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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인 삭개오 (시 17:1-3, 눅 19: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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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삭개오 (시 17:1-3, 눅 19:8-10)
  

오늘날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총과 칼만이 아닙니다. 태풍 지진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도 참 무섭습니다. 근래 들어서 일본의 지진피해를 보며 그 무서움을 피부로 느낍니다. 그런데 이 자연재해의 피해로 인한 복구의 과정을 보면 사람들의 온정이 모이고 화합되는 것을 보면 자연재해가 반드시 부정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자연재해보다 오히려 더 무서운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편견”일 것입니다. 편견이란 나의 마음이나 나의 생각과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자기 마음대로 판단해 버리는 관점을 일컫습니다. 사람을 오해해서 나쁘게 보고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분열시키고 그 마음에 불행을 가져다줍니다. 이것은 어쩌면 큰 죄입니다. 누군가의 인격을 훼손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런 경향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서로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강아지와 고양이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강아지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올리는 습성이 있고 고양이는 그와는 반대로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길게 내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둘은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상대를 내 마음대로 판단해 버리니까 항상 서로를 오해합니다. 그래서 이 편견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고 불행한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에도 큰 오해와 편견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가 지배하던 시대에 살던 삭개오는 유대인으로 여리고 지방에서 세리의 직업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세무서장으로 임명된 것입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의 관세를 징수하는 관리였습니다. 그 때에는 정부에서 직접 세금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청부제도를 두어서 청부인을 통해서 세금을 걷게 했습니다. 

그 청부인은 대개 로마에 살고 있는 부호들이었는데 이들은 하청인을 두어 세금을 거두게 했습니다. 이렇게 세금을 거두어 바치는 하청인이 바로 세리 삭개오였습니다. 이 삭개오는 다시 아래에 여러 세리들을 두고 세금을 거두어 청부인에게 보냈고 그 과정에서 일부를 취하였습니다. 이런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세리는 일반적으로 도적취급을 받았고 백성의 세금을 무자비하게 거두어 로마에 바친다고 해서 매국노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도중에 여리고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바디매오라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 키가 작은 삭개오는 주위에 있던 뽕나무에 올라갔고 그 위에서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지나가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향해 “오늘 네 집에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어떻게 세리의 집에 들어가 먹고 마실 수 있느냐 하며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삭개오는 예수님께 두 가지 폭탄선언을 하였습니다. 하나는 “내가 그동안 속여 빼앗은 재산이 있으면 4배로 변상하겠다”는 선언이었고, 두 번째는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가히 폭탄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삭개오를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 여리고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그 대목에서 삭개오 이야기를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과연 무슨 메시지를 주시려고 하는 것일까요? 또 삭개오는 누구일까요? 과연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는 도둑이었을까요? 아니면 매국노였을까요?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삭개오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 사모한 사람

3-4절에 보면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보고 싶었고 만나고 싶었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고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이 말은 삭개오가 그만큼 예수님을 기다렸고 사모했고 만남을 갈구했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요소에는 이 갈급함, 기다림, 사모함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교회에 오시는데 기다림이 있었습니까? 설렘이 있었습니까? 기다림 중에 교회에 오신 분과 그것이 없이 오신 분은 많이 다릅니다. 마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모습도 다를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보고자 나무위로 올라간 그 순간 이미 삭개오는 예수님의 제자가 다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사모했기에 이미 행동하였습니다. 삭개오가 왜 행동하였습니까? 그것은 사모하였기 때문이고 기다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는 기다리며 사모하는 사람이 받습니다. 기다리고 사모하며 갈구하던 삭개오는 이미 예수님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집으로 모심 

5절을 보면 예수님이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왜 거기 있느냐, 내려오라, 오늘밤에 네 집에 가겠다”고 삭개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는 보고 싶었고 만나보고 싶었던 예수님을 직접 자신의 집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다린 사람은 만나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만나면 반가운 법이고 행복한 법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모신 자신의 집에서 두 가지 선언을 하였습니다. 이 선언은 폭탄선언입니다. 하나는 “누구의 것을 떼먹고 도적질 한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8절)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언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동안 내가 많이 떼어 먹었다, 그러니 4배로 갚겠다”라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이 지금까지의 해석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삭개오를 향하여 의당 그렇게 떼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나는 떼먹은 것이 없다. 나는 정직하게 일했다. 만일 내가 누구의 것을 떼먹은 것이 있으면 4배로 변상하겠다”라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이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해석입니다. 여기서 삭개오는 “나는 결백하다”하고 예수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결”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나는 나의 이름대로 나를 더럽히지 않았고 정직했다”하고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삭개오는 지금 예수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삭개오의 마음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런 예수님 앞에서 지금 자신있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도적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아닙니다, 나는 누구의 것을 떼먹은 일이 없습니다, 만일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 그래서 이 선언이 폭탄선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내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겠다”(8절)는 선언입니다. 오늘 말로 말하면 “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말입니다. 삭개오가 도둑질한 것을 세상에 내어 놓겠다 했으면 자랑거리가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랬으면 사람들이 감동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비아냥거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정직하게 양심선언을 하고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한 푼도 떼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진실고백을 한 후에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하고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 앞에서가 아니고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날 감동이 극대화 된 것입니다. 이 선언은 사람들의 허를 찌르는 선언이었고, 사람들의 오해를 순식간에 불식시키는 선언이었습니다. 또한 그동안 모질게 다가왔던 편견을 고발한 선언이었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잘못 보았는지를 고발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감동을 받으셨고 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구원이 오늘 이집에 이르렀고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은 “삭개오의 말은 진실이고 거짓이 없다”는 즉 “너는 의인이고 정직자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삭개오 통해 주시려는 메시지 

오늘 본문 가운데 삭개오를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 중 하나는 유대인의 위선에 대한 고발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볼 때 삭개오는 의당 돈을 떼먹은 도적이었고 동족을 등쳐먹는 매국노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대부분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세상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정직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를 애국자이고 의인이라고 자칭하던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제사장들을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짐승 취급하였습니다. 특히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하게 취급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으며 그 땅은 밟지도 않았습니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BC 722년에 북왕국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속국이 됩니다. 그러자 사마리아에 살던 유대인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반란을 자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앗수르는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인구교환정책을 썼는데 북왕국 수도인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을 끌어다가 앗수르에 살게 하고 앗수르에 살던 이방인들을 끌어다 사마리아에 살게 했습니다. 

그 후 이 두 민족은 자연스럽게 서로 결혼하여 혼혈족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습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아주 불결하게 여기고 멸시하기 시작했으며 상종도 하지 않고 그 땅을 밟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편견이 심합니다. 그렇기에 삭개오가 세관원으로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니까 의당 떼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도적이라고 본 것입니다. 본문은 이점을 고발합니다. 자신을 의인화하고 남을 죄인화하는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은 무섭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쉽게 범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의인화 하고 남을 죄인화 하는데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설교에서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이 나오면 이것이 곧 “나를 향한 말씀”이라고 받는 것이 설교를 듣는 태도인데 “이 설교는 박집사가 들어야 해”라며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게 되는 유대인의 죄 습성입니다. 이런 모습은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더 심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새신자들이 “이것은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치유가 안 되는 것입니다. 서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의 죄 습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여기 삭개오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먼저 믿은 사람들의 위선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삭개오를 통하여 주시는 메시지는 편견의 무서움에 대한 고발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리 삭개오가 당연히 돈을 떼먹었을 것이라고 기정사실화 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라는 그의 직업 때문에 질시와 증오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친구도 없고 가까이 하는 사람도 없이 살아갔습니다. 이러한 편견이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따돌림, 왕따 같은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예를 들어볼까요. 반에서 연필이 하나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대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가난한 아이를 도적으로 지목합니다. 죄책감도 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집에 가 보니 잃어버린 줄 알았던 연필이 책상 밑에 떨어져 있습니다. 이런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또 집에서 다이아반지가 없어졌습니다. 주인은 당연히 가정부를 의심합니다. 그래서 한바탕 난리를 떨고 나서 침대 밑을 보니까 거기에 반지가 떨어져 있습니다. 또 길거리에 남루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순식간에 생각하기를 “불행하겠구나”하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무서운 편견입니다. 옷을 잘 입으면 무조건 행복합니까? 큰 집에 살면 무조건 행복합니까? 어느 허름한 옷을 입은 신사가 하버드 대학에 가서 총장 면회를 신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총장과 면회를 시켜주지 않는 것입니다. 실망한 이 신사는 하버드 대학에서 나와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어떤 이의 추천으로 벤더빌트라는 대학을 찾아갔습니다. 그 대학에서는 총장 면회신청을 했더니 금방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사는 총장에게 봉투 하나를 내 밀면서 “내 전 재산을 정리한 것인데 학교발전을 위해 사용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 봉투 안에는 500억 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오늘 벤더빌트 대학이 유명한 대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전도사 때 어느 노 여전도사님께서 중매를 서셨습니다. 그런데 선을 보러 여자 측 부모님이 교회로 직접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멀찍이 서서 요리 조리 보더니 가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생긴 것은 멀쩡한데…” 전도사니까 장래성이 없어 보인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오늘 이 설교를 방송으로 볼지도 모릅니다. 록펠러는 청년 때 사귀던 여자 친구로부터 절교선언을 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장래성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후에 그 여자 친구는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보고 경멸했고 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편견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무서운 편견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더 심한 사람들은 삭개오가 지나가면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삭개오를 통해서 그 시대를 고발하고 계십니다. 의인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행동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대에 바리새인과 같이 남을 죄인화 하는 그런 무서운 편견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삭개오를 통하여 주시는 메시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상 그리고 제자상을 제시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렇게 상당기간을 오해 속에서 편견을 받으며 친구하나 없이 살아갔습니다. 참으로 고독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이웃도 없고 친구 하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편견과 질시를 받고 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이렇게 오해를 받으면 때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 많은 연예인들이 이러한 고민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인터넷을 통한 편견인데 실제로 홍수처럼 쏟아지는 무분별한 댓글 때문에 참기 힘들어서 자살하는 연예인도 있습니다. 오늘 인터넷이 편리함도 주지만 때로는 이런 이유 때문에 사탄 박스라는 생각이 들게도 됩니다. 실제로 이 시대 사탄들은 이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마음대로 할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인격을 모독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명예를 훼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사람들을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습니다. 

삭개오의 경우도 이렇게 오해와 편견가운데 있었지만 여기에서 삭개오는 일일이 찾아다니며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신의 할 일만 묵묵히 했습니다. 그는 분명 “언젠가는 나를 알아 줄 때가 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그를 지탱하였을 것입니다. 그 대신 삭개오는 정확하게 세금을 안내해 주었고 수납시켰다고 합니다. 세금이 체납된 동포에게는 날짜를 넘기면 벌과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에 집에 찾아가 안내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집에 찾아갔는데 없을 때는 한밤에 또 찾아갔고 또 없으면 쪽지를 써 놓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동포를 챙겼습니다. 그런데 그 무서운 편견들이 그런 삭개오의 배려와 동포사랑을 묻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려면 의식이 있어야 하고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오해도 받고 편견 속에 살아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변명하고 항변하고 따질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때마다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중심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된 자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면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삭개오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삭개오에게 마침내 때가 왔습니다. 주님이 그의 집에 오신 것입니다. 그 때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내가 누구의 것을 떼먹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 내 전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 주겠다.” 그것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 앞에서 말입니다. 그랬더니 주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너도 이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 말은 자신들만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의인이라고 우기며 살던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의 오만함과 교만을 고발한 것입니다. 오늘 누가 진정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그것은 누가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던지 자신이 맡은 일을 중심 있게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나는 정직했습니다”하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고 그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또한 그 사람이 주님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시대의 삭개오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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