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야 합니다. 지식을 가르침으로써 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은 모두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이 그렇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바울이 가진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울에게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열매가 풍성한 인생을 살게 만들 수 있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이야말로 욕망에 빠진 사람들을 신령한 사람으로 만들고,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이들에게 영원한 위로를 주고, 인생이 맺어야 할 참된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복음은 어떤 것이기에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일까요? 복음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어거스틴을 보십시오. 그는 수사학이란 무기를 들고 로마에 갔습니다. 수사학이 자신의 인생을 세우고,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수사학은 세상을 이롭게 하기는커녕 어거스틴 자신의 인생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로마에 간 어거스틴은 세상 향락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는 로마식 극장이 주는 쾌락에 빠졌고, 고상한 지식인인 듯 했으나 욕망을 억제할 수 없는 이중인격으로 인해 고통 받았습니다. 수사학자로서 명성이 높아질수록 인생이 헛됨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명성 때문에 마음 한편에서는 교만이 자라고, 인생의 허무함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좌절감이 더 깊어갔습니다. 

이런 그를 새사람으로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복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생각만큼 만족하지 못했고, 밀라노로 옮겨서 활동하게 됩니다. 그는 거기서 유명한 암브로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변해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복음은 교만으로 둘러쳐진 그의 영혼을 찌르기도 하고, 좌절감으로 비참해진 그의 영혼을 어루만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어 읽으라, 집어 읽으라>는 아이들의 노래 소리에 끌려 집안에 있던 성경책을 집어 읽게 되었고, 그 말씀은 그를 변화시켜 새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결국 그를 변화시킨 것은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은 생명이었습니다. 

그는 변했습니다. 부부의 명분을 정하지 않고 동거하면서 아들까지 낳은 여인을 돌려보냈습니다. 수사학자로서의 명성을 얻고자 하던 마음도 버렸습니다. 그는 아들인 아데오다투스의 손을 잡고 아프리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성자처럼 살았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날마다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아프리카의 작은 곳, 히포(Hippo)에서 예배당 건물 옆에 붙여지은 작은 방에서 수도사처럼 살면서도 한없이 기쁨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기쁨은 수사학자로서 명성을 누릴 때의 기쁨이나, 세상의 쾌락을 누릴 때의 말초적 기쁨과는 차원이 다른 거룩한 기쁨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홀리 조이였습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도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거스틴을 위대하게 만든 것, 기쁘게 한 것, 행복하게 하고 열매 맺게 한 것은 수사학이 아니라, 복음이었습니다. 

이런 체험은 바울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대단한 사람,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가말리엘의 수제자, 대제사장과 직접 통하는 힘 있는 인물, 장래가 촉망되던 인물이었지만 참 기쁨과 평안을 몰랐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자 지금까지 그가 생각하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그 대신 하늘의 것이 그를 채웠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예수님 안에 있는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평안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그를 새롭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은 역사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등의 히트곡으로 인기 순위 1위를 달리던 가수 이종용씨는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되어 목사님이 되어 지금은 미국 남가주에서 <코너스톤교회>를 목회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세상의 명성으로도 만족하지 못해 대마초에서 위로를 얻고자 했던 한 가수, 깊은 감옥에 떨어져 고통 받던 그를 변화시켜 주님의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평생을 최고의 문필가, 최고의 지식인 등의 명성 가운데 살아온 노학자 이어령 교수를 지식의 세계에서도 맛보지 못했던 기쁨으로 인도한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은 누구보다 고고하던 그로 하여금 예수님께 무릎 꿇게 했고, 손자의 죽음 앞에서도 천국 소망으로 담대하게 했으며, 인생의 황혼기를 주님과의 데이트로 만족하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생애를 결정합니다. 복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신분을 바꿉니다. 사람을 죄인에서 의인으로, 사단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꿉니다. 복음은 사람의 운명도 바꿉니다. 영원한 지옥불의 멸망에서 영원한 천국의 생명으로 옮기게 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합니다.복음이야말로 구원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할렐루야! 우리 모두 이 위대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축복으로 이미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이렇게 능력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의롭지 못한 사람은 죽습니다. 의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를 복음에 담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고 받으면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고, 그 의로 인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이 놀라운 사실을 체험했기에 그 후로 복음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했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대로 합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주인인 예수님께서 하신 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는 로마에 가길 간절히 원한 것입니다. 복음은 그의 인생의 목적이었습니다. 그의 기쁨은 복음을 통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그는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복음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유대인에게도, 헬라인에게도 동일한 구원의 능력입니다. 

16절을 보세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할렐루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가난하든 부하든, 그 어떤 조건에도 상관없이 누구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랬기에 바울은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그것이 그의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바로 이 복음 증거에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말씀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세우신 목적도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선 우리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확신했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복음을 그저 인생의 여러 가지 중의 하나 정도로 여깁니다. 다른 것을 위해서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기에 상대방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간절함이 없습니다. <저 분은 지금도 잘 살고 있는데 뭘...>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잘 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시한부 인생, 지옥불에 떨어질 시간을 향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우님들의 부모님 잘 살고 계십니까? 노인정에 나가고, 가끔 해외여행도 하시고, 취미 생활도 즐기고 계시니, 잘 사시는 것입니까? 그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남편이나 아내가 지금 잘 살고 계시나요? 직장에서 승진도 하고, 수입도 늘어나고, 골프도 즐기고, 멋도 내고 살고 있으니, 잘 살고 계십니까?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멋진 아가씨와 교제도 하고, 조만간 취직하고 결혼할 것이니 염려 없습니까? 

여러분, 결코 잘 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가 복음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잘 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복음만이 참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가족들을, 소중한 분들을 방치하면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복음만이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아무리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분이라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과 간절함과 눈물이 부족합니다. 저는 이번에 중국에서 소중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지독하게 미워하고 불교와 전통 무속종교를 신봉하던 한 중국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이 다 예수님을 믿어도 자신들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그런데 이 가정에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큰 딸의 마음을 뜨겁게 감동하셨습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교회에 가고 싶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한 딸은 연길교회에 나갔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람이 전도하지 않으니 성령님께서 직접 전도하신 셈입니다. 그녀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니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어머니로 보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어머니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 딸이 어떻게 했을까요? 어린 학생이 어머니 영혼을 위해 사십 일을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오직 어머니의 구원을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고, 딸의 정성에 감동한 어머니는 주님께 나갔고, 지금은 하루 세 시간 이상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당 건물을 두 곳이나 건축했다고 합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딸은 동생을 위해서도 또 사십 일을 금식했고, 동생도 신실한 하나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지금 그렇게 가족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던 청년이 서울에서 신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방학이 되어 다니러 온 그녀를 만나 보았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부모님을 위해, 형제자매를 위해, 자녀를 위해 금식하면서 이렇게 기도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한국 교회의 위기는 신앙의 열정이 식어버린 데 있습니다. 예전에는 우리도 그렇게 했었습니다. 그러나 먹고 살기 좋아지면서 영적 열정이 다 식었습니다. 지금 중국교회가 열악한 환경에서도 부흥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 안에 이런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가족의 구원을 위해 한 끼라도 금식하면서 기도해 보셨나요? 눈물로 하나님 앞에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해 보셨나요? 무슨 노력을 해 보셨나요? 교회로 모시고 와서 말씀을 듣게 하려고 힘쓰셨나요? 아니면 그냥 방치해 두셨나요?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 분들을 위대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로 초대해야 합니다. 이웃, 친지를 초대해야 합니다. 다음 주일이 바로 그 날입니다. 이 주간에 정성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녁 8시마다 기도회가 있습니다. 할 수 있다면 하루에 한 끼 정도 금식하면서 기도하십시오. 저도 여러분들이 모시고 올 분들을 위해 한 끼를 금식하면서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가족과 이웃들의 가슴에 닿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반드시 다음 주일에 모시고 오십시오. 그리고 오늘 가실 때 모시고 올 분들의 숫자를 적어내 주시기 바랍니다. 작지만 정성스런 선물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일로 안 된다면 그 다음 주일에 또, 그 다음에 또 모시고 와야 합니다. 성령께서 그 분들의 마음을 열고, 그 영혼을 사로잡으실 때까지 멈추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의 기도를 받으시고, 우리의 수고를 통해, 그리고 다른 이들의 수고가 함께 모아져서 그 분들이 구원받는 열매가 맺힐 줄 믿습니다. 이 한 주간과 다음 주일을 통해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만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 천국을 함께 누릴 영원한 동반자가 되는 축복을 얻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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