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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느부갓네살 왕의 고백 (단 4: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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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부갓네살 왕의 고백 (단 4:34-37)

다니엘서에서 나오는 이방인의 왕 느부갓네살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우리가 지금 읽은 본문이외에도 2장과 3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과 섭리하심에 대해서 3번씩이나 고백한 것으로 다니엘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대 사람 다리오 왕 역시 다니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단 6:16, 25-27). 

이 시간에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느부갓네살 왕의 고백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상을 섬기는 이방 민족의 왕의 입에서 어떻게 하여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면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고백이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과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에 대해서 스스로 찬양하는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그는 여전히 우상신을 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질문, 그리고 끝으로 그는 어떻게 그러한 성숙한 고백을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1. 첫번째 고백 

느부갓네살 왕의 첫번째 고백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그가 장래의 일을 염려하며 잠이 들었을 때 꾸게된 꿈에 대해서 다니엘이 해몽하여 주었을 때 그가 했던 것입니다. "...생략(꿈 해몽)....." 

이와 같이 다니엘이 꿈을 해몽해 보이자 느부갓네살 왕은 단 2; 46-47 에서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 고백의 내용 가운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2:47의 "모든 신의 신"이니 "모든 왕의 주재"라는 표현은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여호와 하나님 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의미에서의 고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은 많은 신들을 인정하고 있는 상태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말입니다. 즉,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단지 모든 신들 위에 있는 하나의 신이요, 모든 왕들을 다스리시는 모든 신들 위에 있는 하나의 위대한 통치자임을 인정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꿈을 해몽했던 다니엘을 높은 자리에 앉혔다 하더라도 진정 그 꿈을 보여주시고 해몽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가 경배하거나 그를 따르는 모습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거에 대해서 우리는 그가 금신상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그 앞에서 절을 하게 하는 잘못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2. 두번째 고백 

그러면 두번째 그의 고백은 어떠합니까? 

느부갓네살 왕의 두번째 고백은 다니엘과 함께 끌려온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관련된 사건에서 나타난 고백이었습니다. 첫번째 고백에서 살펴본대로 여호와를 참된 유일신으로 고백하지 않은 느부갓네살 왕은 금신상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절을 하게 했는데 마침 유대인들을 참소하는 사람들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절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이 사실을 왕에게 고했습니다. 왕은 이 세청년들을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넣으라는 명령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도 조금도 상하지 않은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느부갓네살 왕은 단 3 : 28 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을 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여기 두번째 고백에서는 첫번째 고백과 비교해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좀더 인정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진심으로 의지하는 자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번째 고백이 여호와의 그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신들의 존재를 똑같이 믿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인데 반해 3 : 29 후반부에 나타나고 있는 표현은 좀더 구체적인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로 느부갓네살 왕은 3 : 29절에서 "무릇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행동이 거만하고 무례함)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라고 엄히 명하고 있는 사실을 들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명령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존재를 참으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느부갓네살 왕의 두번에 걸친 고백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요컨대 느부갓네살 왕의 고백은 진정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고백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우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가 라는 말입니다. 이 질문은 느부갓네살의 세번째 고백을 살펴보면서 대답될 수 있습니다. 
  

3. 세번째 고백 

느부갓네살 왕이 통치하던 때는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누렸던 것 같습니다. 단 4 : 1-3 절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평안의 때를 누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또다시 그에게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꿈과 해몽에 대해서는 단 4 : 15-26 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꿈의 요지는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라"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담긴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브갓네살 왕은 단 4 : 30 에서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교만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단 5:18-21절에는 왕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그는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뜯어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의 꿈은 현실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단 4 : 34--37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세번째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고백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번째 고백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번째 두 번째 고백은 단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과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내용 뿐인 것에 반해 세 번째 고백에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함은 물론 상대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우상신보다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주관자이심을 증거해주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초월적으로만 여겨지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격적으로 얼마나 인간의 삶에 가깝게 머물고 계신지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느부갓네살 왕의 세번째 고백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인격적이며 자신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는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을 나의 인격 속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단순히 전능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설령 그것이 입술의 찬양으로까지 이어질 수는 있다 하더라도 다만 말의 유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남용되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고백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습니까? 

혹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면서도 우리의 삶은 언제나 나 자신을 의지하는 그런 고백은 아닙니까? 우리의 인생의 실패를 맛보는 것은 혹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서 실패를 하는 것은 아닙니까? 

혹,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고 고백하면서도 소망없는 사람과도 같이 언제나 불안과 염려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잘 알고 또 고백하면서도 우리의 삶은 언제나 미움과 시기로 가득찬 그런 삶은 아닙니까? 

우리의 공동체는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굳건하게 세워져 있기는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른 고백을 해야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백이 질적으로 성장해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적이고 일반적인 하나님 인식에서 구체적인 삶 속에서 살아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의 고백에 있어서 성장은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통해서 참 하나님을 알게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들은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고백을 통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또 우리로부터 도움을 요구하게 되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도움을 요구하며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연약한 자와 병든 자를 우리가 돌아보지 않음으로서 우리들은 천국잔치에서 쫓겨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하려 하지 않고 누구도 돌보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일들을 우리 그리스도 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쁘게 행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점점 더 성숙해가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어려움과 고난 속에 있을 때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남을 돕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남에게 짐을 안겨주는 일들을 자행하게 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그리고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에게 보여준 태도는 도대체 어떠한 것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위협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금신상에 절하면 살려주겠다는 느부갓네살 왕의 마지막 제안에 대해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단 3:16-18절에서 단호하게 그 제안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 불가운데서 자신들을 건져내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설령 그러한 소망이 헛된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은 오직 여호와만을 참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믿음의 확신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위기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적인 태도를 포기하지 않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써 사자굴에서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단 6:22-23). 

우리 민족은 지금 위기의 한가운데 놓여있습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아쉽고 또 가슴 아픈 일들은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 고백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위기에 휘말려버린다면 도대체 누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바로 이 때에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위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가운데 기쁨과 평안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며 지낸다면 우리의 소망에 대한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섬기면서 오히려 남을 도우면서 또 담대하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은 이땅에서의 삶이 아니고 천국에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천국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위기의 시대에 기쁨의 소식을 증거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증거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삶 속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한다면 지금 위기 가운데서 방향을 잃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빛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면서 담대하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러한 위기에서 흔들릴 이유가 전혀 없게 됩니다. 오히려 소망없는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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