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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의 힘 (눅 6: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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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힘 (눅 6:36-38)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6장 36∼38절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인간은 원수에게 복수할 때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용서할 때 원수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현대 미국의 성공학자 앤드류 카네기는 “우리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원수를 용서하고 잊어버리자. 그것이 현명한 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순간 먼저 우리 자신이 건강하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미움과 원한을 품으면 위장도 나빠지고 심장도 나빠지고 신경도 예민해지고 몸이 약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셔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희생제물이 되셔서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오는 사람마다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1. 하나님과 용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용서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절대 정의로우시고 절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인이 그냥 걸어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불의한 죄인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하고 있고,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지었습니다. 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갈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가 있습니다. 그 죄의 구렁텅이에 다리가 되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로마서 3장 19절로 20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으나 율법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한 것이며 율법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선한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을 희망이 없습니다. 종교적인 의식이나 형식을 가지고서 죄를 덮을 수 없습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로 22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죄를 다 청산해 버리고 화목케 한 것입니다. 원수가 되었던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화목케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이 없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이웃을 용서할 각오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내 생애 최고의 축복’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복음에는 누구든지 라는 정책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란 인종과 계층, 성별과 전통 모두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누구든지’ 믿고 침례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정의로우신 분이시고 우리는 완전히 불의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든 그대로 하나님 앞에 예수님을 믿고 나오면 무조건 용서를 받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2. 용서와 화해와 평화

용서를 통해서 화해가 오고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평화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회개하고 원한과 상처를 지워 버려야 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지워버리는 지우개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해서 죄를 다 지워버린 것처럼 이웃과의 원한도 풀어버리고 지워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들여다보고 원한이 있는 것을 발견하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워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한번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하나님이 기억을 안하십니다. 우리가 잊어버리는 은사를 받아야 됩니다. 이웃의 허물과 죄를 용서했으면 잊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를 평안 혹은 평화의 매는 줄로 묶고 행복과 기쁨을 가지고 감사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로 15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용서 위에 사랑을 하고 사랑의 띠로 묶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캐나다 맥길대학의 정신과 교수 다반루 박사는 “인간의 문제는 결국 분노와 이에 따르는 죄책감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분노는 밖으로 나와도 큰일이고 안으로 삭여도 큰일인 것입니다. 분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분노가 자신 안에서 터질때는 우울증이나 자기비하로 큰 병이 되는 것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달스트롬 교수는 분노와 죽음에 대해 연구를 했는데 그는 의대생을 대상으로 적대감을 조사하여 적대감이 높은 그룹과 낮은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25년 후에 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돼서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그들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50대가 되었을 때의 사망률을 알아보니까 마음에 학생시절 적대감이 높았던 의사들은 낮았던 의사보다 7배나 많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심장질환에 걸린 사람도 5배나 많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독인 적대감을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회개하고 마음속에 있는 원한과 상처를 십자가에서 지워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3. 갈등을 극복하며 사는 길

갈보리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있으면 예수님은 모든 쓴물을 달게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처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광야입니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광야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광야길에서 쓴물을 달게 하는 것은 십자가를 끌어 안아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죄의 쓴물도 달아지고 부패와 부정의 쓴물도 달아지고 병과 고통의 쓴물도 달아지고 저주와 가난의 쓴물도 달아지고 죽음과 지옥의 물도 달아지는 것입니다.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이 모든 것이 십자가에 엎드려서 하나님을 찾을 때 마음속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기 때문에 거기에서 생명의 역사가 우리에게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장식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가슴속에 모셔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가슴속에 모셔들이면 그 속에서 치료하고 화목케 하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그것이 매일같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이루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갈보리에서만 일어난 옛날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 가슴속에 예수님이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고 역사를 베풀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 속에 부활하셨으니 우리는 그 예수님을 의지하므로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 속에 끊임없이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매일같이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고 이것을 마음속에 바라보고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을 믿고 매일같이 변화한다고 입술로 시인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학문으로써의 예수 그리스도는 도움이 안됩니다. 종교적인 예수 그리스도도 도움이 안됩니다. 바울은 우리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우리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고 계십니다. 주님이 몸찢기고 피를 흘리면서 내 속에 계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계시니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의 예수님이 되었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붙잡고 기도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놀라운 기적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갈등이 극복되고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겁나지 않습니다.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넘치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께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기고 피 흘려 달리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음으로 그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찾는자가 찾게 됩니다. 부르짖어야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와 계신 것은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변화를 가져오고 새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종교적인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서 와 계시지 않습니다. 놀러와 있지 않습니다. 일하기 위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 위해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 기도하고 부르짖어서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구할 때 우리 마음속에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과 꿈을 가지고 믿음으로 구하면 반드시 주님이 응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당장 응답해 주실 때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에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기도를 해주는 것하고 우리가 용서받고 사랑받는 것하고 관계가 대단히 깊습니다. 대단히 어려운 관문이지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이 속에 계신 예수님께 부탁을 하십시오. ‘주님! 내 힘으로는 안되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 사랑과 은총으로 부활의 능력으로 나를 도와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할 때 우리가 치료받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 진지한 대화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우리가 서로 진지한 대화를 하게 되면 서로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어려운 것이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내 원하는 것을 말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드는 것입니다. 집회를 마치고 난 다음에는 피곤하지 않습니다. 안수기도 할때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신앙상담이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상담은 인내를 가지고 들어줘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각양각색의 사연을 갖고 온 성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이 세상에 들어주는 것보다 힘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말을 들어주면 ‘저 사람 정말 나를 이해하고 나를 동정하고 사랑하는구나. 저 사람을 믿을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꾸 말을 하는데 ‘간섭을 하고 그만 하세요.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하면 ‘내 말 안듣고 나를 이해하지 않고 나를 미워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가장 어려운 것이 대화입니다. 남편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부인이 들어서 마음에 상처가 와도 듣는 것이 참 좋습니다. 우리 마음이 확 열리고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것은 남에게 내 속에 있는 말을 다 털어놓고 난 다음에 상대가 이해하고 알아주면 굉장한 치료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처음에는 건조하고 지루한 이야기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진심으로 경청하는 우리를 향해 마음을 열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대화할 때 마음을 다해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잘 들어주고 평가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화해와 평화를 이룰수 있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자꾸 가로채서 평가를 하면 싸움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대화가 안되고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에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일생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와도 같습니다. 분쟁과 갈등의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 안개 같은 삶을 산지사방으로 흩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세와 내세에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 것도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야만 되는 것이고 사람과 우리 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 것도 내 속에 계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 내 마음에 큰 고통 사라진다”고 찬송한 것처럼 십자가의 힘이 아니고는 우리가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십자가가 아니고는 아버지 앞에 나갈 수도 없고 우리 이웃과 화목을 이룰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으나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됩니다. 초자연적인 부활의 능력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흑암의 세력이 밀려와도 십자가를 의지하면 십자가는 흑암을 광명으로 무질서는 질서로 죽음을 생명으로 독을 중화시켜서 단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이웃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용서하지 아니하면 화해가 되지 아니하고 화해 없이 평화가 없고 평화가 없이 행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용서도 화해도 평화도 행복도 예수 십자가가 그 근본이 된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도 예수님 때문에 이웃과 대화가 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는 것도 십자가 때문에 된 것이오니 십자가를 끊임없이 의지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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