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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놀라우신 은혜 (딤전 6: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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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우신 은혜 (딤전 6:3-10)


지난 목요일 저녁쯤에 산책을 하기 위하여 문남 공원을 갔다가 참으로 한심스런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남녀 중학생들이 벤취에 앉아서 어른들의 흉내는 다 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가도 전혀 챙피한 기색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담배를 남녀 학생들이 피우고 있었는데 여학생이 담배를 피우면서 활보를 하고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그들은 교복을 입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양을 내내 생각을 하면서 그들은 집에서 나올 때에 어떤 모양을 부모에게 보이고 나왔을까? 학교에 간다고 하였을까? 아니면 학원에 갔다온다고 하였을까?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그저 그들에게만 보여지는 일일까 아니면 많은 우리의 자녀들이 그러한 유혹과 과정을 갖고 있음에도 우리는 알지를 못하는 것일까? 하는 두려움과 염려들이 엄습해 왔습니다. 

이런 부분에 우리들을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의 자녀들은 이러한 사회악의 자리에는 안전할까? 하는 의구심이며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괜찮겠지 하는 우리들의 가슴은 안심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늘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식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측면으로 늘 생각을 하지만은 선물이라고 한다면 귀중히 여기며 귀하게 보전을 하여야 하는데 우리들의 영역에서는 참으로 안전하게 만들어 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이 아침에 성경의 경고와 그리고 성경의 방법으로 돌아가서 우리들의 자녀를 양육을 하여야 한다는 성경의 그 간절한 요청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먼저는 믿음의 부모의 라고 하는 그 본래의 심정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마20:20이후에 보면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전개되는 예루살렘의 행진의 내용입니다. 우리주님은 12명의 제자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채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을 하시기를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과정을 지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견디기가 어려워서 주님의 행동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을 하시기를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로 데리고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 것은 갈릴리에서 그들을 부르실 때의 주님이 부르신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따로 부르셔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하리라]는 3년전의 말씀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때가 되었기에 이런 일들을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주님을 방문한 제자의 부모가 있었습니다. 
마20:20절을 보면 그는 세베대의 어머니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두 번째로 받은 사람들입니다(마4:21). 주님이 그들을 부르실 때는 어부였다고 하지만 성서학자들은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때에는 그들은 아주 가난한 서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은 종을 거느리고 있었고 넓직한 집이 있었으며 대제사장 가야바와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어부이긴 하였지만 그 고장에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집안으로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후에 그들은 주님의 제자들 중에는 핵심그룹에 속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가장 중요한 일들을 결정을 하는 장소에서는 그들을 데리고 가셔서 한적히 의논과 기도를 요청을 하였던 사람들입니다. 

마17장의 변화산 사건에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셔서 우리주님의 변화되는 사건을 보여 주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특별히 주님으로부터 사명에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주 특별한 제자 이름이 드러나는 제자들이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60만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30만명이난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였을 때에 긴장감이 감도는 계획들을 그들은 들었습니다. 물론 주님은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지만 이번에 두 번째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의미와 사명의 무게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긴장감이 감도는 그 현장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등장을 한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예루살렘의 그 죽음의 십자가를 지고 갈 계획이 주님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자리였지만 그의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주님의 심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말씀을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의 간청은 주께서 예루살렘에서의 정권을 잡게 되는 순간에 그의 아들들의 자리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21절의 말씀을 보시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나쁘게 말한다면 청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오늘날 특별한 어머니들! 자기 아들의 출세를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아주 극성스러운 어머니들의 얼굴을 기억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들은 안면에는 두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의 아들만 성공을 한 증거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고 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야고보의 어머니의 스타일로 기도와 신앙의 자리를 만들어 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은 기도의 내용은 자식의 만사형통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다른 사람은 다 낙오자가 되어도 나의 자녀는 어떤 방법을 통하여서라도 1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들의 자녀를 부르실 때에 어떤 것들을 원하시면서 부르셨을 까요? 정말로 세상에서의 완전한 성공자로만 부르셨는가? 아니면 실패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고 섭리가 있는자로 부르셨는가? 

세상의 사람들은 주님을 볼 때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네가 유대인의 양이고 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그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실패처럼 보였습니다. 초라하게 보였습니다.그러나 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에는 실패로 보였겠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승리한 것입니다. 성공하고 1등만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자녀들이 세상에는 익숙한 성공의 영역에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한번의 실패를 하면 인생을 다 망한 것처럼 보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리스도인들 스스로도 낙망하고 절망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의 어머니처럼 그런 판단과 시선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익숙하여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부모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을 세상의 기준으로 인하여 오른편만이 성공이 아니라 왼편의 높은 자리만이 성공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성공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을 하는 부모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성공과 1등 우등생이라는 세상적 단어들이 우리들의 자녀를 얼마나 많이 괴롭히고 있는 지 모릅니다. 

성경은 말씀을 하시기를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신다고 하였으니 그 놀라운 복을 믿음 안에서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발견하는 부모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셨던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것은 물질의 경계를 요청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물질로 만들어진 세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법들은 물질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세워져가고 잇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질이라는 것이 충족이 되지 못하면 살아갈 가치를 다 포기하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오늘날 같은 IMF의 시대에는 더욱이 위축된 경제바탕에 있기에 더 얼마나 많은 경제에 관심이 많은지 모릅니다. 모든 삶의 자리들을 물질에만 관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씀을 하시기를 딤전6:7절에 보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세상에 올 때에 빈손으로 왔는데 우리의 지금의 상황들은 어떠합니까? 참으로 많은 것들을 얻었고 소유를 하였습니다. 대단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심정은 이것으로도 만족을 못하는 습성이나 모양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다는 신앙적 기준을 세워 놓고서도 안절부절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자녀들은 모든 것들은 물질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황금 만능주의 물질 우선주의라는 영역 에 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잠재적인 의식 속에는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폭력이나 살인 그리고 사기 거짓말들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딤전6;8절의 말씀은 "우리가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의 품성이 어떠합니까? 교만합니다. 변론과 언쟁만을 좋아합니다. 투기와 분쟁이 있고 훼방함이며 악한 생각들이 저들을 지배하고 잇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은 말씀을 하시기를 물질이라는 영역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물질의 영역 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구약에서는 롯입니다. 그의 시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직 물질이라는 것으로부터 떠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돔성의 그 풍성함으로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다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피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신약의 사람은 가롯 유다입니다. 그는 돈궤를 맡고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만 그 돈이 어두워서 그의 선생을 은 삼십에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결국은 그는 그 돈으로 인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초라한 자가되고 만것입니다. 바울은 말씀을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 하라는 것입니다. 딤전6:3절을 보면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곡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이라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시라]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은 능력이 있는 줄로 여기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주님의 공급하여 주시는 은혜로 승리하며 살아가는 가정과 자녀들을 만들어 주는 경건한 부모들이 이러한 우리들의 갖고 있는 비 신앙적 오소 때문에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정하지 못해 얼마나 갈등을 갖고 있는지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맡겨진 자녀들을 어떤 모양으로 세워가고 인도하여야 진정으로 승리하는 자녀로 만들 수 있을까하는 신앙적인 질문에 성경에서 바른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오늘날처럼 사람들의 심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것 같은, 그리고 오직 물질만이 자신들을 구원하여 준다고 물질에 잡혀 있었던 성경의 한 시대를 보고자 합니다. 

그 시대는 사사시대를 지날 때인 시점입니다. 삿21:25절에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당시의 사람들의 모양을 그려주는 영적 위기를 맞이하는 시대의 사람입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사람들의 모양이 그대로 반영이 되는 것처럼 사람들의 심성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들을 부르시고 우리들의 자녀를 부르신 것이 아닌가요? 이런 시대에 소금과 빛의 사명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어머니의 심정에서 떠나길 원하시고 바울의 그 간절한 소유에서의 자유 함으로 초청을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들의 자녀를 온전히 키워야 할 원칙이 있음을 성경을 통하여 함께 이 아침에 공유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안다고 한다면 승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승리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이 그처럼 가장 어두웠던 영적 암흑기에 혜성처럼 하나님이 쓰셨던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한나라는 여인입니다. 한나는 무자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것으로 인하여 너무나 큰 수치와 무시를 당함으로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성전에서 매일 쏟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식을 만약에 하나님이 주신다면 그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데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나실인으로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나들을 선물로 허락을 하셨습니다. 이쯤 되면 한나에게는 소원이 이루어 졌기에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신앙의 자리가 조금은 느슨하여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자녀로 인하여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그 사무엘이 젓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성전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오늘의 구약의 본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엘리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셨기에 나도 그를 하나님께 드립니다.]라는 것을 선언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오늘 이 한나의 신앙적인 모양을 3가지로 말씀을 드리고 마칠까합니다. 

그 하나는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그분과 교통 할 수 있는 채널을 기도라는 것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때문에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입니다. 기도의 자리를 온전히 만들어 나갈 때에 무너진 가정과 무너진 자녀들이 회복이 되어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자리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도 점검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지 야고보의 어머니처럼 주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양의 기도인가? 나는 너를 알지를 못한다 하시는 일방적인 나의 욕심으로 만들어진 뜻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가 이 오월의 새벽기도에서 회복되어 주님의 보좌에 응답되어지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비젼이 있습니까? 자녀들에게 비젼이 없으시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녀들에게 비젼이 있다고 하면서도 기도가 뒷받침이 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더 심각한 일입니다. 꿈꾸는 자들은 망하지 않습니다. 

사실 꿈을 꾸는 자들은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래를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모양만을 보면서 낙심하지 마시고 기도 안에서 자녀들의 꿈을 꾸시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연을 날려보신 적이 있지요 하늘높이 날려본 연을 높이 날리려면 연줄이 튼튼하여야 합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바람의 영향으로 끊어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연줄을 튼튼하게 만들기만 하면 그 연은 그 줄에 매어있는 한은 하늘높이 올라갈 무한의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는 연을 날리는 끈과 같습니다.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의 원하시는 거룩한 자리에 앉게하기 위하여는 기도의 줄로 매어 가시는 부모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을 합니다. 그냥 되지 않습니다. 마루바닥을 적실 만큼의 한나와 같은 기도의 어머니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한가지는 나실인으로 키워가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나실인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사람들입니다. 긴머리를 하고 다녔을 사무엘을 상상을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어머니 한나는 그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을 때에 그를 위하여 세마포 에봇을 만들어 입혔고 작은 겉옷을 준비를 하여 에봇과 구별하여 입혔던 사람입니다(삼상2:18-19) 나실인은 이미 하나님 앞에 받쳐진 사람입니다. 

우리들의 자녀는 우리들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선물로 잠시 맡겨 주셨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한다면 소중히 하나님의 방법대로 양육을 하였다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우리들의 마땅한 의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도 나실인으로 양육을 하기 위한 신앙적인 방법들이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적용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신앙적 열정을 소유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가르치자! 신명기 6:4-5절에 "들으라 이스라엘아 야웨는 우리 하나님이시며 야웨는 한분이시다. 너희의 마음을 다하고 너희의 모든 것을 다하여 너희 하나미의 야웨를 사랑하라"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언어를 가르쳐본 경험들이 많이 있습니다. 

언어는 한번의 교육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번 반복을 통하여 언어 트여지고 대화가 만들어집니다. 나는 하나님의 언어를 우리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가르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가도록 얼마나 인도를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또한 우리들의 자녀들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학교에 가서는 선생님의 가르침입니다. 친구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많은 이야기들을 거르지 않고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능력이 있다고 나는 믿고 있으면서도 나는 얼마나 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한나 처럼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도록 가르치고 양육하는 부모님이 되셔서 이 고난의 위기에서 자녀를 볼때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보여지는 부모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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