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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위하여 작은 여우를 잡으라! (아 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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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하여 작은 여우를 잡으라! (아 2:10-17)


어느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목회를 하다가 아주 큰 문제를 만났습니다.  통성 기도회 시간에 교인들끼리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보니까 기도 시간에 절반 정도의 사람들은 일어섰고, 나머지 교인들은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가 맞은 편을 향하여 자기들이 교회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고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목사님이 아무리 설득하고 말려도 양측의 대립은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로 고민을 하던 젊은 목사님이 이 교회를 세울 때 있었던 창립 교인인 99세 된 노신자 한 분을 만나기 위해서 양로원에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이 할아버지 교인에게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충을 털어놓았습니다.
"할아버지, 통성 기도 시간에 회중들이 일어서는 것이 이 교회의 전통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도 중에 앉아 있는 것이 전통이겠군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니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우리 교회의 전통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랬더니 이 할아버지 교인이 이렇게 대답을 하시더랍니다.
"우리 교회의 전통은 절반은 일어서고 절반은 앉아서 서로 고함을 지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예배하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은 예배만이 아니라 모든 삶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편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을 합니다.  받아들이는 것도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내 입맛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라고 하는 것도 자기 입맛대로 만들어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자기 주변에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본격적인 관계성 안에서 생활을 하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는 그 관계성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관용적이고 사랑을 제공하는 관계성을 통해서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은 혼자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틴 부버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관계인 '나와 너' 중심의 인간관계를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와 너' 중심의 인간관계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결코 일방적이거나 독선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쌍방향적이며, 항상 다른 사람을 향하여 대화의 채널을 열어놓습니다.  상대방이 가진 개성이나 독특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용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 먼저 공동체와 구성원을 생각합니다.

마틴 부버가 이처럼 인간관계를 중요시하고, 대화를 중요시하는데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사람과의 관계성이 성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추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가 무너진 신앙은 샤머니즘적인 무속 신앙과 같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인간간에 감동과 인간애가 발생하지 않으면 그 가운데 하나님과의 만남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가장 큰 목적은 대화요, 관계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우리가 없고, 우리 없이 하나님도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언제나 긍정적인 인간관계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 가는 믿음의 공동체 속에서의 생활도 늘 긍정적인 관계만 존재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긍정적인 인간관계만 준비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격려하기 위해서 모였다가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공동체 속에서 경험되어지는 가슴 아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공동체 속에서의 관계를 외면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이웃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이유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동차 사고를 경험한 직후에 다시는 자동차 운전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일수록 다시 핸들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심리적인 상처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삶은 너무나도 불편해 질 것이고, 그는 운전함으로써 오는 더 많은 유익함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공동체 속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모임과 관계를 거부하는 지혜롭지 못한 성도가 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그럴수록 더 만나셔야 합니다.  그럴수록 더 관계성 안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종종 인간관계의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갈등 요인들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요인들 때문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주 작은 것들 때문에 관계가 무너져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작은 여우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시골처녀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가서를 보게 되면 사랑하고 있었던 이들 두 사람이 사랑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사랑의 위기를 넘어서서 회복되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성숙시켜나가는 경험에 도달한다는 아름다운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15절에 보면 그들이 한때 겪었던 사랑의 위기가 표현되고 있는 그런 대목입니다.  본문 1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팔레스타인의 들판에는 많은 여우들이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땅에서 여우라는 것은 언제나 포도농사를 망치는 원흉으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갑자기 어느 날 포도원에 나타나서 땅을 파고, 구덩이를 만들고, 심지어 포도줄기를 갉아먹는 이런 여우들은 포도원의 무법자들로 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포도꽃이 피어나는 계절이 일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그리고 연인들이 로맨스의 꽃을 피우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여우들은 더 기성을 부립니다.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면 종종 그 여우들이 나타나서 깽판을 치기도 하고, 또 포도원에 들어가서 포도원을 망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땅의 연인들에게 있어서 여우들은 언제나 사랑의 파괴자로 상징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영적으로 말하면 이 여우의 역할이 마치 마귀의 역할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귀는 참소자라는 뜻입니다.  본래 마귀라는 낱말은 희랍어에서 두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무엇 무엇 사이에, 그 다음에 던진다.  던져서 사이를 가른다, 참소자, 이간자….

부부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부모와 자녀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성도와 성도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그래서 공동체의 모든 아름다운 관계들을 파괴하는 것, 이것은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때때로 아주 작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교묘하게 우리의 공동체 속에 들어와서 서로의 틈새를 벌어지게 만듭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작은 여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포도원, 아름답고 건강해야 할 우리의 포도원을 헤치고 있는 작은 여우들을 잡자!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만들어 가는 우리의 믿음의 공동체가 건강하게 지켜지기 위해서 우리는 이 포도원을 헤치는 작은 여우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믿음의 공동체를 헤치고, 성도와 성도의 틈새를 파고 들어와서 이간질시키는 이 작은 여우들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아가서 전체를 통해서 이 아가서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었던 사랑의 위기, 그 위기 속에서 볼 수 있는 공동체를 위험하게 하는 작은 여우들의 정체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시작해서 성경이 지적하고 있는 우리들의 공동체의 하나됨과 그리고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깨뜨리는 작은 여우들의 정체를 몇 주간에 걸쳐서 함께 찾아보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잡아야 하는 것은 큰 여우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작은 여우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종종 관계가 위기를 겪고, 공동체의 하나됨이 허물어지는 갈등의 요인들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요인들 때문입니다.  아주 작은 사소한 것들 때문에 관계가 무너지고 분열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결론적인 말씀이지만 우리가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심도 믿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도 성도와의 관계가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죽은 샤머니즘적인 믿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만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감동과 사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예배와 신앙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성도들과의 관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두 번째로, 우리가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분열된 나라와 교회를 축복하신 일은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십시오.  고린도 교회는 성경에 나오는 여러 교회들 가운데 성령의 은사가 가장 탁월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가장 하나가 되지 못한 교회이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이 말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모두가 자기 입맛대로 자기 말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이 말은 지금 고린도 교회 안에는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한 공동체 속에 있었지만 결코 같은 마음도 아니었고, 뜻을 같이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 고린도 교회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지금은 겨우 흔적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라는 선교적 사명을 따라 한 공동체에 모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결코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가 되지 못하는 공동체를 축복하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작지만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가 천을 이루는 강한 믿음의 공동체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작은 공동체를 통하여 세상도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의 하나됨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가서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작은 여우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잡아야 할 이 작은 여우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는 열등감이라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본문을 거슬러 올라가서 아가서 1장 5절과 6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이 내용은 한 여인의 열등감이 묻어 나오는 장면입니다.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자기 피부 색깔에 대한 열등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자분들은 피부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그런데 아마 이 여인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가운데 얼굴이 검어졌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포도원지기가 된 것은 타의에 의해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면,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자기 포도원이라는 말은 자기 얼굴 관리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포도원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피부가 검어지고, 그래서 내 얼굴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내가 검어졌다, 나를 흘겨보지 말라, 그래도 나는 아직도 아름답다.  여인의 자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장 5절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여기서 게달의 장막은 검은 염소 가죽을 말합니다.  내가 검은 염소 가죽처럼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아름답다고 항변하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 여인의 의식 밑바탕에 깔려있는 깊은 열등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공동체와 인간 관계를 파괴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열등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열등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어떤 사람도 열등감에서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때로는 열등감 때문에 열심히 일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삶에 플러스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병적인 열등감입니다.

우리가 병적인 열등감에 붙잡히게 되면 인간관계가 정상적이지를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있어서 지나치게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사람들,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방어적인 사람들, 또 쉽게 사람들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그 밑바탕에는 병적인 열등감이 깔려있습니다.  여러 가지 유형의 열등감, 이를테면 피부에 대한 열등감, 외모에 대한 열등감, 환경에 대한 열등감,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열등감, 돈에 대한 열등감….  우리들 주위에 보면, 이런 숫한 열등감들 속에 붙잡혀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열등감을 치유할 수 있는 제일 좋은 하나님이 처방은 바로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은 부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  권세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셨다."

그래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된 교회에는 높은 자도 없고 낮은 자도 없습니다.  오직 사역만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허물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허물조차도 사랑할 수 있는 곳, 약점 속에서도 장점을 발견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여기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 여인이 그런 열등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열등감에도 불구하고 왕이 나를 사랑한다는 이 사실 때문에 열등감을 극복해 나가는 사랑의 과정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우리들에게 일관되게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으니, 너희도 서로 용납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수많은 약점과 열등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 되신 우리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받은 나도 성도와 이웃을 그대로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많은 약점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나를 받아주신 것처럼 나도 그 약점을 수용할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열등감을 넘어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고독이라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아가서 3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3장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그러니까 이 여인의 연인이 어떤 이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잠시 그녀를 떠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이지만 이 여인은 다시 고독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이 여인이 경험하고 있었던 사랑의 위기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평범한 사랑의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복잡하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함께 있어도 인간은 여전히 고독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인간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어떤 실존적인 고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있으면 어느 정도 우리는 고독감을 해소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정을 주시고, 또 영원한 가족인 믿음의 공동체를 주신 가장 중요한 실제적 이유 중의 하나가 고독에 대한 치유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으므로 우리는 이 고독감을 극복해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 공동체를 허락하신 이유는 세상에서 지치고 힘든 믿음의 형제들을 서로 돌아보면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혼자 있지 마십시오.  힘들고 어려울 때 믿음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오십시오.  물론 믿음으로 모였다가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분들이 교회 공동체를 회피하는 이해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작은 여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더 큰 소망과 감격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수록 더 공동체 속으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17세기에 영국 성공회의 성직자요 시인이었던 존 던이 리버풀 항구에서 배를 타는데 교회 식구들이 마중 나와서 손을 흔드는 것을 조금은 번거롭게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노인이 교회 식구들에게 다가오더니 지폐 몇 장을 내밀면서 "부탁이 있습니다.  배가 떠날 때 저를 위해 손을 흔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하더랍니다.  그 날 그는 공동체를 떠나서 의미 있는 생존이 불가능한 인간의 실존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시의 한 줄은 이렇게 씌어집니다.
"우리는 각 각 떨어진 외로운 섬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대륙의 한 부분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함께 있는 축복이 우리 믿음의 공동체를 지키는 견고한 축복이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대화의 결핍이라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아가서 5장 2절 이하에 보면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납니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그런데 안 일어납니다.  머리에는 이슬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어도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3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무슨 뜻입니까?  신랑이 와서 문을 두드리는데 잠들어있는 신부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옷을 벗었는데 어떻게 다시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귀찮다는 것입니다.  신랑에게 적절히 응답하지 못하는 신부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인데 싶어서 뒤늦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6절에 보면,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러니까 일어나서 문을 열었더니 신랑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는 모습, 만나도 만나지 못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고 해서 성도와의 만남이 언제나 긍정적으로 아름답게 성숙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지만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는 이런 비극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가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성도들 사이에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화가 단절되었다고 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비극이지만, 믿음의 공동체도 비극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대화라는 것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창조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간도 함께 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보려는 노력을 통해서 대화의 길이 열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가는 부부도 대화를 소홀히 여기고, 그래서 대화 없이 하루 이틀을 지내다 보면 때로는 타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가까이 살지만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 됩니다.  하물며, 전혀 다른 성격과 전혀 다른 삶의 자리에서 만난 성도들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명을 가지고 믿음을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성도와의 대화가 없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에 힘들 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대화의 상실이라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공동체라고 하는 포도원을 메마른 건조한 사막처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사막 속에 아름다운 포도원, 이것이 믿음의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몸된 이 교회 공동체마저도 메마른 사막처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대화가 없다면 말입니다.

미국의 어떤 잡지에 실린 기사입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적이 무엇이냐? 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보통 사람들은 그것이 산불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환경 전문가들은 미국의 자연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적은 '흰개미 떼'라고 합니다.  흰개미 떼가 커다란 자연 손실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에 보이는 굉장한 것만이 손해를 입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작은 것,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치료되지 못하는 열등감, 내 마음속에 해소되지 못하는 뼈저린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성도들간에 대화를 소홀히 하는 것, 거기서부터 우리의 공동체는 서서히 무너져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아가서 2장 15절에서 이 여인은 이렇게 호소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여기에서는 명령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영어번역에 보면, "우리가 함께 잡자!"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여우들은 함께 잡아야 됩니다.  목사만의 노력으로 안됩니다.  어느 한 성도만의 노력으로 안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노력해야 됩니다.  우리가 함께 우리 믿음의 공동체의 아름다운 포도원을 헤치는 작은 여우들을 잡자!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사도 여러분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도움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에서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나와 함께 하는 믿음의 공동체의 형제 자매들에게 나도 그 은혜를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수 있다면,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의 믿음의 공동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 해도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미국 어떤 크리스챤 부부들의 간증을 다루고 있는 잡지에 실린 아주 평범하지만 짤막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 부부는 별거중인 부부였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이혼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남편의 마음속에는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마지막 싸인하고 이혼이 합법화되기 전에 제가 한번 정말 진지하게 기도하고 제 아내를 찾아가겠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애에 짧지만 정말 진지한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저는 제 아내에게 가서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제 아내에게 너무 잘못했어요. 제가 그것을 알아요.  하나님 용서해 주시고,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을 주시고 무슨 행동을 해야할지 그것도 하나님이 가르쳐 주세요."

그날 자기가 큐티 하는데 마태복음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낼 때 "네가 말할 것 염려하지 말아라 말할 것을 성령이 주신다"는 말씀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찾아갔습니다.  그의 아내가 있는 친정 집은 뉴저지 바닷가였다고 합니다.  사실은 그 바닷가에서 이 부부가 처음 만났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만나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사정을 합니다.  당신하고 마지막으로 바닷가를 한번만 꼭 걷고 싶다고….

그러니까 아내는 마지못해서 나옵니다.  이제 부부가 말없이 바닷가를 거닐기 시작합니다.  어색한 표정으로 계속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처음 만났던 바닷가, 같이 걸었던 바닷가, 그런데 한참 가다가 갑자기 물이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아내가 넘어졌습니다.  넘어져서 물을 틀고 일어나다가 결혼반지가 빠져 나왔습니다.  그 반지는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처음에는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반지를 보면서 안타까워하다가 갑자기 아내가 몸을 도사리더니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쯧, 미안하지만요 그렇지만 뭐 어차피 반지는 필요 없잖아요?"

그 순간 갑자기 남편이 엉뚱한 행동을 합니다.  자기 반지를 빼더니 물에 던져버렸습니다.  아내가 쳐다보면서 "아니 당신 그 반지 왜 던져요?"  남편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 반지가 외로울 거 아냐?  내 반지가 함께 있으면 좋을 거 아냐?"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에 아내는 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신 정말이에요?"  "정말이야."  "그럼 난 당신하고 있고 싶어."  아내는 남편의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나 집에 갈 거예요.  한 번 더 노력하죠."

이것이 회복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라면 우리가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인생의 포도원, 그리고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이 믿음의 공동체라는 포도원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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