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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롬 11: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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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롬 11:33-36)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바로 앞서는 부분(롬11:25-32)에서 그가 깨닫게 된 신비를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우둔하여지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게 된 것이고, 그 때문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된 것이며, 이방인들이 누리는 긍휼 때문에 이스라엘이 이를 시기하여 그들도 다시 하나님의 긍휼을 얻도록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신비에 관한 그의 생각을 결론짓는 것이기도 하고 로마서의 처음부터 오늘 본문까지의 그의 모든 신학적 사고 끝에 내리는 결론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핵심진리와 우리를 구원하시는 계획을 실현시켜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그 누구보다도 또 그 어디에서보다도 이 로마서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이 모두에게 완벽하게 설득력 있고 구원의 진리에 대한 궁금증을 깨끗이 다 해소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사도 바울 자신도 분명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비의 일부분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의 일부를 들여다본 그는 그 신비의 무한히 깊음과 더 이상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인간의 한계를 동시에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과 지혜 그리고 자신과 모든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확신을 깨닫는 순간 그 신비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음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대단히 신학적이던 그의 설명을 그치고 찬양과 경배로 돌아선 것입니다. 아니 그의 신학적 논술을 찬양과 경배로 결론지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구원의 신비 앞에서 궁극적으로 만난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자신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지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전체로 경배하고 찬양해야 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감탄과 찬양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33절에서 쓰기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밑바닥을 볼 수 없게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의 누가 불순종을 자비 베푸시는 계기로 돌려놓고 그 자비가 모든 믿는 이에게까지 미치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고, 그의 결정은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가 찾을 수 없고, 그의 방법은 신비스러우며 우리의 파악능력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행동의 이유를 우리가 어찌 이해할 수 있으며 그가 일하시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사55:8) 하셨고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미리 알 수도 없고 어떤 길을 통해 그 계획이 이루어지게 하실지 짐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생각은 그러나 언제나 옳으며 그가 하시는 일은 항상 선하고 위대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존하신 지혜자이시기에 그의 마음을 알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감히 그에게 고문이나 자문이나 책사나 장자방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한 말이 34절의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마음을 알 자가 없으니 누가 그에게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합니다. 본문 35절의 그 말은 욥41:11의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의 인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갚으시도록 무엇이든 먼저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있는 것 가운데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그 당연한 대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빚진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순순한 자의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그에 의해 유지되고 인도되며 그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며 그리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과 찬양이 돌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생각을 표현한 것이 본문 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의 구원에 관계된 모든 일들은 처음과 중간과 나중이 다 하나님의 은혜롭고 지혜로운 주권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의 온갖 의심과 망설임을 흩어버리고 우리 모두의 믿음을 확고히 하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와 감사와 순종을 드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선하신 뜻을 가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우리와 함께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생각 속에, 하나님의 뜻 속에,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일입니다.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 잘 몰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기한 은혜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미국의 그랜드 캐년이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국경에 있는 이과수 폭포 같은 웅장한 경관 앞에 서있다면 그 대자연을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 장관을 즐길 생각은 하지 않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경관이 진짜인가 아니가? 

내가 왜 이 경관 앞에 서 있게 되었는가만 묻고 따지는 사람처럼 딱한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그 놀라운 구원의 역사 앞에서 감탄하고 감격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은혜를 찬양하지는 않고 하나님이 왜 날 구원하는가? 왜 다른 사람은 아닌가? 이 구원이 사실인가? 등등 질문만 던지고 있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금까지의 삶은 우리가 알건 모르건 다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과 인도하심 가운데 이루어져온 것입니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했던 일뿐 아니라 슬프고 괴롭고 불행하다고 여겨진 일들조차도 하나님이 모르게 되어진 일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자신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 일어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우리가 얼마간 슬프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들을 겪었다 할지라도 지금 이렇게 살아남은 것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나간 슬픔과 고통과 불행은 언젠가 반드시 좋은 일로 결실할 것입니다. 그때 가서야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에 감격하며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십시오. 얼마나 억울하고 슬프고 괴로운 일을 당했습니까? 형들의 미움을 사서 먼 나라로 팔려가 졸지에 사랑하는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천애의 고아가 되었고 죄 없이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의 일시적인 고난을 이용하셔서 그의 온 가족을 다시 만나게 될 뿐 아니라 그들을 모두 기근에서 살리고 이집트 백성 전체를 구하며 온 가족이 이집트 왕 바로의 다음 가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직업군인이 되고 싶어서 자원하지 않는 한 군대 가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남자들의 경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어차피 가야하니까 기왕에 갈 바에는 사내답게 씩씩하게 가자 해서 가는 것이지 군대생활이 좋아서 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또 가능하면 군복무를 짧게 하기를 원하지 길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공군에서 만 4년, 임관하기까지의 훈련기간을 합하면 4년 4개월을 복무했습니다. 

그 당시 ROTC를 하면 2년 만에 군복무를 마칠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뭐 공군이 좋아서 4년 4개월씩이나 군복무를 한 것 아닙니다. 국가에 더 충성봉사하려고 긴 기간을 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손해 보지 않으려고 공군을 지원한 것입니다. 제가 대학 졸업이 가까워오던 때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복무하다가 때맞춰 제대를 앞둔 대학선배가 공군에 와서 자기 후임이 되라고 하면서 사관학교 교관이 되면 기간은 조금 길어도 대학원도 다닐 수 있고 계속 공부하면서 생도들을 가르치면 그보다 더 좋은 길은 없으며 4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말에 솔깃해서 공군을 지원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의 생각과 결정을 오늘의 저를 위해서 이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바라던 대로와는 전혀 다르게 저를 훈련시키셨습니다. 제가 입대한 때가 1968년 3월 초인데 바로 그 한 달 반 전인 1월 21일에 북한의 특수군인 124군 부대 소속의 무장공비 일당이 청와대를 까부수겠다고 내려온 소위 1.21사태가 터진 것입니다. 전군이 발칵 뒤집혔고 갑자기 훈련이 극도로 강화되었습니다. 공군은 3군 중에서 훈련이 제일 가볍고 장교들도 다 신사적이라고 들었었는데 정말 지옥훈련을 시키는가 하면 교관들은 하나같이 악질에다 독종들만 모아놓은 것 같았습니다. 

훈련이 끝나고 임관을 하고 보니까 또 다 신사처럼 보이기는 했습니다. 훈련은 힘들었지만 원하는 대로 교육장교로 특기를 부여받았고 또 공군사관학교로 배속을 받았습니다. 계획대로 순풍에 돛단 듯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가지 바라고 4년 4개월의 공군 복무를 지망했던 사관학교 철학교관의 꿈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2년 후에 어떤 선배가 그 자리에 오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제가 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4년 4개월을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모르는 절망감이 닥쳐왔습니다. 그런데 그건 또 약과였습니다. 교수부 철학교관 대신 발령받은 보직이 생도전대 군사훈련교관이었습니다. 4년 동안 사관생도들 군사훈련을 맡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찔했습니다. 철학공부 계속하려던 꿈뿐만 아니라 인생이 다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군대는 군대였습니다. 게다가 초비상시국이었습니다. 명을 받들어서 4년 동안 제식훈련부터 시작해서 총검술, 사격훈련, 각개전투, 분대전투, 소대전투, 화생방훈련, 고지탈환훈련 등으로 생도들을 훈련시키느라 연병장과 사격장을 오가는 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전군을 정예화하라는 대통령의 특별 지시에 따라 공군에서도 공수훈련과 유격훈련을 시행하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 각 기지마다 자체에서 교관요원을 차출해서 그런 훈련을 전담하는 특수부대에 보내 교육을 받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뽑혔겠습니까? 훈련의 성격상 군사훈련교관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짜 지옥훈련이란 게 거기 있었습니다. 그 훈련 마치고 나니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게 없고 무서운 게 없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사관학교로 돌아오니 기동타격소대 소대장이라는 새 직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실미도 사건이 터졌을 때 진압군의 일원으로 소대원을 이끌고 출동하기까지 했습니다. 대치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상황이 끝나서 교전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때도 정말 위기일발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어릴 때 늘 몸도 약하고 심약하기도 했으며 남 앞에 나서서 말도 잘 못하는 성격의 저를 변화시키셔서 오늘날 이렇게 쓰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습니다. 몸도 건강하게 해주고 정신력을 강하게 길러준 군대생활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 저는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철학교관 안 된 것이 너무나 잘 된 일이라고 여깁니다. 군사훈련교관이 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되레 아찔합니다. 자녀들 군대 보낼 때 어머니들 울지 마세요. 군복무하는 자세에 따라 어디서도 돈 주고도 얻지 못할 귀한 경험과 소중한 삶의 자산을 얻게 하는 데가 군대입니다. 

한 가지 경험담만 더 짧게 하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신학대학 교수로 있을 때인 1997년 2월 대장암 수술을 받고 1년간 학교를 쉬면서 항암치료도 받으며 투병생활을 했습니다. 대장암이라는 판정을 받는 순간 잠시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나님, 왜?”라는 물음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시기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곧 제 마음에 그것이 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놀라운 은혜의 기회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암에 걸려 수술을 받을 일로 인해서 얻은 유익은 많이 있지만 가장 감사한 것은 육신의 암을 통해 제 속에 숨어있던 영적 암을 발견케 하시고 그것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해 있는 기간만 빼고는 매일 하루를 거의 온전히 기도와 성경일기로 지내던 그 투병기간은 정말 뜨거운 은혜의 시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암 걸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사람이라는 공식이 제게서 나올 정도였습니다. 암수술을 받고 투병해본 일이 오늘 이 교회에서의 제 목회의 무거움을 얼마나 가볍게 덜어주고 있는지 여러분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저는 암 안 걸렸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짜 은혜 받고 싶은 사람은 그저 암에 한 번 걸려보는 것이 제일이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할 정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찬양하듯이 선하시고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를 위한 사랑을 실현하시는 지혜와 그러기 위해 그가 취하시는 길은 우리가 이루 다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선하신 계획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경배와 찬양밖에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통해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늘 우리의 입에서 찬양이 그치지 않으며 우리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 가득 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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